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승중 목사, 애통하는 공동체(마태복음 5:4).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따르는 성경적 진리는 역설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팔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역설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팔복의 두 번째 내용 인 오늘 본문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5(표준새번역),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애통하는 공동체 I 마태복음 5장 4절
- 주승중 목사 -
왜 예수님께서는 부한 자가 아니가 가난 한 자가 복이 있고 기뻐하는 자가 아니라 슬퍼하는 자가 해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21절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눅 6:21(표준새번역)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그리고 25절에서는 반대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6:25하(표준새번역),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예수님은 웃는 자가 아니라 우는 자가 복이 있고, 기뻐하는 자가 아니라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분명 역설적입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궤변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상의 관점으로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돈과 쾌락 등으로 슬픔을 잊고 어떻게든 인생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모험을 추구하고 재미와 오락을 찾는데 돈과 시간과 정열을 쏟으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슬픔과 고통은 뒤로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퍼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고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웃음소리를 꾸짖고 계십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자들에게 복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선언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로를 깊은 슬픔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그다음에 있는 희락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을 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애통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애통'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는 슬픔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슬픔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을 때 숨이 막히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주로 죽은 자들을 애도할 때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표현할 때 사용됐습니다(창세기 37:4). 또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됐습니다(마가복음 16:10).
그러므로 이 말은 슬프되 아주 깊은 슬픔, 처절한 슬픔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셔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애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실 때에는 육체적, 정서적으로 느끼는 고통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팔 복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전하고자 했던 보다 근본적인 것은 바로 영적인 애통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토하는 영혼의 거룩한 탄식으로서의 애통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팔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제는 자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 자원도 없는 영적인 파산자, 영적인 거지임을 인식하는 자가 바로 가난한 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한 자임을 진정으로 깨달은 자는 자연스럽게 애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선을 행하고 싶어도 행할 능력이 없고 행할 때마다 죄를 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원치 않는 죄에 계속해서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며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정말 처절하게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밧세바와 음란한 죄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몬 후에 다윗은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죄악 된 자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의 죄 중에 잉태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추악한 범죄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편 51:3).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악을 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하고 애통해했습니다. 영적으로 파산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약의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족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적인 향락에 빠져 죄를 죄인 줄 모르고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한 채 흑암과 혼돈 가운데 있는 동족들을 바라볼 때 그는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그는 교회를 향해서도 항상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가 에베소에서 3년간 목회할 때 그의 목회는 눈물의 목회였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그는 눈물의 편지를 썼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하는 원수들이 있는 빌립보교회를 생각하며 매일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조상들은 이웃과 교회와 민족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서 애통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울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세상 죄를 다 짊어진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는 애통하던 예수님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애통하시고 마침애 누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죄와 죽음에 얽매여 살고 있고, 사탄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고,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얽매여 살고 있는 우리를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애통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친히 나무에 달리셔서 그 몸으로 우리의 죄악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감람산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도 영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을 죄악의 토성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로 인해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43-44,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주후 70년에 있었던 로마 타투스 장군의 예루살렘의 포위와 함락은 정말로 처참했습니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성안에 있던 사람은 오랜 포위로 인하여 굶주린 끝에 아이들을 잡아먹었습니다. 마침내 성에 입성한 로마의 군인들은 아이들을 잡아 빙빙 돌리다가 그 머리를 벽에 던져서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임신한 여인을 발가벗긴 뒤에 칼로 배를 그어 죽였습니다. 성전은 불타고 모든 성곽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처참한 광경을 미리 보시고 통곡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과 교회의 부조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이 땅의 부조리와 이 민족의 고통과 절망, 그리고 교회의 아픔을 바라보시며 통곡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소망교회를 보시며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파하는 성도들을 보시고 주님은 이 시간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십자가의 복음보다 성공과 번영이라는 바벨탑에 갇힌 사이비 복음을 전하는 한국교회를 보시며 애통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거룩함과 구별됨을 상실해서 소금과 빛에 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온갖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성도들로 인하여 애통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로 백만 이상의 가축을 잃어버린 채 눈물짓고 탄식하고 있는 이 땅의 농민들을 보시고 애통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작은 땅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자와 못 배운자, 우파와 좌파, 남과 북, 지역과 계층으로 나뉘어 첨예한 갈등으로 대립하고 있는 이 민족을 보시고 애통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만의 이권과 권력을 위해 이전투고하고 있는 정치인들과 부패해서 뚜껑을 열기만 하면 썩은 냄새가 나는 위정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애통해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울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진실로 지금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교회와이 땅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마지막 시대에 전 세계를 향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2000년 기독교선교 역사 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 세기 만에 국민의 1/4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경제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5000년 간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던 이 민족이 경제 규모가 세계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물질적으로 충족하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 물질을 도구 삼아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반 세기 동안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물적으로 충족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제사장 민족으로 땅끝까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 사명을 잃어버린 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부와 명예와 권력을 오히려 목표로 삼고 그것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이 민족의 등불로 세워진 교회가 이렇게 사명을 잃어버린 채 사람들에게 돌을 맞고 비틀거리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실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울어야 할 때입니다. 아직 애통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애통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애통해해야 합니다. 울고 싶어도 울어지지 않습니까? 모든 것에 대해서 냉소적이고 비판적으로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그 모습에 대해서 애통해하십시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에 대해 고발하거나 정죄하는 모든 것을 멈춰야 합니다. 모든 비난을 멈춰야 합니다. 오히려 나를 위하여, 너로 인하여, 우리로 인하여 애통해야 하며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주님의 심장을 달라고 기도 해야 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에서 조차 애통해하며 눈물 흘리셨던 주님의 마음을 저에게도 주옵소서." 애통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오직 애통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영혼이 자신의 지를 직시하고 그 죄에 대면하여 참으로 아파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위로라는 말은 성령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성령님의 위로가 함께하는 그곳에 용서와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소망교회 성도들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내 자신의 죄악을 인하여 애통하라. 내 이웃의 범죄로 인하여 애통하라. 교회의 허물로 인하여 애통하라. 이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애통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다. 반드시 내가 너희의 애통이 헛되지 않게 할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나를 위하여 수고한 그 수고를 내가 알고 내가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흘린 눈물을 내가 아노라. 이제 내가 너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고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픔을 잊지 않게 할 것이다. 이제는 내가 너를 어루만질 것이다. 치유할 것이다. 너를 회복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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