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웃는 모습이 아름답고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웃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유머도 참 중요하고, 그런 유머감각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아주 높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웃으면 복이 와요가 아니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절 I 애통하는 공동체
- 진재혁 목사 -
애통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울고 싶은 사람, 눈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애통하는 자에게 어떤 복이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은 유명한 팔복의 말씀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본문을 향해서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봅니다. 첫째, 애통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두 번째, 무엇을 애통해야 합니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애통하는 공동체가 어떻게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의 답을 나누면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첫째, 애통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본문 속의 '애통'이라는 원어를 보면 그냥 일반적인 슬픔이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가 9가지가 있는데, 가장 강력하고 찐한 슬픔을 이야기할 때 오늘 본문에 쓰여진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원어적 표현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했을 때 그 슬픔을 참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리며 통곡하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통곡하며 우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가장 강한 슬픔입니다. 진한 슬픔의 깊은 애통을 오늘 성경은 이 단어로 사용한 것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야곱에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을 팔았던 형제들이 요셉이 죽었다고 아버지에게 전합니다. 죽은 줄로만 아들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죽음을 생각하며 엉엉 울며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역을 하다 보면 장례식장에 가게 될 일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분들을 먼저 보내고, 꺼이꺼이 통곡해하며 슬픔을 애통하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렇게 가장 강한 슬픔입니다. 진한 애통의 모습, 바로 그것이 애통하는 자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애통은 일반적인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눈물이 많은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감정이 참 풍부해서 조그마한 일에도 눈물이 흐르는 분들도 있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무리 힘든 일을 당해도 꿋꿋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애통하는 자는 얼마나 잘 우느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심령, 영적인 상태가 가난함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집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제자들을 주님이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것은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상태가 애통의 상태에 있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모습이, 그들의 영성 가운데 애통함에 흐느끼고 통곡하고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영적인 탄식, 오늘 성경은 그것을 애통하는 자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2. 무엇을 애통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두 번째 질문을 던져봅니다. 무엇을 애통해야 할까요? 그런 강력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적으로 깊은 탄식을 가진다면, 그 탄식의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은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우리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죄로 인한 우리의 아픔에 대하여 애통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자신에 깔려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성입니다. 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가지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깨닫습니다. 깨닫는 순간에 우리는 깊은 탄식에 빠집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나의 연약한 모습이 나의 죄인 된 모습이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나의 욕심과 자아를 놓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슴을 치며 애통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바로 그 영적인 상태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통회하는 심령입니다. 아니, 상한 심령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복하며 회개 가운데 나아가는 눈물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경험을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법을 지키고 그 법대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법을 지키고, 그 법대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은 그런데 실제 삶 가운데 자신이 정말 원하는 그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 정반대의 일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면서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라며, 육신의 연약함과 우리의 마음의 문제를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애통합니다. 그는 탄식합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삶인데 삶 가운데 나타나는 나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구나!' 흐느끼며 이렇게 탄식하며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애통함을 말합니다. 나의 문제를 가지고, 나의 연약함을 가지고, 나의 죄성을 가지고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어떻게 할 줄 모르는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흐느끼는 것. 바로 영적인 애통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가 말씀을 증거 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받았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순간에 마치 날카로운 비수가 꽂힘과 같이 성경은 그들이 찔림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들은 이야기 합니다.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그것은 단순한 한탄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깊은 탄식이 있습니다. 깊은 애통이 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받았다. 하나님 저희가 어찌하면 좋습니까?"라고 안타깝게 울부짖는 애통함의 모습을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하고 사악하고 아니 그렇게 남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런 모습이 내 안에 있을까? 그리고 여전히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의 부족한 모습들을 바라보며 애통합니다. 안타까워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웁니다. 하나님이 이것이 나의 참모습입니다라고 안타깝게 통곡하는 것. 바로 영적인 애통함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우리 자신들을 볼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엎드린다면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슴을 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통회하는 심령이 될 수밖에 없는 모습.. 바로 애통하는 자의 모습이라과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우리가 애통해야 할 것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주님의 아픔에 대하여 애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애통함은 나의 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 죄 때문에 완전하지 못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하는 심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통회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런 눈을 가지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나의 모습처럼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죄악과 악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여호와의 정의로움을 생각하면서 가슴에 아픔에 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죄를 바라보며, 여전히 하나님이시면서도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받지 못하시는 주님이 느끼시는 주님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주님 앞에서 깨어지며, 사람 앞에서 서야 할 그 영혼들에 대해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이 되며 이 땅에 만연해 있는 죄악을 보며 황폐한 이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주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통치가 이 땅에 임할 그날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하며 고통 가운데 통회하는 애통. 바로 성경은 주님의 아픔 때문에 생기는 통회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족을 치유하기 위해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민족이 어디가 아픈가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민족이 어디가 치유되어야 하는가?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애통하지 않으면서 진정한 민족의 치유에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세상의 변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온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애통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변화를 향해서 우리를 온전히 드릴 수가 있을까요? 사랑하는 민족을 생각하며, 우리의 민족에 아픈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내 마음에 우리 삶 가운데 우리 공동체 가운데 길은 아픔으로 주님의 눈물로.. 주님의 앞으로 다가오고 그것을 끌어안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이 민족의 치유와 변화를 위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픔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같이 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질 수 없기에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가지고 애통하는가? 내가 좀 모자란 것을 향해서 애통하십니까?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자들 때문에 더 애통하십니까? 아니면, 정말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주님의 아픔이 우리들의 아픔 되어 눈물로 주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되는 애통함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복음의 빛이 없는 북녘땅을 바라봅니다. 인간처럼 살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서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아픔이 우리의 아픔으로 함께 오지 않는다면.. 함께 애통하는 마음이 없이 어찌 이 땅의 치유와 회복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시대 가운데 나타나는 많은 뉴스와 이슈들을 접하면서 하나의 정보로 넘기십니까? 아니면 그것이 우리를 아프게 하고 그것을 향해 느끼는 주님의 아픔이 함께 와닿는 애통함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다음세대를 바라보며, 요즘 한 반에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캠퍼스의 복음화가 불과 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셉의 때를 몰랐던 다음 세대가 일어났을 때 한국교회에 주셨던 은혜와 부흥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다음 세대가 여전히 한국교회를 향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나라로써 민족으로써 성장하고 은혜의 자리 앞에 설 수 있을까? 우리의 자녀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무엇을 느끼고 계십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들을 접하기도 합니다. 주께서 그 가정을 세우시지 아니하신다면.. 지켜낼 수 없고,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바라보며 가정을 향해 애통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민족을 향해 세상을 향해 같은 마음으로 애통함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한 눈물을 흘릴 수 없기에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향하 주님의 아픔 때문에 애통하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공동체는 살아 있지 못합니다. 애통함을 함께 느끼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정말 이 땅을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샘이 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고 그것 때문에 고통과 아픔을 함께 느끼며 애통함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애통함 가운데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애통함 가운데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애통함 가운데 기도가 있습니다. 그 애통함 가운데 희생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마음, 주님의 눈물, 주님의 아픔,
그것이 우리의 애통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
3. 애통하는 공동체가 어떤 축복을 받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세 번째 질문을 던져 봅니다. 애통하는 공동체가 그렇다면 어떤 축복을 받는가? 두 가지 애통을 향해서 두 가지 축복이 선포됩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위로함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위로가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 위로를 누가 줍니까?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는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애통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 자신의 문제와 내 죄성의 문제라면..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의 문제라면.. 그것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위로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죄의 선포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애통함 가운데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십니다.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치유해 주십니다. 사랑한다고 해주십니다. 우리를 사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 그래서 요한복음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사죄의 확신보다 더 큰 위로가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에게는 없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회개의 애통함이 있을 때, 하나님은 사죄의 기쁨으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이 애통함에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고 용서와 사죄의 확신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의 축복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가지고 애통하는 순간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위로하십니다. 내 죄를 가지고 애통할 수 있는 그 자체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깨끗하게 하시고, 치유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세상을 향해 주님의 아픔을 향해 애통하는 자에게는 어떤 위로를 주시는가? 주님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되고, 주님의 애통하는 마음으로 애통하는 자들에게는 그 애통함이 사명의 선언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 애통함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 때문에 아파합니다. 주님의 고통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주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시선이 머뭅니다. 주께서 움직이시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움직입니다. 바로 애통하는 마음을 품는 순간에 우리가 그렇게 애통하는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 됩니다. 애통하는 그 장소가 우리의 사역지가 됩니다. 그 애통하는 그 일이 우리의 사명이 됩니다.
애통함에는 사랑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아파하며, 위로해 주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합니다. 애통함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애통함에는 생명을 다하는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애통함에 진정으로 함께 애통할 수 없기에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는 자와 같이 울라. 애통하는 자만이 애통하는 자를 진정으로 도울 수 있기에.. 오늘 주님의 눈물, 주님의 고통, 주님의 애통함, 같은 마음으로 애통하는 섬김과 사랑.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주님의 눈물과 함께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주신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루어주십니다. 그 일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 애통함은 사명이 되고, 그 사명을 통해 우리는 우리 가우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사야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이 생깁니다. 재 대신에 기쁨이, 슬픔대신에 찬송의 옷이 생긴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애통이 여기시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애통하심의 위로 여러분과 저희의 삶 가운데 어떤 애통하심이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애통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눈물이 말랐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차갑습니까? 우리의 무릎이 굳었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하나님 내 눈에 주님의 그 눈물이 흐르게 하시고, 주의 시선에 머무는 그곳에 주의 마음이 움직이는 그곳에 우리가 동일한 고통과 아픔으로 함께 애통해 할 수 있는 그것이 사명이 되어 쓰임 받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체험하는 축복..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오늘 이 같은 위로가 우리의 애통함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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