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저녁기도회. 셋째 날. 마가복음 14장 1-9절, 칭찬받은 낭비, 서부교회. 임채영 목사.
마가복음 14장 1-9절 I 칭찬받은 낭비
오늘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삼일 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려는데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도 모르는 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무리 예수님이시라도 인간적인 허무와 분노도 있으시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다니로 가서 쉬십니다. 그래서 오늘을 '침묵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나고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 대표적인 사람들이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 베다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다니로 가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여인, 즉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사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사람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자,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자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자, 명절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 그런데 이 명절이 가까운 시각에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종교인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잡아 죽일 음모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유월절이면 이스라엘 전역에서 심지어는 해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순례를 옵니다. 예루살렘으로, 이백만 이상 삼백만의 인파가 예루살렘 주변에 넘쳤어요.
예수님은 그 당시에 아주 서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삶의 소망이었고 능력이었고, 구원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를 잡아 버리면, 체포하면 혹시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은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명절이 가까운 떠들썩한 그러나 예루살렘 한 구석에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던 그 시각에 본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자, 이 사건이 일어난 집은 어디였다고 기록합니까? 3절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 사건이 일어난 집은 누구의 집입니까? '나병 환자 시몬의 집' 그랬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병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한센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환경이 청결하지 못했던 시절에 가장 흔하고 위험한 병이 피부병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종기라든가 눈에 나는 다래끼 같은 것들.. 불결한 환경에서..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아마두 악성 피부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예수 만나고 치료를 경험한, 기적을 경험한 사람. 그러니 자기를 이 죽음에서부터 건져 낸 그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했겠어요?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잔치를 벌인 거죠. 그는 치료받았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이 별명이 따라다닙니다. '나병환자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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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쨌든 잔치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 갑자기 한 여자가 예수님 앞으로 다가옵니다. 자, 3절에는 한 여자가,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한 여자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같은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이 한져의 이름이 누구라고 그랬습니까? 마리아,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깹니다. 그리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향유는 마침내 예수님의 발등까지 이렇게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어요. 그런데 바로 이 장면에서 흥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의 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아니 어째서 이런 고급 향유를 이렇게 낭비할 수가 있느냐? 이것은 낭비다! 이렇게 비난을 했습니다. 5절을 보세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런데 이 여자를 책마하고 비난하는데 앞장섰던 대표적인 사람의 이름이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누구라고 했습니까?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 비난한 사람이 가룟 유다였습니다. 흥미롭지요? 자, 유다의 이 말만 놓고 보면 이 사람의 말이 옳습니다. 삼백 데나리온, 그 당시 노동자가 하루 받는 품삯이 한 데나리온, 그러면 삼백 데나리온이면 며칠 분에 해당되는 품삯인가요? 삼백일. 일 년의 품삯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 엄청난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줘봐라, 얼마나 많이 구제를 하겠느냐? 아주 피상적으로 합리적인 말이고 설득력 있는 옳은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유다의 편을 들거나 이 사람들의 편을 들지 않았습니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저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였다구요? 좋은 일을 했다. 자, 우리말 번역에는 '좋은 일'이라 했는데, 영어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아름다운 일'이라고 번역했어요. A beautiful thing, 아름다운 일! 아름다운 일을 했다. 저가 아름다운 일을 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매우 역설적인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히려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찬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이 여인이 이런 일을 한 도의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자, 무엇이 아름다운 동기일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해 보셨지요? 기억을 해보세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 진짜 사랑에 빠져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은 상식을 초월한다. 계산도 초월한다. 유다의 비판은 피상적으로 접근해 보면 그것은 일정 부분 옳은 얘기입니다. 자, 이게 보통 액수냐? 이 옥합 속에 들어있는 향유, 인도산 향유 나드, 그 당시에 가장 고급한 향유였습니다. 자, 얼마라고 그랬어요? 삼백 데나리온. 자, 그것은 얼마의 품삯에 해당돼요? 거의 일 년 품삯. 여러분의 일 년 월급을 계산해 보세요. 매달 삼백 만원 씩 받으시면 일 년이면? 삼천 육백 만원을 드린 것입니다. 적지 않은 헌신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에도 그 이상의 헌신을 주 앞에 드리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어쨌든 얼마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의 헌신이 아름다운 헌신이 되려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에서는 이 가룟 유다라는 사람, 이것을 비판하고 있던 유다의 동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을 보세요.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유다가 비판하고 있던 숨겨져 있던 동기를 주께서 지적하십니다. '저는 도적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도둑놈이다' 겉으로는 가장 합리적인 단어를 쓰고, 가장 사회정의에 민감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가 딴생각이 있어서 그렇다.. 흔히 남들의 헌신을 비판한느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에게도 그 헌신이 요구될까 봐, 자기를 잃어버리기 싫어서 숨겨진 이기적인 동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헌신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유다의 동기였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 모든 계산은 초월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 사도는 사랑을 서술하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된 말, 모든 사람에게 감동적인 말을 하고 설득력 있는 소리를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Nothing.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모든 비밀과 지식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내가 다른 사람들을 아무리 설득할 수 있는 그런 합리적 지식을 갖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내가 순교를 한다 할지라도, 내가 수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해도 사랑의 동기가 아니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으로 한다면 이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마음속, 그 밑바탕에 숨겨진 동기, 아름다운 동기, 사랑의 동기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느니라, 아름다운 동기, 그래서 주님은 그녀의 낭비를 그런 무가치한 낭비로 일축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름다운 봉사였다. 헌신이었다. 이렇게 평가하신 것입니다.
랄프 마틴(Ralph P. Martin)이라는 성경학자는 오늘 본문의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음은 사건은 매우 중요하게 상징적이고 극적인 신학적인 행동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붓는 것은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에게만 하는 행위이었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인류의 메시아에게 드려질 행위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야말로 인류의 참된 왕이시고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랄프 마틴은 신약 시대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목 박히실 메시아로 믿은 첫 번째 사람이 아마도 이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동기도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날 위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이것이 헌신의 정신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회입니다.
기회를 붙잡을 줄 알았던 여인, 어떤 기회였을까요?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 앞에 내 헌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이렇게 이 여인은 확신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그 증거를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이 그렇게 인정하셨어요. 본문 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바하였느니라'
이 여자가 향유를 부은 것은 내가 죽을 것을 알고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과연 이 여인이 예수님의 죽으실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요한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여인이 옥합을 깨고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삿날을 준비한 것,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 앞에 마지막 가슴 가득 찬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했던 것,
그것은 성령의 인도였다.
다만 이 여인은 그 성령의 인도 앞에 민감했고, 순종했을 따름이다.
예수님이 늘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거듭 말씀하셨어요. "나는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 그러나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말을 심각하게 듣지 않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지금 이 여인은 그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마리아라고.. 흥미로운 사실은 마리아와 마르다를 비교해 보면 아주 대조적이지요. 자, 마리아와 마르다가 같이 있는 현장을 보면 마르다는 항상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항상 일하고 있어요. 뭔가 하고 있어요. 항상 분주하게 뭘 하고 있어요. 그런데 마리아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항상 앉아 있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마리아는 뭘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희망이었습니다. 구원이었습니다. 능력이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근거였기에.. 그 말씀 앞에 모든 것을 걸고 항상 주의 씀을 경청하고 있었던 여인, 그래서 그 말씀을 마음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을 따라서 아! 주님이 말씀을 했는데, 돌아가신다고 아마 그때가 가까운 모양이다.. 이런 성령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는 허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속에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어떤 준비를 주었을지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분이 떠나가시기 전에 내 사랑을, 내 사랑을 표현하겠다. 다시없을 기회, 어쩌면 오늘이 그분에게 드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사랑하는 여러분! 내 남편이 마지막 길을 가고 있다면, 내 아내가 마지막 길을 가고 있다면, 그가 원하는 사랑의 표현으로 그 사람 앞에 마음에 여한이 없이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낭비인가요? 그런 마음이었을 거예요.
저는 봉사는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헌신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봉사할 수 있을 때 봉사해야 하고 헌신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제가 몸이 아파서 교회를 나오지 못하게 된 집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다른 소원 없어요. 건강하게 교회 나가서 한 번 봉사만 하고 하나님께 갔으면 좋겠어요."
너무 안타까웠어요. 건강하실 때 좀 하시라고 그러면 바쁘다고, 나중에 좀 여유가 생기면.. 그런데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서 한 번만 다시 일어나 내가 가서 봉사할 수 있다면.. 안타깝지만 결국 그분은 그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 앞에 갔어요.
봉사의 기회, 헌신의 기회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 어느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했는데 잊히지 않는 말씀이 있어요.
우리가 전도하다 보면 차차 믿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신하라 그러면 차차 헌신하겠습니다.
봉사하라 그러면 차차 봉사하지요.
생활형편이 나아지면, 제가 차차 봉사도 하고 차차 헌신도 하겠습니다.
여러분! 지옥이라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차차 봉사하겠다. 차차 헌신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차차! 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고, 할 수 있을 때 헌신해야 합니다.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 봉사할 수 있는 기회, 사랑할 수 있는 기회, , 내 마음을 바칠 수 있는 기회, 그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이 이 여인의 헌신을.. 옥합을 깨뜨린 것을 칭찬하신 이유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주님이 가시는 마지막 기회, 잃어버려서는 안 될 그 아름다운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세 번째로, 이 여인의 헌신이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마리아는 내가 어떻게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런데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주님의 마지막 길을 준비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요. 그러다가 생각이 난 것이 뭔가 하면? 아! 옥합.. 내가 고이 장롱 속에 감추어 둔 옥합, 향유, 아마도 이 옥합은 그녀의 결혼준비를 위해서 그가 준비해 둔 옥합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옥합!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이 시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지.. 그리고 옥합을 깹니다. 옥합을 깨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어요. 옥합을 위의 뚜껑만 살짝 열 수도 있어요. 그렇게 여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부어도 예수님 가시는 길에 아름다운 자취를 남길 수 있는 좋은 헌신이었을 것입니다. 혹은 그 뚜껑을 열고 다 향유를 쏟아붓고 그 옥합을 다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종종 자기가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순간 그 현장, 그것이 마지막으로 영원한 기회가 되기 위하여 그 옥합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종종 옥합을 깨뜨립니다. 그러면 다시는 옥합으로 쓸 수가 없어요. 그분에게만 오직 그분에게만 드려지기 위하여 옥합을 깨버린 것입니다. 오직 이분에게! 그것은 전체를 드리는 거예요. 전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마리아의 헌신은 부분적인 헌신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전 존재를 드리는 헌신이었습니다. 8절입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저가 어떻게요? '힘을 다하여' 그것은 전체를 바치는 헌신이었습니다. '힘을 다하여' 부분이 아니에요. 물론 우리가 헌금을 드리지요. 주일날. 그러나 그것도 전체의 상징이어야 합니다. 십일조는 십 분의 일이 아닙니다. 십 분의 십의 상징으로서 십 분의 일을 드리는 거예요. 내가 전체를 다 드리는데, 그중의 십 분의 일을 드립니다. 상징! 내가 주일날 와서 예배합니다. 그것은 주일만 주님의 날이 아니에요. '주일'만 주님의 날이 아닙니다. 월화수목금토일 다 주님의 날이에요. 그러나 구체적으로 하루를 드림으로써 내가 이 전체의 시간의 주니이 주님인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헌신은 전체의 상징으로서 드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원하십니다. 당신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원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우리의 헌신은 바로 우리 자신을 드리는 아름다운 고백일 수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제사로 드릴 수 있는가? 그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전체를 부어 주셨다면.. 그렇습니다. 주님이 먼저 옥합을 깨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자신의 옥합을 깨고 자신의 생명을 버려 주시고 피 흘려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다면 이제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옥합을 깰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원하십니다. 당신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원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우리의 헌신은 바로 우리 자신을 드리는 아름다운 고백일 수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제사로 드릴 수 있는가? 그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전체를 부어 주셨다면.. 그렇습니다. 주님이 먼저 옥합을 깨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자신의 옥합을 깨고 자신의 생명을 버려 주시고 피 흘려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다면 이제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옥합을 깰 차례입니다.
자, 나를 위해서만 사용되는 이기적인 시간, 그 옥합을 깨고 내 시간을 구체적으로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나를 위해서만 사용되던 내 물질의 옥합을 깨고 내 시간을 구체적으로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나를 위해서만 사용되던 내 물질의 옥합을 깨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나 자신을 드리는 헌신, 그리고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움직여지던 내 육체, 내 몸, 내 body 바로 이 육체의 옥합을 깨고 내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 입술도 내 마음도 내 찬양도 주 앞에 드리는 삶!
오늘 여러분의 주 앞에 바칠 옥합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깨어야만 할, 깨뜨려야만 하는 여러분의 옥합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고난 주간 저녁 예배를 드리며 여러분의 동역을 구할 일이 있어요. 다음 세대의 교육을 준비하면서 5층 로비에 어린이 도서관, 이를 위한 헌금.. 원래 예산이 2천만 원이었는데 공사비가 오르면서 5백만 원이 초과.. 그리고 비품준비를 위하여 5백만 원 정도.. 천만 원 정도가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참 어려운 부탁이지만 제가 부탁할 데가 여러분 밖에 없어요. 여러분의 동역을 구합니다. 여러분의 헌신이 우리 교회의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9절을 보세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며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헌신은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됩니다. 또 다른 헌신을.. 절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힘, 강퍅한 마음을 녹이는 힘, 교만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 나태한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됩니다. 세상에는 헌신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힘도 많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조명받는 자리가 아니라 헌신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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