고난주간 저녁기도회. 둘째 날. 마가복음 11장 20-25절, 무화과나무. 서부교회. 임채영 목사.
마가복음 11장 20-25절 I 무화과나무
오늘이 고난주간 둘째 날입니다. 고난주간 둘째 날은 변론의 날이라고 불립니다. 이날은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소위 끝장토론이 있었던 날이거든요. 엄청난 기적의 소문을 몰고 열광적인 환영 속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에 대해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 공세를 퍼붓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사람이 죽어서 동생이 형수랑 결혼했는데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막힘없이 대답하셨고 결국 그들은 잠잠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둘째 날에는 이런 변론 전에 이른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있습니다. 첫째 날에서 이어지는 시간인데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 시작은 첫날부터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는 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13절입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여기에서 '잎사귀 있는'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쿠산 휠라(echousan phulla)'인데요. 그대로 번역한 '잎을 가진(having leaves)'입니다. 그런데 여기 무화과나무가 '잎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잎이 막 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유월절 이전 3월 말 경에는 아직 잎이랄 것이 없습니다. 그때는 가지가 연해지고 '잎들이 막 돋는' 때이지요. 3월 말 경에는 아직 잎이랄 것이 없습니다. 그때는 가지가 연해지고 '잎들이 막 돋는'때이지요. 3월 말 경이면, 아직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 위에 있는 다른 무화과나무들은 가지가 막 연해지고 잎이 막 돋아나고 있는 때인데, 오직 예외적으로 '한 무화과나무'만이 '잎들을 가지고 있는'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저주받은 그 무화과나무는 어느 정도의 '잎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예수께서 생각하실 때, 잎이 저 정도면 무화과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실 정도로 잎이 다 컸고 나무는 그 큰 잎들로 빽빽했겠지요. 그것을 우리 말로는 '잎이 성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무화과는 잎이 무성하면 과일을 맺고 있어야 합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잎사귀가 나면 열매가 열립니다. 거기에, 이것이 무화과나무의 아주 독특하면서도 일반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만 특별하게 그 철 이른 잎 때문에 예수님의 주목을 끌었던 것입니다. 다른 보통 무화과나무들은 아직 잎이 이 나무만큼은 나지 않았어요.
예수께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는 저 혼자서만 잎들로 덮여 있었습니다. 아직 다른 무화과나무들은 가지에 물이 오르고 막 싹이 돋아날 무렵입니다. 아마 이 나무만이 돌연변이로 잎이 무성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한 말은 아직 잎이 무성할 철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철을 무시하고 잎이 무성했다면 거기에 걸맞은 과일을 맺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나무들은 겨울나무에 막 봄 나무로 푸른빛을 띄우는데 이 나무 하나만 유독 그렇게 무성한 잎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무화과는 잎이 무성하면 과일을 맺어야 합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잎사귀가 나면 열매가 열립니다. 거기에 이것이 무화과나무의 아주 독특하면서도 일반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잎사귀가 있으면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잎이 무성할 철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잎이 무성했다면, 보는 이는 비록 무화과 철이 아니라 하더라도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저주를 받은 그 나무는 잎만 무성했지 과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저주.. 14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저주.. 왜? 너무 잔인한 것은 아닌가? 도대체 이 사건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는 메시지는 도대체 뭘까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무화과나무는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제일 많이 이슬엘 민족을 비유하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자,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가 어떤 나무였어요? 잎만 무성했어요. 그런데 뭐가 없었어요? 열매가 없었어요. 잎 파리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던 나무, 그것이 그 당시의 이스라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의 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겉에서 보면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가면 없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의 상태가 바로 껍데기만, 이파리만 있었고 내용이 없었다는 지적입니다.
자 오늘 왜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열매가 없어서? 아니에요. 열매가 있어 보여서입니다. 즉, 잎이 무성했기에..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뒤에 15절부터 보시면 어제 우리 우리가 읽었던 성전청결 사건이 나옵니다. 마치 이 무화과나무 사건 속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어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장사 터로 만든 사람들을 다 쫓아내신 사건입니다. 그러면서 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아라.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아라. 어제 말씀을 기억하세요. 그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이방인의 뜰에서 제사를 드리러 오면 제사 제물을 사야 돼요. 제물을 사는 과정에 있어서 흠 없는 제물을 사도록 권고하면서 거기서 막대한 이익을 제사장과 상인들이 짜고서 그 이익을 제사장들이 취하고 있었던 거예요. 또 심지어는 외국에서 오는 유대인들이 이제 헌금을 드려야 하는데 외국 돈 드리면 안 된다. 그래서 돈을 바꿉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이방의 뜰에는 환전소가 다 있었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 있어서 제사장과 상인들이 짜고서 막대한 이익을 착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제사장들이 밥낮 그들이 제사를 집행하지만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요? 돈에 대한 이익. 그것이 그들의 머리를 채우고 있었어요. 이런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소위 신앙의 형태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을까요?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익밖에 없었어요. 신상의 본질은 외면되고 그리고 잘 못된 것들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예루살렘 종교의 모습이었습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저는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우리에게서 얼마나 중요한 것은 신앙의 본질, 예배의 본질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결과로 내가 얼마나 주 앞에 올바른 삶을 살고, 살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고 삶이 얼마나 변화되는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변화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대로 사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의 유일한 관심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우리의 삶이 만약 껍데기만 내비치는 다시 말해서 무화과의 잎 파리만 무성한 삶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보문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엄숙한 경고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용 없는 형식뿐인 종교 그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사랑하는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아픈 마음으로 전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전을 청결하게.. 다시 베다니로 오셔서 주무시고 그다음 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자, 20-21절입니다. ' 20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
자, 그 이튿날 아침에 보니까 말랐어요. 그런데 뿌리로부터 말랐어요. 뿌리째 말라서 죽어버린 나무.. 이것을 본 제자가 깜짝 놀라며 어제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난 거지요. 예수님 나무가 진짜 죽었어요. 어째 이런 일이..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죠? 22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말한 대로 되지 않았느냐? 너희는 내 말을 믿느냐?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제자들이 지독하게도 안 들었어요. 내가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씀하셨는데도 귓등으로 들었어요. 자신들의 생각에 빠져서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말한 대로 되지 않았느냐? 너 말씀을 믿느냐? 묻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말씀이 진리라고 믿으십니까 생명이라고 믿으십니까? 능력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네 하나님을 믿으라. 정말 신뢰하라! 이 말이에요.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느냐?
바로 예수가 하나님이십니다. 나무 보고 길거리를 지나가다 나무보고 나무여! 열매를 맺지 못할 지어다. 나무가 말을 들었다는 얘기예요. 도대체 이 분이 누구예요? 이 분이 한마디 말하면 나무도 복종하는 이분, 그는 바로 이 나무를 만드신 분, 그리고 나무를 다스리는 분.. 예수는 창조자다. 예수는 섭리자다. 그리고 예수는 심판자이시다. 바로 이것이 메시지예요. 나무만 그랬나요? 여러분,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가다가 파도가 일어나니까 어떻게 하셨어요? 파도여 바다여 잠잠할지어다. 파도도 바람도 이 분에게 복종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묻잖아요? 도대체 저분이 누구냐? 저분이 뉘시기에 바람과 파도도 복종하는고? 이 바람과 파도를 만드신 분. 그리고 이것을 다스릴 수 있는 분. 창조의 어떤 뜻을 가지고 이것을 섭리할 수 있는 분. 그는 창조자다. 그는 섭리자다. 이것이 메시지가 아닐까요?
또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얼마나 자주 그분의 치유의 사건, 병자를 고치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분,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예수께서 그 청년을 향해서 이런 명령을 하지 ㅇ낳았습니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시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시체도 복종하는 이 분,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하는 분, 생명을 거둬갈 수도 있는 분, 그리고 다시 생명을 줄 수가 있는 분, 도대체 이 분은 누구일까요? 그는 창조자요. 그는 섭리자요, 그뿐 아니라 그분은 사람을 다스리고 심판할 수 있는 심판자. 바로 그것이 메시지입니다. 그는 창조자예요. 그러나 만들도 손 떼는 분이 아니라 여전히 그 만드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분. 그리고 그 만물이 창조주의 의도를 거스리리 때 그 만물을 심판할 수 있는 분! 그분을 믿으십니까? 계속되는 말씀을 보세요. 23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믿음의 기도란? 내가 원하는 바를 간절함을 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간절한 기도일 수는 있어도 믿음의 기도는 아니다. 믿음의 기도는 내 속에 있는 갈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주가 되어야 한다. 내 힘으로는, 내 지식으로는, 내 경험으로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은 어떤 것,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하시겠다고 하시는 그 일, 거기에 믿음이 생깁니다.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나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의지, 거기엔 그 일을 세상의 모든 사람이 방해해도 결국은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 힘으로는 기도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기도요, 그것이 지정한 산을 옮기는 기도입니다. 산을 옮기는 것이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산을 옮기고자 하신다면 언제든지 그 산은 그 자리에서 마치 바다에 빠진 것처럼 아니 애초게 거기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지,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골리앗을 향하여 나아가는 다윗..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 믿음 앞에 거대한 골리앗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다음 24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데도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난임, 그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다면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하라!
보세요. 주님은 기도의 제목을 제한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의 제목을 제한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의 영역을 제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진다. 세상에 이것보다 신 바람나는 것이 어디 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진다. 만일에 누가 와서 여러분에게 무엇이든지 구해보세요. 내가 다 드릴게요. 이런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만일에 우리나라 재벌 회장이 저에게 와서 목사님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다 들어 드릴게요. 그럼 제가 뭘 구할 것 같으세요? 우리 교회 남은 대출금 다 갚아주세요. 이게 얼마나 위대한 사건이에요. 지금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시는 거예요. 무엇이든지 구하라고요. 그럼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약속에도 기도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부요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진지하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세요? 왜 불안해하세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요. 목사님! 제가 열심히 기도하는 데도, 기도하는 데도... 제가 열심히 까지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기도하려고 그래도 애를 쓰는데도 저는 기도 응답의 경험이 없습니다. 뭐, 기적도 임하지 않고 뭐 그저 그렇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도가 막혔는지도 모릅니다. 기도의 파이프 라인이 막혔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기도해도 소용이 없어요.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기도의 파이프라인이 막고 있는 것,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인간관계의 갈등, 내가 어떤 사람과 갈등 관계에 있다면 그래서 내 마음속에 이웃을 향해서 미움이 있다면, 용서치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기도를 막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그것이 바로 25절의 말씀이에요.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너희가 기도해도 만약 어떤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누군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을 용서하라. 그리하면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리라. 뭐가 생각나세요? 주기도문이 생각나지 않으세요? 자, 주기도문의 한 대목이 어떤 대목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그다음이 뭐예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이웃들을 용서할 때 하나님! 저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제가 용서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웃들을 용서할 때 하나님! 저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제가 용서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용서합니다. 미움을 포기하고 용서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하늘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기도가 역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면 하늘의 문이 열려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고 생동하기 시작하고 주의 권능과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막혔거든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내 삶 주변을 돌아보세요. 내 이웃들을 돌아보세요. 용서하지 못한 사람, 내가 품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그를 깨끗이 용서하세요. 그리고 그를 사랑하세요. 그 순간부터 여러분, 기도가 살아 움직일 것입니다. 내 삶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앙,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살아있는 신앙, 여러분! 신앙이 살아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존재할 필요가 없으면 끝난 것 아니에요? 살았어도 끝난 인생이에요. 그것은.
제가 어떤 책을 읽다가 이런 얘기를 봤는데, 깊은 동굴에 아주 깊은 동구에, 아주 깊은 동굴에 조그만 호수가 있어요. 그 호수 안에 고기들이 있는데 어떤 동물학자가 그 고기들을 연구해 보니까, 그 고기 중에서 송경 고기, 보지 못하는 고기가 그렇게 많더래요. 그래서 왜 그런가 연구해 보니까 깊은 동굴 속의 어둠 속에서 빛을 봐야 할 필요가 느끼지 않은 이 고기는 시간이 가면서,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장님이 되고 말았다. 송경이 되고 말았다. 보아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니다 그렇다면 존재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눈이 있어도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존재할 필요가 없는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가치가 없는 인생, 여러분 우리 인생이 얼마나 존재할 가치가 있는 인생으로 지금 여기서 살고 있습니까? 주 앞에 영광을 돌리고 이웃들에게 필요한 인생, 쓰임을 받는 인생, 열매를 맺는 인생, 여러분! 이런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 길은 하나밖에 없어요.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와 굴복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요? 내 삶을 돌아보시고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살펴보시고 그를 용서하십시오. 그 순간 하늘의 문이 열리고 주의 능력이 쏟아질 것입니다. 내 삶이 살아 움직일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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