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교회 성탄주일예배, 마태복음 1장 16-17절, 예수님의 탄생(1), 송태근 목사, 성탄절 설교문, 2017-12-24
예수님의 탄생(1)
마태복음이라는 책을 많이들 읽으셨겠지만, 첫 장부터 부담이 되죠? 족보가 등장을 한단 말이에요. 재미로 족보 읽는 사람 못 봤어요. 저도 종손이기 때문에 족보 책이 제 집에 있어요. 그거 몇 년에 한 번 명절날 같을 때 한번 들춰볼까? 보는 경우가 드물어요. 종씨 사무실에서 책을 만들어서 팔아달라고 해서 사서 보관한 것 외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지요. 하필 첫 장에 기자가 왜 이렇게 족보를 기록해 두었을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여러분들이 서점에 가서 책을 사면 맨 먼저 어딜 보고 책을 구입 여부를 결정하나요? 서문입니다. 책 제목도 중요하지요. 책 제목이 눈에 띄면 최소한 1장까지는 읽어봐요. 그래서 재미있으면 사야겠다. 의미가 있으면 보관해야겠다. 결정합니다.
오래전에 유대계 영화감독인 스필버그라는 분이 우리나라에 방문한 적이 있어요. 연대 강단에서 강연을 했었는데 강연 후에 시간을 가졌던 것이 기사가 났는데 한 분이 물었어요. "당신의 영화는 만들어질 때마다 대박을 터트리는데 비결이 뭐냐?"라고 했을 때, 조금 더 망설임 없이 "나는 영화 시작 5분 안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거기에 승부를 건다는 거지요? "왜 그러냐?" 사람의 심리가 그렇다는 거예요. 확증적 심리가 있어서 5분 안에 '재미있겠다.' 싶으면 뒤가 재미없어도 마음에 확정을 하고 재미있게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뒤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시작이 시큰둥하면 시큰둥하기로 결정하고, 재미있어도 시큰둥하게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영화 시작 5분에 상당히 몰입을 한다고 해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마태복음이기는 해도, 마태가 썼다고 확정할 수 없어요. 마태가 썼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놓는 책입니다. 누가 썼든지 간에 책을 쓸 때는 당시 첫 독자인 유대인들을 향해 글을 썼을 것이고, 유대인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책을 썼을 거예요. 사람의 심리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읕 진데 첫 서두에 쇼킹하고, 드라마틱하고 동기부여가 될만한 내용을 기록하면 좋을 텐데 족보를 여기에 기록해 두었는가?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해요. 왜냐하면, 1세기 유대인이라는 청중의 시각에서 이 족보를 봤을 때의 느낌과 기분이 어땠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해요. 1세기 유대인들의 청중 시각에서 이 내용을 보면, '말도 안돼!' 충격적인 거예요. '이게 뭐야?!' 왜요? 우선 족보인데, 전혀 족보의 조건들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단 말이에요. 일단, 족보라 함은 한 명도 이름이 빠져선 안 돼요. 그런데 이 족보는 구약에 열거된 족보와 상세히 비교를 해보니까 여러 명이 빠져 있어요 작게 잡아도 6명이 빠져 있어요. 누구를 뺐을까? 찾아봤더니,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였더라' 그래서 2대, 3대가 통째로 빠진 사람이 있어요. 그런 걸로 봐서는 이 족보는 족보적 자격 요건을 못 갖춘 거예요. 두 번째, 절대 유대 족보에는 여인이 들어가서는 안 돼요. 5명이나 들어가 있어요.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에요. 이방 여인도 들어가 있어요. 거기서 끝이 아니에요. 직업이 창녀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런 걸로 봐서 이 족보는 일단 족보의 형식을 취하긴 했으나 족보는 아니라 계보적 성격을 띤다. 족보와 계보는 차이가 있어요. 족보는 말 그대로 우리가 통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족보라 하는데, 계보라 함은 사건적 구분이에요. 의미적 구분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족보와 계보는 같지 않아요. 그런 관점에서 이 족보를 봐야 하는데 시간 관계 상 다 읽어보지 못하더라도 1절은 읽어볼까요?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절에도 족보가 아니라, 계보라 기록하고 있죠? 그러니까, 이 책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족보적 성격을 띈 계보다. 두번째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언급된 인원이 누구인가? 아브라함이에요. 그리고 다윗이 등장하는 데 왜 이 사람이 먼저 등장했을까?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혈통적 족보로 오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다시 재 해석을 해보자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합니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손입니다.' 다윗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설명이지 주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 족보는 '그리스도의 계보'란 뜻이에요. 그리스도의 계보는, 지금부터 이렇게 이렇게 흘러왔습니다라는 족보가 아니라, 계보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세번째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해요.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아야 해요.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말이에요. 이 말을 구약의 표현, 히브리어로 바꾸면 '메시아'가 되는데, 메시아와 '메사흐'가 틀려요. '메시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기름을 붓다'는 말은. 메사흐에요. 복잡하더라도 지적인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들어보세요. 메사흐는 '기름을 붓다'라는 동사에요. 그런데 이걸 메시아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질문을 할게요. 여러분들은 기름 부음을 받았나요? 안 받았나요? 받았지요.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그리스도를 고백한 자들이라면 전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누구의 계보라는 말인가요?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뜻이에요. 누가? 우리가. 이 열거된 이름들이 이런 맥락에 여기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누구에게 기름 부음을 붓나? 구약을 예로 들어보면, 선지자도, 사울도, 다윗도 임명을 받아 쓰임 받을 때는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기름 부음을 받아요. 이 사람들은 택함을 받고, 부름을 받아 세움을 입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는 순서가 됩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계보의 사람들이..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들이.. 그러니까, 1장 1절을 아브라함의 계보로 이해하느냐? 다윗의 계보로 이해하느냐? 그리스도의 계보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어마어마 한 차이가 있어요. 정확하게 이 계보는 누구의 계보인가요? 그리스도의 계보예요. 그리고 그 계보아래에 사실은 누구도 들어와 있어요? 저와 여러분들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브라함 자손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지요. 이게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6절을 볼까요?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것이 얼마나 단도직입적 표현인가 하면? 이 예수가 그리스도가 그 말이에요. 왜 이런 표현을 직설적으로 했을까요? 이것은 그 시대의 영적인 분위기를 이해해야 해요. 항상 성경이라는 책은, 역사라는 바탕에 얹어져 있기 때문에 당시의 문화와 역사를 모르고서는 원본의 텍스트의 오리지널 미닝을 드러낼 수 없어요. 이 시대는 모든 죄인이라면 모든 대망사상으로 팽창되어 있냐? '그리스도가 오셔야 할 텐데.. 이제나 오시려나?' 그래서 갈라디아서 4:4에 보면, '때가 차매..' 그랬어요. 그 때가 찼다는 말은, 모든 환경이 그리스도가 오실 환경이 충만해졌다는 거예요. 그만큼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대망과 열망이 거의 폭발 직전까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뭐냐? 가짜 그리스도가 일어났어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예수님께서도 경고했지요. 우리나라에도 현존하는 메시아가 50명이 넘어요. 그런데 늘 사람 살던 대가 똑같거든요? 2000년 전에도 유대 사람들의 의식 한 복판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 사상이 최고점에 달해 있었어요. 이때 혼란을 일단락하고 잠재우기 위해서 마태라는 저자가 붓을 든 건데, 첫머리에 아예 못을 박아버렸어요.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라." 동네 사람들이 나사렛 출신이라고 무시하던 가난한 시골 청년을 향해서 "이 분이 그리스도다."
요한도 '메시야가 뭐 저래?'라는 오해가 있었잖아요? 질문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잖아요. 당신이 오실 그 메시아가 맞습니까? 그 정도로 혼란에 있었어요. 자,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오늘 17절을 한번 볼까요? 마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전부, 14로 끝나요. 이것만 봐도 이 족보는 족보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안에 생략된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14대로 끊은 것은 의도적인 수치 배열이에요. 이것이 히브리인들이 잘 쓰는 숫자를 이용한 의미를 담는 방식이에요. 지금부터 그 숫자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을 드릴게요. 14는 뭐의 배수인가요? 그렇지요, 7의 배수예요. 7은 이 세상을 창조될 때부터 중요한 숫자로 등장해요. 모든 것이 창조되고 안식하기까지 며칠이 걸렸어요? 7일이요. 그런데 14가 되려면 7일이 몇 배가 되어야 해요? 2라는 배수가 있어야 해요. 성경 전체에서 항상 2는 무슨 의미를 갖느냐? 증거, 확신. 증거의 수예요. 이것은 히브리적 개념으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신성을 가지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이중적 신분이죠? 2라는 숫자는 그리스도에 충만한 숫자예요. 그러니까 2라는 수가 등장할 때는 이 충만함이 완전하게 확정될 것이라는 것이 14라는 숫자에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 전체의 걸쳐서 14가 어떤 용례로 쓰여졌는지 몇 군데만 건드려 봅시다.
우선 창세기에 요셉이 총리의 자리에 앉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그 당시에 재위했던 셈 족 계통의 바로가 꿈을 꿔요. 파리한 암소 또 살찐 암소.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다가 정확하게 요셉에 의해서 해석이 되는데 7년은 풍년이 들 것이고, 7년은 흉년이 들어요. 그대로 이루어지지요? 그런데 7년 풍년과 7년 흉년이 마치면 몇 년이 지나갑니까? 14년이 지나가요. 14년이 지나가니까 온 세계의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땅과 토지와 그리고 백성들과 돈이 전부 왕에게로 귀속되는 놀라운 일이 발생해요. 그 중간 역할을 누가 합니까? 요셉이 해요. 이것은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회복에 대한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에요. 온 세상이 하나의 나라로 통합이 돼요. 그 역할을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이 한단 말이에요. 이 모든 것들이 마무리되는데 14년이 걸립니다.
또,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몇년을 종살이 하는지 아세요 7년, 7년. 두 번에 걸쳐서 라반이 야곱을 한 푼도 주지 않고 속여 먹습니다. 14년은 종살이예요. 나머지 6년은 삯을 받고 일해서 종살이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종살이가 마쳐지기까지 14년의 세월이 걸린 거예요.
또, 넘어가서 출애굽 할 때, 홍해를 건너기 전 날 밤이 몇일인가요? 1월 14일이에요. 유대력으로.. 그들이 사십 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유월절을 며칠날 지킵니까? 14일입니다. 그들이 수산궁에서 끌려갔다가 14일 날 모입니다. 이렇게 14일은 유대인들의 민족사에는 지울 수 없는 숫자가 되어 갑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날이요, 약속을 성취한 날로 기억이 되는 거예요.
신약으로 넘어가 볼까요? 여러분, 사도 바울이 여러 사건이 있긴 하지만 로마의 황제 앞에 서기 위해서 배에 태워져 죄수로 호송되어 지중해 바다에 던져집니다. 그 때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배가 다 파선이 돼요. 그때 구원의 여망을 바로 보게 된 날. 모든 풍랑이 그치고 구원받은 날이 며칠 걸렸는지 아시나요? 14일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까지 열거된 14와 연관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딱! 두 개념이 남습니다. 구원과 자유예요. 그러니까 여기 세 번에 걸쳐 14대로 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통해서 그분을 통해서 그 안에 선택받은 백성들이 죄 사함을 얻고 자유를 얻는 구원의 성취가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확약하고 있는 거예요. 이해가 되산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족보의 형식을 취했으나 족보일 수 없는.. 계보의 성격이 더 맞는 이 계보 속에 익숙한 다섯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비천한 여인으로 여겼던 마리아가 기록이 됩니다. 짧게 짧게 이 다섯 여인에 대해서 인생에 얽힌 사연에 대해서 설명을 듣다 보면, 이 여인들이 끼어들 수 없는 계보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가?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다말. 누구입니까? 유다의 며느리예요. 유다 지파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확하게 언약하신 내용이에요. 그 언약을 성취해야 될 도구예요. 그런데 남편이 죽어 버렸어요. 희망이 끝나게 생겼지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이때 유다가 며느리에게 제안을 합니다. "너 친정집에 가 있어라. 시 동생이 아직 어리다. 이들이 성장을 하면 연락을 해주마." 그래서 가 있는데, 시댁에서 연락이 없어요. 그러니까, 다말이 신분과 관습을 뛰어넘는 생의 결단을 합니다. 창녀로 변장을 해서 시아버지가 양치러 오는 길목에서 기다려요. 그리고 거래를 해요. 돈이 없으니까, 유다가 자기 소지품 중의 중요한 몇 개를 화대값으로 보증합니다. 그거를 받고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불륜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한참 있자니까 유다의 귀에 믿지 못할 소식 며느리가 임신을 했다는 거예요. '이런 못된 며느리가 있나..?' 처형을 하려고 할 때, 그때 다말이 돈 대신 받은 증표를 꺼냅니다. 이거 누구껀가요? 유다 자기 거예요. 그 때 유다가 다말을 향해서 유명한 말 하나를 남깁니다. "네가 옳도다." 여러분, 거기서 '옳다'는 도덕적, 윤리적 옳음이 아니라 무슨 심정으로 그랬을까요? '유다 지파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라는 고백을 사실상 행동화한 거예요. 유다는 나중에서야 깨닫고, 언약에 불성실했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끝까지 그 언약을 붙들고 앙망했던 며느리를 향해서 "네가 옳도다."라는 선언을 합니다. 그게 의롭게 여긴다는 뜻이에요.
두 번째 여인, 라합. 이 여인은 누굽니까? 이방 여인의 직업적 창기입니다. 아마도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비천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생계형 창기였던 것 같아요. 얼마나 그 운명이 슬펐겠어요? 낯선 남자들과 육체적 관계를 매일매일 생계를 위해서 할 때 얼마나 그 운명이 슬펐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정탐꾼 둘을 보냈는데 어리바리한 사람들을 보냈던 것 같아요. 들어가자마자 들통이 나서 그것도 기생 라합의 집에 숨어 들어갑니다. 라합이 감추어 주죠? 그래서 그날 밤 기생 라합의 입에서 믿기 힘든 간증 하나를 듣게 됩니다. "너희 조상들이 홍해를 건널 때에 어떻게 건넜는지 원수의 세력이 너희를 침공할 때에 너희 하나님이 어떻게 물리쳤는지 이 무서운 광야를 너희들이 어떻게 건너왔는지를 들었을 때 간담이 녹고, 하체가 떨렸다. 우리가 듣고 간담이 녹았나니." 믿음은 어디서 나냐? 들음에서 납니다. 라합의 믿음은, 하나님의 소식을 듣고 난 거예요. 라합은 오매불망 하나님을 통한 구원의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한 하나님의 내비게이션을 통해서 어리바리 한 두 정탐꾼이 직접 자기 집으로 기어 들어와요. 그러고 나서 둘은 정탐도 못하고 돌아가요. 간증만 듣고, 왜 왔을까요? 이 간증 들으러.. 백번의 정탐보다 더 훌륭한 생생한 하나님의 간증을 이방 땅 여인, 창기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된 거예요. 구원이 얼마나 역설이에요. 그리고 이 여인이 족보를 등장한 것은, 이후 오뱃을 낳아요. 오뱃은 이새를 이새는 누구를 낳았죠? 다윗을 낳아요. 다윗의 조부모가 되는 거예요. 라합이에요.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룻은 어떤 여인입니까? 베들레헴 땅에 행복한 가정에 살고 있었어요. 가장의 이름은 아비멜렉,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 엄마의 이름은 '나오미', '희락, 즐거움, 기쁨'. 기룐과 말롯이라는 아들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베들레헴에 흉흉한 가뭄이 찾아왔고, 이 가정은 고민 없이 건너가서는 안 되는 모압 땅, 이방 땅으로 피해 들어갑니다. 거기서 이방 여인과 두 아들을 결혼을 시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못난 진상의 행로를 통해서 꿋꿋하게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거예요. 그런데 웬 사연인지 남편 죽자마자, 아들 둘이 차례로 숨을 거둡니다. 과부 며느리 둘과 과부가 된 시어머니. 여인 셋 만 남았어요. 대가 끊어지게 되는 참담한 생활을 하던 어느 날 고향 땅에 다시 풍년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결단을 하게 됩니다. '돌아가자.' 그리고 두 며느리를 대동하여 길을 가다가 돌려세웁니다. "너희들은 아직 젊다. 아름답지 않으냐? 새 삶을 찾으라. 너희에게는 낯 선 땅 베들레헴에 가면 누가 너희들을 맞아 주겠느냐? 돌아가라." 이때 오르바는 울며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데, 룻은 시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이상한 고백을 합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님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룻의 신앙 고백입니다. 말릴 수 없기에 과부가 된 며느리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데 동네 사람들이 초라하게 변해버린 나오미를 보고 이렇게 얘기하지요. "저가 나오미가 아니냐?" 이건 히브리 말의 말론입니다. 희락,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을 가진 나오미를 조롱하는 거죠.
그러자, 나오미의 입에서 매우 쓸쓸한 소리가 나옵니다. "나를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마시오, 이제 나를 마라라 하시오." 마라라는 말은, 괴롭다는 말이에요. 쓰다. 마라의 쓴 물 같은 말이에요. 마라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가 마리아. 마리아가 그렇게 낭만적인 이름이 아니에요. 그러고 룻은 억척스럽게 남의 밭에 가서 일을 하다가 운명적인 사내를 맞게 됩니다. 보아스입니다. 그 동네에서 가장 부자예요. 보아스와의 결혼을 통해서 자녀를 생산하게 되는데, 그 자녀가 오뱃이에요.그 애기는 나오미의 품에 안겨 있어요. 나오미는 누구인가요? 망한 여자예요. 집 문을 닫은 여자예요. 희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늙은이의 가슴속에서, 구원과 희락과 즐거움이 끊어진 가슴에 생명이 안겨져 있어요. 나오미란 이름이 회복이 되는 거예요. 정확하게 우리의 구원을 의미해요.
자, 우리는 계속해서 다음 여인을 만나 볼 필요가 있어요. 볼 것도 없이 우리야의 아내예요. 이왕 넣어 주는 거 '밧세바'라는 이름을 넣어주지, 왜 '우리야의 아내'일까요? 다윗의 죄를 도말하는 거예요. 이것은 다윗의 영웅담을 담은 다윗의 혈통에 관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 계보가 아니에요. 다윗을 대표한 인간이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얼마나 죄악 가운데 출생한 존재인가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 밧세바의 남편 이름이 등장하는 거예요. 우리야는 헷 사람. 이방 사람이에요. 쉽게 얘기하면 이방 사람보다 더 못한 다윗을 도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계보예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마지막 여인은 누구입니까? 마리아는 스스로를 비천한 계집이라고 합니다. 비천한 존재였어요. 그런데 다섯 여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마다 독특하게 다른 이름과는 구분되는 질서가 하나 눈에 띄어야 합니다.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마리아에게서..' 문법적으로 이해가 되시죠? 본문에는 '~의 에게서'에 해당하는 '에크'가 쓰이고 있어요. 이 '에크'라는 말은, '발단, 원인, 뿌리'라는 거예요. 누가? 이 구원의 질서가 다섯 여인을 통해서 발단이 되어 그리스도가 나셨다 그 말이에요. 보세요. 이 여인들이 이 땅에 나그네 같은 존재들인지.. 아니면 혈통적으로 드러낼 만한 근거가 있는 사람들인가요? 그러면 이 여인을 대면하는 근거는, 누구의 은혜가 대입되어야 하는 이름인가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눈물을 통해서 이 여인을 통해 이런 혈통들이 이어져 왔다 그 말이에요.
그리스도는 그렇게.. 그런 운명을 가지고 오셔야 했던 거예요. 이렇게 우리에게 구원이 흘러 온 거예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누구의 계보인가요? 그리스도의 계보예요. 믿습니까? 그 계보 안에서 이번 성탄을 맞을 때 holyday로 만들지 말고, christmas baby가 있다고 해요. 얼마나 마음 아픈 이야기입니까? 향락의 날로 만들지 말고.. 온 세계의 시민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고, 구원의 반열에서 그리스도의 계보로 들어오는 복된 소식을 전파하고, 낮고 천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낮고 천한 이들을 위한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아기 예수를 대신하는 우리 삼일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송가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이 교통 하심이 머리 숙여 기도하는 귀한 우리 삼일의 성도들, 해외, 군에, 멀리 출타해 있는 우리 가족들과 선교지에서 늘 수고하는 선교사님과 그리고 복중의 생명들까지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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