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 I 이사야 7장 10-16절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임마누엘
복된 성탄절입니다. 옆의 분들과 인사하실까요?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절 되세요. '연극 속 연극'이라는 독특한 구성으로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사랑을 받아온 극단 증언의 '빈방 있습니까?'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이 연극은 성탄극을 준비하던 어느 교회 연극반 연출 교사가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는 덕구라는 아이에게 조연급인 여관 주인 역을 맡기면서 시작됩니다. 늘 외톨이로 지내던 덕구는 무언가가 맡겨졌다는 사실에 너무 좋아서 열심히 연습을.. 사실 대사라고는 한 마디입니다... 빈방이 있느냐고 묻는 요셉에게 '빈 방 없어요.' 매몰차게 이야기하고 들어오면 되는 배역이었습니다.
마침내 무대의 막은 오르고, 교회당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요셉이 말합니다. '빈 방 있습니까?' 우리 집엔 빈 방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요셉이 "죄송합니다. 아내가 만삭이 돼서.." 이렇게 한 번 더 부탁하면 덕구는 "글쎄 사정은 딱하오만 지금 우리 집엔 손님들이 꽉 찼어요. 당신네들한테 줄 방이 없어요." 이렇게 끝나는 가 했는데... 이 요셉과 마리아의 뒤 보고 있던 이 덕구가 갑자기 "요셉! 마리아! 가지 마세요." 몇 걸음 쫓아가서 그들을 잡으며 "우.. 우리 집엔 방이 있어요. 거짓말 아네요. 진짜 빈 방이 있다고요. 제 방으로 가세요." 요셉과 마리아를 끌어당깁니다. 대본에 없는 돌발 상황에 마리아와 요셉은 당황하고 결국 연극은 거기에서 끝이 납니다. 연출자가 무대로 뛰어나와 사과하고.. 그런데 그 연극을 보고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에는 따뜻한 웃음이..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탄생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시면, 아하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B.C 735년에 남왕국 유다의 12대 왕이 되어 16년 간 남 왕국 유다를 다스린 사람입니다. 이 시기는 '국제성제'가 혼란스러웠어요. 처음으로 대 제국을 이룬 앗시리아는 세력을 넓히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위협을 느낀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동맹을 맺고 앗수르의 남하의 공동대응을 하자고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왕 '아하스'에게 이 동맹에 동참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생각은 달랐엉. 그는 앗수르와 대적하느니 차라리 앗수르와 친분관계를 맺는 것이 국익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제안을 거절했고요. 그러자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연합군을 이루어 남유다를 공격 하였습니다. 같은 편이 아니면 적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앗수르가 공격해 오기 전에 남쪽에 있는 적(유다)을 쳐서 다윗 왕조를 폐하고 뜻을 같이하는 정권을 이루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는데, 바로 '시리아-에브라임 동맹전쟁'입니다.
이에 아하스 왕은 두려워합니다. 당연하지요. 북이스라엘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아람까지.. 성경은 아하스의 마음이 마치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다고.. 왕이 이러니 백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온 나라가 두려움에.. 이렇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아하스에게 보내십니다. 4절입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이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가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아람과 에브라임이 보이지만 저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라고 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지깽이는 아궁이에 불을 땔 때에 사용하는 나무 막대기지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아궁이에 불을 때곤 했는데, 부지깽이를 이용하여 땔깜을 조금씩 들어주면 공기가 잘 들어가서 잘 탑니다. 불 속에 있다 보니 자연히 부지깽이 끝에 불이 붙어서 그걸 끄면 하얀 연기가 나는 그 부지깽이. 그걸 보고 야 이러다가 불이 나겠다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어요. 지금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바로 이 연기 나는 부지깽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9절을 보세요..'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믿지 못하면 서지 못한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주 비슷한 말이어서 매우 재치 있는 표현입니다. "믿지 못하면-테아미아누, 서지 못한다-테 아메에 누".. 두 단어의 뿌리는 <아만>이란 동사입니다. 비슷한 알이 생각나시죠? 아멘. 네 아멘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아만>하면.. 굳게 서리라 <아만>을 경험할 것입니다.
왜 이사야가 이런 말을 할까요? 아하스가 아멘 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아하스를 보세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도 알아요. 그런데 이 말씀에 아멘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야! 내가 하나님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고, 지금도 운행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내 손에 달려 있다. 내 앞에서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아하는 아멘을 안 하고 있어요.
네, 하나님 알겠습니다. 너도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번 전쟁만큼은 아닙니다. 이번 전쟁은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을 겁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너무 세거든요. 앗시리아가 아니면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아하스에게는 앗시리아가 하나님보다 더 커 보여서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또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10-11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여기서 '깊은 데'는 지진과 같은 현상이고, '높은 데'는 천둥이나 번개 같은 현상을 가리킵니다. 정 못 믿겠으면 하나님께 지진을 구하든지, 천둥번개라도 구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진과 천둥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나타났던 구약의 징조들입니다. 사실은 아하스가 하나님께 구해도 시원찮은데. 지금 거꾸로 하나님이 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사야의 제안을 들은 아하스 왕이 12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겉으로만 보면 징조를 구하라는 이사야의 말이 불신앙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진술이 오히려 신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경건한 포즈를 취하면서 실제로는 세속적인 관점에 따라서 이사야의 제안을 확실하게 거부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가 진노합니다. 13절입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여기에서 우리는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유다가, 아하스 왕이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려 해도 거절합니다. 이제 이사야는 아하스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하스의 마음은 이미 닫혔습니다. 하나님께 아무런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14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풍전등화와 같은 유다에게 희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 희망은 한 아기의 탄생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하스 왕은 이를 듣고 그렇게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00만 대군과 장군들을 손에 쥐어주어도 마음을 돌릴까 말까 할 판인데.. 웬 아기? 전쟁에서 쓸모도 없는.. 그것이 무슨 징조란 말인가?'
그런데 여기에서 '처녀'라고 번역된 원어는 '하 알마'입니다. '하'는 히브리어의 정관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처녀'라고 하였을 때, 아하스는 이사야 선지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처녀는 다윗의 후손 즉, 유다 족속 왕가에 속한 처녀이거나, 이사야와 아하스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 처녀가 곧 결혼을 하게 되고, 임신하여, 아이를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을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징조로 주어진 내용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임'이란 말은 '함께'라는 의미이며, '마누'는 '우리와'란 의미이며, 그리고 '엘'이란 단어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아하스와 유다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당하는 고통으로 하루도 더 못 견딜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전쟁의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처녀가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고 그 자체가 이미 희망의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의 아기들이 유아세례를 받았어요. 너무 감사하지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이 아기들을 주셨어요. 이 아기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어둡고 불안해도 지금도 생명을 주시고 이들에게 세례를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그리고 이 아기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사 저들을 통하여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을 보면서 우리는 소망을 가집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임마누엘의 하나님..
이 메시아의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복음 1:22-23절을 보십시오.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가장 큰 복도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계시고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날이 바로 온르 성탄절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약속을 기억하시나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항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함께 함'의 기쁨을 경험한 사람은 스스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힘씁니다. 나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여 정신없이 지내지만 않고 내가 누구와 함께 있고 싶은지, 누가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내가 기다리는 사람,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 나를 기다리는 사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 기쁨이 있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그리고 이 성탄절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무덤들이 있는 야산을 지나 초등학교에 가야 했던 소년은 늘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그 소년의 아버지가 그 아들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 소년은 더 이상 그 길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길가에 피어 있는 꽃도 보이고 산들바람도 느끼고 그 길은 가장 행복한 꽃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꽃길만 걸으세요!" 이렇게 축복하며 인사합시다. 그런데 꽃길은 어떤 길일까요? 꽃이 있다고 다 꽃길이 아닙니다. 가시밭길이라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길이라도, 심지어는 무덤이 있는 길이라도 주님이 함께하시면 꽃길이 됩니다.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가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과 여행하는 삶의 길이 꽃길입니다. 주님과 대화하며 찬양하며 감사하며 주님을 전하는 삶이 꽃 길입니다.
'설교story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탄예배 I 마태복음 1장 18-20절 I 의로운 사람 요셉 (1) | 2022.12.22 |
---|---|
새벽설교 I 요한복음 9장 13-23절 (0) | 2022.12.19 |
성탄절기 설교 I 마태복음 2장 1-11절 I 별을 따라 (1) | 2022.12.13 |
새벽설교 I 요한복음 8장 21-30절 (0) | 2022.12.06 |
새벽설교 I 요한복음 8장 1-20절 (1) | 2022.12.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