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I 에스라 3장 1-7절 I 두려움을 떨치고 다시 일어서라! I 에스라 설교 I 에스라 3장 설교
에스라 3장 1-7절 I 두려움을 떨치고 다시 일어서라!
죽은 물고기는 흐르는 물과 함께 떠 내려갑니다. 사실 죽어서 떠 내려가는 물고기에게는 아무런 고통이 없습니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살아 있는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분명히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살아 있다는 자기 증거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우리가 세속화에 순응하며 그냥 떠 내려가면 갈등이나 고통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면 보다 쉽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의 삶이라고 해야 할 것 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죄악 된 세상과 육체의 욕망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 길은 눈물 없이 못 가는 길입니다. 피 없이 못 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잃어버린 바른 신앙의 길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세상과 육체의 욕망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몸부림치는 아픔과 상처 속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참된 신앙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의 신앙의 절정은 모리아 산에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바쳐야 하는 아픔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의 순간에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으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 위에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스스로 결단하셔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가 없는 편안한 길을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고통과 아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사람들은 용기 있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그 용기를 탐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더 강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혀 쓰임 받은 사람들은 원래 용기가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그 속에 하나님의 사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때문에 우리를 쓰신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병기로 바치는 결단을 해야 하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사명입니다. 그들에게는 사명이 있기에 모든 두려움과 연약함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과 불안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의 사명을 붙들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사명은 믿음의 행동을 일으키게 합니다. 믿음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복된 결과를 낳습니다.
17세기의 영국이 세속화되고 도덕적으로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고 그것을 삶에 실천하려고 했던 일련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그들을 가리켜 청교도들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엄격한 도덕과 철저한 주일성수를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영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신앙을 잘 믿기 위해 개척자의 꿈을 안고 신대륙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들은 신대륙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땅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그들의 가슴에는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소비는 위축되면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경제는 생동감을 잃어버린 채 기업들은 신규 투자를 두려워하고, 사회는 각종범죄들이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자신들의 모든 꿈을 접어야만 하는 결정적인 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그들 가운데 국가의 새로운 리더로 선출된 지도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설을 남깁니다. 그 연설의 내용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1932년 3월 4일, 미국의 32대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연설이었습니다. 그때 미국사회는 소위 경제 대공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그 자신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적들로부터 암살의 위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는 위기의 미국을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이끌면서 미국 역사에서 4번이나 대통령이 되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런 리더십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로 그들의 옛 고향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살 곳을 찾아 흩어 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을 적대시하는 모든 이방의 족속들, 이미 그들의 옛 고향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던 그 땅의 새로운 원주민들에 의해서 위협과 경계를 받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만에 해방이 되어 새로운 꿈을 안고 옛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그 땅을 에워싸고 있었던 적대적인 세력들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실을 그들의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짓누르고 있는 커다란 두려움으로 인해 그 땅에 돌아올 때 품고 있었던 모든 꿈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위기 앞에 직면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 위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웃들이 어떻게 나올지 두려워했다' 그렇습니다. 7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이방인들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오늘 한반도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적지 않은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 가장 큰 두려움은 북한의 핵 개발로 인한 전쟁에 대한 두려움 일 것입니다. 사실 전쟁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다 빼앗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두려움은 경제에 관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까스로 산업화의 시대를 지나가면서 우리가 성취했던 경제적인 모든 성취가 한꺼번에 몰락해 버릴 수도 있다는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다. 누리 나라의 산업 구조는 고임금 저효율이라는 블랙홀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구조라면 어느 기업도 망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금년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도 급기야는 마이너스 성장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우리가 성취한 모든 리더십의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보면서 어쩌면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헤쳐 왔던 삶의 지점이 겨우 여기까지인가,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모든 꿈을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오늘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런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당당하게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오늘 우리의 시대에 다시 회복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우리를 더 두렵게 하는 것은 이 두려움에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나 혼자서 이 짐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더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 주변에는 동일한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네트워킹이 되지 못하고 저 마다 홀로 이 두려움의 벽 앞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70년 만에 옛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모두 자신들의 살 곳을 찾아 흩어 졌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꿈과 희망이 아니라 그곳에 먼저 정착해 살고 있던 주변 이방인들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은 상태에서 어느 날 놀라우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그들이 함께 모임으로써 공동체를 부활시킵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여기에서 중요한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일제히', '모인지라' 고국으로 돌아온 저들은 각자 흩어져 자신들의 고향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고향에 돌아온 지 7개월 만에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꿈을 안고 옛 고향에 돌아와 꿈을 펼치기도 전에 그 꿈이 고사 될 수 있는 위협 앞에서 혼자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일제히 모였다고 기록된 '일제히'라는 단어는 본래 원문에 보면 '한 사람처럼'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처럼 모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그 시대의 절망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호소했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도 동일한 것이니다. 그것은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움을 볼 수록 서로 격려하면서 더욱 모이기를 힘써라. 그런데 초대교회보다 훨씬 더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 앞에 서 있는 두려움의 벽을 넘어서기 위해 다 함께 모이기를 힘쓰고 있을까요?
누가복음 제일 마지막 장에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나가서 무슨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자 49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머물라, 그리고 기도하라.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채움을 받으라. 그리고 나가서 무엇인가를 시도하라. 이러한 가르침 앞에 당시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사도행전 1:14-15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라이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그들은 일단 모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기도에 힘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입니다. 그들은 갑자기 한 순간 성령의 능력을 입고 벌떡 일어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초대교회 사도행전의 역사를 계속해서 따라 가보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에서, 그리고 집에서 모였더라. 그들은 성전에서만 모인 것이 아니라 집에서도 모였습니다.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주일에는 성전에 모이고, 주일을 피한 주중의 어떤 날에는 그들이 집 집 마다 모여서 그곳에서 함께 기도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셀 가족의 모임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일에 한 번 전체가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지만 그 예배만으로는 부족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다른 곳으로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공동체의 형제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집에서도 함께 모여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염려를 털어내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 입니다.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믿음의 공동체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이 아닌 다른 어떤 날에 함께 목장으로 모이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 인 것입니다.
그냥 주일날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진솔하게 자신의 마음을 열고 기도 제목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는 그곳에서 하늘의 기적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위대한 시대를 열어 가는 것 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담대한 복음의 증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들을 두렵게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공동체로 모이십시오. 공동체에 속하십시오. 주일이 아닌 주중에도 내 마음의 두려움을 열 수 있는 셀 가족들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문제를 함께 끌어 안고 내 일처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자 성읍에 자리를 잡고 살아갈 때 주변의 환경들로 인해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때 그들은 혼자서 그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나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올 때 중요한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어깨를 가지런히 하고 무릎을 꿇어 보십시오. 그러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는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의 회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자 흩어졌던 그곳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함께 예루살렘에 모인 후에 그다음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2절과 3절입니다. '2 요시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 새 3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그들은 제단을 만들고 제단에 번제를 태워 제사를 드릴 준비를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때 소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허물어졌고, 아직도 건축되지 않았습니다. 본문 6절이 이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허물어진 그대로였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건물로서의 성전은 없어도 제단을 쌓는 일은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일은 가능했습니다. 성전이라는 것은 일종의 예배의 환경입니다. 좋은 건물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기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드웨어에 불과한 것 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 그 자체는 건물이 없어도 가능한 것 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핍박과 환난으로 교회의 건물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들의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의 호나경은 최악이었을 것 입니다. 그렇지만 예배 그 자체는 부흥회였을 것 입니다. 평소에 예배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건물이 없으면 신앙이 끝나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예배는 계속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한참 대화가 진행되고 있다가 갑자기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시비를 겁니다. 우리 조상들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사마리아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는데, 왜 당신이 속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해야만 합당하다고 주장하십니까? 그러니까 사마리아냐, 예루살렘이냐 하는 예배의 장소가 어디냐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유명한 대답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유진 피터슨은 그의 메시지 성경에서 이 부분을 현대적인 언어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순전한 존재 그 자체 곧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영과 자신의 참된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유형적인 성전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질은 예배자의 마음, 예배자의 태도라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내 육체만이 아니라 내 영으로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어디서든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예배의 본질입니다. 이런 참된 예배가 성전 안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가정과 일터에서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참된 예배를 배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전에서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 드려지는 그 예배를 통해서도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이 성전 안에서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 성전 밖에도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 성전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성전 밖의 모든 곳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참되고 진정한 예배가 내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면 인생의 모든 두려움은 다 떠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어디에서나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은헤를 경험하게 될 것 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나에게 다가오거든 사랑하는 여러분, 그 두려움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손 잡고 예배를 드리십시오.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예배가 회복되는 그 순간 모든 두려움은 정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녹여 버릴 것 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두려움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을 흔들지만 믿음의 사람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로하는 가운데 예배를 통하여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가 있겠습니까?
세 번째는, 감사의 회복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라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움에서 극복하기 위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예루살렘에 한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태워 하나님께 올려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서 무너졌던 예배가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이 한 일은 초막적을 지켰다과 했습니다. 4절이비다.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여기에서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의 생활을 할 때 그들은 장막, 혹은 초막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느 일정한 장소에 가면 장막을 치고 거기에서 하룻밤 혹은 며칠을 유숙하다가 다시 장막을 걷고 이동을 합니다. 이러한 고생 중에서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성실하게 인도하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가 바로 장막적, 혹은 초막절이라고 부르는 것 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10월에는 장막적을 지키는데 심지어 호텔 옆에도 장막을 쳐서 지킨다고 합니다. 집 집마다 옆에 천막을 만들어서 한 주간 동안 천막에서 생활하면서 거기에서 찬양하고, 이웃 사람들을 만나고 축제를 벌이고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것은 광야 생활에서도 성실하게 인도하신 하나님.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첫 번째 농사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절기가 바로 장막절, 초막절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초막절 정신의 핵심은 감사입니다.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지나간 내 삶의 힘들었던 여정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해 주셨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희망이 회복되는 절기가 바로 초막절입니다. 이 감사가 회복되는 순간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떨치고 새롭게 일어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적 시각에서 볼 때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용기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감사인 것입니다.우리가 정말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며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감사할 수가 있을까요?힘들지만, 아프지만 아직까지 나에게는 감사할 조건이 많이 있습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셨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가 있다면 내일을 향해서 우리는 감사하며 이 절망과 좌절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수가 있을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는 모든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우리들의 새로운 인생의 미래를 여는 중요한 사건인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노벨이라는 사람이 쓴 '조금'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설탕을 조금 써도 음식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비누를 조금 써도 몸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햇볕이 조금 비춰도 새싹이 힘차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연필이 조금 남아도 아름다운 글 한 편을 쓸 수 있습니다.
양초가 조금 남아도 주위에 환한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작고 별 것 아닌 것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제이 데니스'라는 사람이 쓴 글 가운데 이런 감동의 글도 있습니다.
당신이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에게 안정된 직장과 사업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몸무게가 늘어 옷이 맞지 않는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먹을 것이 넉넉한 인생을 살아오신 것입니다.
세탁할 옷이 집안 한 구석에 쌓여 있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적어도 갈아입을 옷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집에 대청소가 필요하고, 문고리를 갈아야 하고, 창문의 틀을 갈아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몸을 의탁할 수 있는 집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멀리라도 마침내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면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지 잠시라도 걸어가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불평할 대통령이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뒷자리에 앉아 있는 교우의 찬송 음정이 엉망으로 들려오고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청각은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리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일어나 일해야 할 하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해가 저물어 온몸이 나른하고 피곤하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오늘 하루를 생산적으로 살아오신 것입니다.
옛날 수도가 없었던 시절에는 마당에 심겨진 펌프로 물을 퍼 올렸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펌프질을 하면 물이 다 빠져서 아무리 펌프질을 해도 물이 올라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먼저 한밤 중에 남겨두었던 한 바가지의 물을 펌프에다 넣고 펌프질을 하면 물이 펑펑 쏟아집니다. 이때 남겨두었던 한 바가지의 물을 우리는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두려움 속에서 우리가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마중물이 바로 감사합니다. 내 입 속에서 감사의 말 한마디를 넣는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감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삶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현장에서 수시로 밀려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치는 해독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만 있으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있습니다.감사 만 있으면 이길 수 없는 것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감사만 있으면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다시 당당하게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모든 삶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불안과 두려움이 내 삶을 엄습해 온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인생을 버려두지 말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어떤 두려움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들과 가지런히 함께 모여 무릎을 꿇어 보십시오. 그리고 예배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내 인생 속에 주어졌던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감사를 드려 보십시오. 그때 혹은 내 안에 이런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난 가운데서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을 잡아 주리라."
여기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그분은 누구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그들의 모든 꿈을 빼앗기고 과도한 세금 수탈에 시달리며 미래를 잃어버리고 있었을 때 그 땅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게 될 것이라." 번역하면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
두려움 속에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순간.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꿈과 비전을 다시 붙잡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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