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I 사도행전 10장 24~33절 I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니다 I 김인환 목사
사도행전 10장 24~33절 I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니다
- 김인환 목사-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 오늘도 나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많이 한 후 성경을 펼쳤습니다. 마태복음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럴 리 없다고 생각한 이 사람은 다시 한번 기도하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누가복음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 쓰여 있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삼 세 번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요한복음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 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내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싶어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같은 사람들이나 무슨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음성 듣고 그 말씀 따라 사는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고넬료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당시 상종하지 않았던 이방인 고넬료의 요청에 그를 만나러 50km나 되는 거리를 찾아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는 순간, 역시 하나님은 사도들같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음성을 들려주시는구나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오해입니다. 이방인이었던 고넬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가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가이사랴에서 욥바라는 그 먼 거리까지 자신의 종과 부하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음성은 무슨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에게만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도 들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한국 예수 전도단을 설립한 데이빗 앤 앨런로스(David and Ellen Rose) 부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은사가 아니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24절입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베드로가 욥바를 출발해 드디어 고넬료가 있는 가이사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갑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는 50km의 거리입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고넬료는 그의 친척과 친구들을 먼저 불러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요? 꼬박 만 하루를 기다린 것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계산해 봅시다. 고넬료가 기도하다가 욥바의 무두장이 집에 있는 시몬 베드로를 청하라는 말씀을 들은 시각은 9시,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였습니다.
그리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서 베드로를 만난 것이 이튿날 낮 12시경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베드로를 만나 가이사랴고 바로 돌아왔다면 사흘째 되는 오전쯤에 도착할 수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고넬료는 그 시간을 대충 계산하고 그때부터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보냈던 일행이 언제 도착했습니까? 30절을 보시면 나흘 전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이에요? 만 하루를 기다린 것입니다.
겨우 하루냐고요?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수많은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니 끼니와 잠자리를 제공했을 거 아닙니까? 얼마나 번거로웠을까요? 그런데 고넬료는 친척과 친구들을 다 불러 놓고 그들의 끼니를 챙기며 잠자리를 봐주면서까지 수고로움을 감당하면서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번거로운 일이었겠지만 고넬료는 번거롭게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했거든요. 베드로라는 영적 지도자로부터 전해질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고 있었기에 번거롭게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모하는 일을 할 때 번거롭다고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사모하는 일을 할 때 보면 사람들은 신나서 그 일을 감당합니다. 즐겁게 그 일을 해요. 그렇습니다. 고넬료는 번거롭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와 흥분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줄 사람이 온다.' 그것이 얼마나 사모가 되었는지 본문에서 사용되니 '기다리라'는 단어를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이 본문에서 '기다리라'는 단어에 사용된 말은 '프로스도카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기다림을 나타낼 때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처럼 간절히 기다릴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만큼 고넬료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북경 코스타롤 인도할 때였습니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집회 장소를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짧게는 3시간 길게는 10시간 이상 기차를 타고 온 거예요. 정말 피곤했을 텐데 아이들의 표정에는 피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그 아이들에게는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인생 살고 싶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개역한글)
하나님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들려지기를 축복합니다. 그 음성이 들려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깨달아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이런 분을 꼭 만납니다. "목사님 저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한번 듣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성경을 읽고 묵상해 보세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면, "에이, 그런 것 말고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문희곤 목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데 성경말씀처럼 유익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면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오해합니다.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인환아~"라고 우리를 부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렇게 나타나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난주 살펴본 본문에서도 베드로와 고넬료가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여전히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요? 본문이 있는 10장 19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었던 고넬료 부하 일행을 불러들여 하루를 유숙하게 하고 그들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베드로가 깨닫습니다. 사도행전 10:34-35을 보세요.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께서 왜 환상을 보여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셨는지 드디어 깨달은 것입니다. 본문 28-29절을 보세요.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보여준 환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마음속에서 들리는 성령의 음성을 따라 그 인도하시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겼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당사자인 고넬료를 만나 물은 거입니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재철 목사님은 그의 책 '사도행전 속으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행동은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한 깨달음을 던져 줍니다. 언제 어디에서든, 왜 하필이면 자신이 그 시간에 그리스도인으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묻는 사람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환상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늘이 진동하며 저에게 천사가 나타나 "인환아~"라고 부르신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담긴 완벽한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세요. 베드로와 고넬료는 자신이 본 환상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묻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담긴 성경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충분히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이제 환상을 보지 않아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환상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천사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기록된 성경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한다면 성경을 읽고 깨달으십시오. 성경을 읽을 때 그 음성이 들려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여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분명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지도, 사모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시면서 성경 일독은 해보셨는지요? 아침에 일어나 큐티는 하시는지요? 그런 적이 없다면 그런 것이 귀찮게 느껴지신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없이도 하루를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는 교만이지요. 베드로와 고넬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을 보세요.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들어오자 고넬료가 어떻게 했다고요? '엎드리어 절을 했다' 악수를 하거나, 목례를 한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제곡의 백부장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속국인 이스라엘 사람, 그것도 어부에게 절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절을 한 것이 아니라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사용된 단어를 보면 더 놀랍습니다.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노예가 땅에 엎드리어 주인의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당시 이 단어는 하나님을 경배할 때 사용되던 동사였습니다. 고넬료의 겸손이 느껴지십니까? 왜 고넬료가 이렇게 했을까요? 베드로를 하나님으로 섬긴 것일까요? 아니요. 그에게는 베드로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해 오는 종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사람이기에 그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본문 32절을 보세요.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고넬료는 알았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심을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자리는 바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순종의 자세를 갖고 있습니까?
그런데 또 한 번 놀라는 것은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26절입니다.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나도 사람이라' 베드로는 자신을 높이는 고넬료의 태도에 취해 거들먹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한 번에 3천 명을 회개시킨 사람입니다. 그의 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아니 그의 기도로 '다비다'라는 여인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임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만 그랬습니까? 사도행전 14:14-15상,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바나바와 바울도 그랬습니다. '루스드라'라는 곳에서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고치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를 신으로 떠받들려 하자 자신의 옷을 찢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바나바의 위대함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평생 동안 주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신분, 자신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국 청도에 갔을 때입니다. 코스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제가 10년 만에 중국에 다시 왔다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저 때 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모였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1년에 한 번은 어렵더라도 3년에 한 번만 오시면 안 되겠냐는 거예요. 제 기분이 너무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제 고개가 뻣뻣해지는 거예요. 불쌍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좀 추켜 올려주었다고 금방 교만해지는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 고넬료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는 엎드렸습니다. 아니 베드로는 자신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고넬료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설교로 인해서 한 번에 3천 명이 회개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손을 잡고 일어선 앉은뱅이 이야기도 그의 말 한마디에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 이야기도 아니 그이 기도로 살아난 여인, 다비다의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얼마나 초라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교만해진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교만은 패방의 선봉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서조차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아니 성경 한 번 거들떠보지 않고 하루를 살아갑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배 10분 전 나와 마음에 준비하는 것조차 번거로울 뿐입니다.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 없다고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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