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명한 성경학자인 '아더 핑크' 목사는 성경에 나타난 애통의 사건들을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다.
- 자연적 애통 - 사업의 실패, 파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치명적인 사고, 질병, 자존심의 침해 등 세상사로부터 오는 애통을 자연적 애통이라고 했다. 예) 나인성 과부의 아들 장례(눅 7장)
- 철학적 애통 - 자신의 과오나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 곧 인간의 악한 성품을 깨닫고 후회하고 비통해하는 것을 철학적 애통이라 했다. 그 대표적 사례로서 가룟 유다의 후회가 여기에 속한다고 했다.
- 영적 애통 - 경건한 애통으로서 성령께서 주시는 경건한 슬픔을 말한다고 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8 복의 두 번째 말씀이 바로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절 I 복 있는 사람(2)
'아더 핑크' 목사가 구분한 자연적 애통이나 철학적 애통은 근본적으로 치료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아픔과 슬픔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애통을 원치 않는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 신앙과는 다른 변질된 모습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형통주의 신앙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삶의 생각과 태도를 고치려고 노력한다. "항상 긍정적이어야 해! 항상 밝고 명량해야 해! 항상 좋은 것만 생각해야 해! 행복해야 해!" 이런 자세는 실제로 유익이 된다. 자신의 삶을 조금씩 개선해 가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유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혈기 부리는 일이 하루에도 여러 번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가족들이나 우리의 친구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판단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는 것이 별거 아니구나!"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고 그냥 현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면 스스로 '삶의 예배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쳐오는 세상의 시련들로 인해 스스로 시험에 들게 되고 낙심하게 되며 종국에는 신앙의 길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이런 모습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 아니다. 애통을 건너뛰고 싶은 우리의 욕구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보통 세상사에서 당하는 "애통"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애통이 반복되는 인생살이에 희망의 빛을 보여주는 메시지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애통에도 복이 되는 애통이 있고, 사망을 이루는 애통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무엇에 대한 애통인가?
1. 애통 - 무엇에 대한 애통인가?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이다. 일반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허물과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일이 어렵다. 우리가 다윗을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전쟁의 영웅이었고 훌륭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왕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 시 다. 시편 51:1-3,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이다. 이와 같은 자를 주님께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다. 로마서 7:24에서 바울은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는 자신의 죄성에 대하여 괴로워하며 울부짖었다.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라고 불렀다. 그는 철저하게 회개하는 중심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탄식 섞인 부르짖음 뒤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죄악과의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관대한 경향이 있아. 악한 일, 불의한 일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면 쉽게 타협하고 수용하므로 신앙 양심을 저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면서 자주 사용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이런 식으로 용납하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둔감해지고 죄에 대하여 애통해하지 않는다.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예수 믿는 사람의 양심은 죄에 대하여 애통할 줄 아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등장하는 시구를 대부분 암송을 한다. '죽을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나의 애통함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인해 애통해하고 있는가?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한 애통, 자연적 애통, 철학적 애통이 아닌,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이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2.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는 이유
1)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단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 된다는 것을 일 뿐이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뜨이면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을 보게 된다.
곧 이 말의 의미는, 이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그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후 하나님의 눈, 곧 믿음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내 의식과 무의식의 깊은 곳까지 스며든 죄악의 뿌리까지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 숨어 있는 교만과 탐욕과 음란한 것들까지 속속들이 드러나게 된다. 그때 탄식 소리가 터져 나오고 심령에 애통이 느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괜히 예수 믿었다고 푸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 걸려서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서 사는 팔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복이다. 죄를 숨기며 의인 인체 사는 것이 비극이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는 자가 복된 자인 줄로 믿는다.
2)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갈망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악함을 깨닫게 될 때 자기 실망, 자기 학대로 낙심하고 자포자기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열망이 생기게 된다. 자신의 죄악 된 것을 보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그 심령 속에서 작업을 시작하신다. "내가 이제부터 너를 거룩하게 만들겠노라!" 고린도후서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 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984년,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암에 걸렸다. 그는 생애 마지막을 대학생들과 청년들을 위한 강연을 위해 대학을 순회하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을 삶의 목표로 갖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신자들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행복을 삶의 목표로 갖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구할 바가 못 됩니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행복을 구하지만 거룩은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거룩해지기 위한 출발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복락을 받기 전에 먼저 거룩해지기를 열망해야 한다. 주님 닮기를 열망해야 한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거룩케 하시기 위해 애통한 마음을 주심을 감사하면서 거룩한 삶을 위한 결단을 해야 한다.
3. 애통하는 자가 받을 복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위로(파라칼레오)', 곁으로 부르심, 참된 위로를 주실 분
1) 현재적 위로
마태복음 9장, 중풍병에 걸린 환자를 그의 친구 네 사람이 예수님께로 데려왔다. 지붕을 뜯고 예수님 앞에 침상을 내려놓았을 때 예수님께서 먼저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병의 원인이 그의 죄였기 때문이었다. 죄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초청하신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지는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이다. 사형수들이 사형대에 끌려가기 전까지는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실감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불려지고 간수가 양옆에서 그를 붙잡을 때 대부분의 죄수들은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고 한다. 죄의 짐이 얼마나 무섭고 무거운 것인가를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죄 용서로 인하여 느끼는 해방감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애통해했던 사람들은 죄의 짐을 벗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을 안다. 진실로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애통하는 심령마다 사죄의 은총을 허락하시며 위로하신다. 이것이 애통하는 자가 받는 첫 번째 복이자 현재적 위로이다.
< 찬송가 438장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미래적 위로
누가복음 16절에 절 알려진 이야기 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다. 25절에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러면 어떤 위로를 받는가? 요한계시록 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이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세상에서는 죄로 인하여 근심하며 애통해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그날 슬픔이 변하여 기쁨으로 애통이 변하여 찬송이 될 것이다. 천국의 위로가 지상에서 애통하는 자에게 가장 큰 보상이요 위로가 될 것이다. 세상은 돈과 쾌락으로 애통을 망각하고 인생을 즐기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성경은 애통하면 위로가 있고, 울어야 기쁨이 있다고 가르친다. 누가복음 6:21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요'
하이델 베르그 소요리 문답 제1문에 '삶과 죽음에 있어서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이뇨?' 삶과 죽음에 있어서 나의 육신과 영혼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그 고귀한 피로 나의 모든 죄악을 완전히 속하사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과 그리하여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질 수 없도록 나를 보전하며, 또 만사가 다 나의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시고, 그의 성령으로 나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시켜 주셔서 내가 충성된 마음으로 기꺼이 그를 위하여 살도록 하여 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참된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 위로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자에게 예비된 것이다. 그 위로만이 금생과 내생의 확실한 위로와 복이 된다.
결론적 메시지
오래전에 포항제철을 견학학 전이 있었다. 직사각형의 대형 창고형 공장 안에 고로가 설치되어 있고 중앙에 고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통로를 따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열기가 얼마나 강한지 양쪽 벽 상단에 설치되어 있는 통로까지 전달되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로에서 나온 쇳물이 각기 용도에 따라 가공되어 코일 모양의 제품으로 포장되어 큰 트럭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철판들이 자동차, 기차, 선탁, 건축 등 다양한 곳에 요긴한 재료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광산에서 실려 온 철광석들이 반드시 용광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용광로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좋은 크리스천이 되려고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다. 구원의 기쁨을 맛보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애통이다. 그 애통은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이다. 죄의식 없이 기쁨과 행복을 맛보려는 신앙은 오래가지 못한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라 할지라도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아직도 죄 성이 남아 우리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국의 저명한 강해 설교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한 가지 좋은 방법을 소개했다.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아름다운 족적을 남긴 성자들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왜 화를 잘 내는가? 나는 왜 불친절한가? 나는 왜 악한 생각을 버리지 못할까?'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고통스럽고 힘이 들 때,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고 어려울 때, 가족들로부터 친구로부터 위로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위로는 일시적이고 한계가 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위로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는 누구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신다. 히브리서 4:15-16, ''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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