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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설교문 I 엘리야의 모습을 배우기(7) - 탈진의 파도 맞서기 I 열왕기상 19장 1-18절

by №1★↑♥ 2023. 3. 30.

엘리야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축복이 되었다. 하늘로부터 내린 불의 응답 이후 큰 비가 내리는 이스라엘의 땅은 가뭄과 흉년에서 다시 회복되게 되었다. 엘리야의 모습은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쥔 능력과 권세의 모습이었다. 더욱더 놀라운 엘리야의 모습은 마차를 타고 이슬엘로 가는 아합 왕 보다 앞서 달려가는 데 있다. 먼저 내려간 아합 왕의 뒤에 남아 비 내리는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기까지 기도하던 자가 어떻게 아합왕보다 앞서 달려갔는가? 정말 하나님이 엘리야를 데리고 가신 것인가? 아니면 땅을 접어 달리기에 한 걸음에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순간적으로 갈 수 있었는가?

 

엘리야의 모습을 배우기(7) - 탈진의 파도 맞서기 I 열왕기상 19장 1-18절

이처럼 엘리야의 능력은 특별하다. 이해하기 어렵다. 어쩌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왕상 19:1-18의 엘리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무너져 있다. 언제 내가 승리와 부흥, 축복을 이끌어가는 사람이었느냐고 반문하듯 가장 초라하고 약한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다. 오늘 하늘 문을 열던 자가 돌연 죽기를 원하는 자로, 불로 응답을 받던 자가 돌연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자로 바뀌어져 있다.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의문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왕상 19:3-5를 보면 엘리야의 동작 묘사가 나온다.
왕상 19:3 '일어나.. 도망하여'
왕상 19:4 '앉아서... 죽기를 원하여'
왕상 19:5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엘리야는 도망하던 힘마저 없어 앉아버린 선지자가 되었고, 앉아서 죽기를 원하는 자, 아니 힘 마저 없어 광야에 누워 버렸다. 도망을 위해 뛰어갈 힘도 없고 앉아서 버틸 힘도 없기에 그냥 나무 아래 누워 버리고 앉았다. 초라해진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삶을 죽음에 내던져 버리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1. 두려움의 파도가 밀려와서(왕상 19:3)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왕상 19:3이 그 해당이다. 즉, 엘리야가 일어나 도망하기 시작한 연유는 '이 형편을 보고'란 왕상 19:3 상반절의 말씀이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이 형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승리 히우 갑자기 그에게 전해진 이세벨의 위협이다. 내일 이맘때까지 반드시 엘리야의 생명을 빼앗으리라는 전갈이다. 엘리야는 갑자기 자기 생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세벨의 말을 듣고 보니 왕의 추격자들에 의해 잡히지 않고 한시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엘리야는 갑자기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신앙을 확립하기 위해 나섰던 그의 삶의 초점이 자기 지키기로 바뀌었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는 가장 연약한 자가 되었다. 도망자가 되었다. 브엘세바로 가고 거기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도주하는 이 행동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다가도 자신에게 둘러싸인 형편을 바라보는 자는 전혀 예상 못한 두려움의 파도가 밀려온다. 생명에 대한 안전과 생명에 대한 애착심과 생명을 지키려고 방법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에는 초조함과 더불어 큰 두려움이 넘실거리며 내 마음과 신앙을 강타해 버린다. 그래서 자기 하나 살고자 하는 이는 죽게 되고 생명을 던져 죽고자 하는 이는 사는지도 모른다

사실 두려움을 이긴 자는 변질되거나 바뀌어지지 않는다. 두려움을 이긴 자는 도주하거나 달아나지 않는다. 허나 백전노장의 믿음의 사람이라도 한 시대를 움직인 영적 거장이라도 어느 순간 자기 생명을 지키고자 할 때 두려움의 파도가 밀려온다.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곳으로 달려간다. 세상 신은 우리들에게 이 형편, 저 형편을 가져다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눈을 고정하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에 눈을 고정하고 형편 따위를 무시해 버려야 한다. 엘리야도 이런 파도에 넘어졌으니 얼마나 연약한 사람들인가? 환경과 여건, 사람들의 압박을 무시하라. 나를 넘어뜨리려고 해도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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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외로움의 파도가 밀려와서(왕상 19:10)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은 엘리야에게 무슨 외로움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깊은 영성 생활을 하는 이들에겐 외로움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막 교부들의 일기를 보면 사막에서 수도하는 교부들이 더 강하게 죄와 싸우는 일기를 써 놓고 있다. 세속인들이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죄들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이처럼 엘리야도 마찬가지이다. 왕상 19:10을 보면 엘리야가 찾으시는 하나님께 이렇게 답을 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새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이 말씀 속에서 엘리야는 오직 자신 혼자만 살아남은 선지자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도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 한다는 고백을 통해 자신이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인생임을 역설한다. 이 말씀은 왕상 19:14에서 또 똑같이 반복해서 되뇐다.

얼마나 엘리야가 외로웠는지를 보여준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오직 나만 남았거늘'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혼자라는 생각, 그것도 다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고 이제 혈혈단신 자신만 표적이 되어 남아있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이다. 동조자나 말을 건네어 들어줄 이가 없는 삶. 언약의 백성들이 언약을 버리고 언약을 세우려는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이 외로움. 외로움의 파도가 강력하게 밀려와 선지자를 맹타한 것이다. 

나만 봉사하고, 나만 싸우고 나서는, 하나님 편에서 몸을 드리고, 나만이라는 외로움에 넘어지지 말자. 사실주의 일을 하다가 혼자라는 생각은 오해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왕상 19:18을 보라.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라고 하였다.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가 있음을 알려주셨다. 그렇다. 나 혼자가 아니다. 불현듯 다가오는 외로움의 파도가 엄습할 때 착각하지 말자. 절대 혼자가 아니다. 누구인가. 돕는 자가 있다. 같은 동지들이 있다는 동지애로 맞서라.

 

3.  공허함의 파도가 밀려와서(왕상 19:7, 15-17)

갈멜 산의 승리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 진멸한 선지자는 자신의 사명이 다 끝난 줄 알았다. 사명이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말한다면, 엘리야는 승리 이후 이제 그 종착지에 이른 것인 줄 안 것이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으니 사명을 다했다고 하면 쉽게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 이 엘리야의 문제는 바로 사명을 다했다고 하는데서 오는 공허함이다. 이제 내 할 일을 마쳤다는 집중력 뒤에 따라오는 공허함이다. 그래서 그는 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원하며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하고 삶을 끝내려 한다. 

그러나 천사가 왕상 19:에서 다시 나타나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라고 잠자는 선지자에게 권명하고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말한다. 아직 사명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죽으면 안 되고 누우면 안 되고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왕상 19:15-17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세 가지 사명을 주신다. 

  1. 하사엘에게 기름을 붓고 아람 왕이 되게 하고,
  2.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3.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고 엘리야의 뒤를 잇는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는 기름 붓는 사명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결국 엘리야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자기 갈 길이 남아있는데도 다 된 것인 줄 알고 공허함의 파도에 떠밀려 달아나고 주저앉고 누워버리고 탈진하는 연약자가 된 것이다.

두려움의 파도가 무섭다. 거기에 외로움의 파도가 밀려오고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는 공허함의 파도가 요동칠 때 앉아있을 힘마저 소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 완전히 퍼져 버린 선지자, 지치고 쓰러진 사람이 된 것이다.위대한 사람의 탈진? 위대한 이가 탈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탈진하는 것이다. 성직자이든, 기도의 대가이든 누구든 탈진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탈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한 순간에 옮겨질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탈진하는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주저앉는다. 허나 아직도 가야 할 길에 할 일이 있는 것을 안다면 공허함을 이겨낼 수 있다. 내 생애 아직도 사명이 있음을 발견하면 공허함을 짓밟으며 우리는 힘차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나를 주저앉히고 탈진하여 완전히 퍼지게 만드는 파도는 순간순간 일어나고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돕고 계신다. 천사를 보내 이끌어 가신다. 먹게 하신다. 자게 하신다. 쉬게 하신다. 가이드를 하신다. 상담해 주신다. 이야기를 들어주신다. 이 처럼 안내하며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떤 파도 앞에서라도 사명을 받아 힘을 얻은 엘리야의 모습을 배우고 다시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누구나 사명이 주어지면 두려움의 파도를 탈 수 있다. 외로움의 파도, 공허함의 파도가 태산을 이루고 밀려와도 그 파도를 타고 나아갈 수 있다. 탈진의 파도에 당당히 맞설 수 있다. 파도가 두려움이 되지 않는다. 파도타기 선수들에게는 포다고 오히려 기다려지듯 즐거움으로 인생의 파도를 맞서고 다시 일어서 갈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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