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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야고보서 2장 1-13절 I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I 설교문

by №1★↑♥ 2024. 4. 30.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 온누리교회 Pole2 대학부 주일예배 최대흥 목사 - 

'임계장 이야기'라는 책을 읽어 보신 분 계시나요? 이 책은 조정진이라는 분이 쓰신 책으로 2016년에 퇴직을 하시고 그때부터 일을 하면서 매일매일 써놓았던 일기 형태의 일지를 모아서 만들어 놓은 책입니다. 이 책 제목을 처음에 접했을 때는, '임 씨 성을 가진 계장'님의 이야기인가?라고 생각을 했는데 책을 열어보니 전혀 다른 이야기더라고요. 

나는 퇴직 후 얻은 일터에서 '임계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는 '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라는 말의 준말이다.

임계장은 '고-다-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쉽다고해서 붙은 말이다. 

석 줄짜리 구인 광고를 내면 일자리를 원하는 노년의 노동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고용주는 이 중에서 '고분고분한 자, 뼈와 근육이 튼튼한 자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임계장 이야기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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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장이 어떤 뜻인지 이제 아시겠죠? 이분도 불과 퇴직 전에는 대기업을 다니면서 부장님, 상무님 소리 듣던 분이신 거예요. 38년 동안 공기업에 다니시다가 2016년 퇴직한 이후 자신에게 붙은 이름이 '임계장', '임시 계약직 노인장'이었던 거예요. 이것이 나와는 전혀 무관한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리시나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몸 담고 있는 곳. 하지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삶을 향한 간절함. 그리고 삶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소위 차별이라는.. 이 시대 어두움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얼마전에는 또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는데요? 결혼 매칭 회사에서 신청자의 등급을 평가하는 기준이었습니다. 당시에 신청자는 5급 공무원으로 삶에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1등급을 놓치지 않았던 사람. 치열한 경쟁에서 항상 남들보다 앞선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결혼 매칭 회사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주고서 받은 등급이 8등급이었다고 해요.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있는데 그중에서 8등급이라는 것이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고 하니까, 너무 화가 나서 "내가 어떻게 8등급이냐? 자신 정도의 스펙이면 조금 더 높은 등급이어야 하지 않냐?" 그때 커플 매니저가 뭐라고 했냐? 1등급의 기준이 뭐냐? 돈이 얼마나 있으면 1등급이 될까요? 개인 보유자산 200억이 돼야 1등급이래요. 의사나 변호사는 8등급. 8등급이 굉장히 허다하고, 8등급이 낮은 등급이 아니니 안심하라. 그리고 당신의 이력으로 충분히 변호사, 검사, 의사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는 거예요.

제가 이 이야기를 접하고, 정말로 본질이 많이 흐려져 있구나! 결혼이 정말 중요한 일이지요. 평생을 같이해야 할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과정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고, 기도하고 점검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옵션이 메인이 될 수는 없는 거지요. 돈이 아무리 많든,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그것은 옵션이고, 본질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 옵션이 결혼의 유무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우리에게 사랑이 없어도 결혼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거예요. 반대로 말하면 내가 아무리 이 사람을 사랑해도 이 사람을 데려 올 만큼 옵션이 내게 있지 않다면, 사랑해도 결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도 결국엔 차별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처럼 차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요. 이제는 많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신분의 차별, 인종의 차별, 남녀의 차별, 외모의 차별, 빈부의 차별, 계약직 정규직의 차별,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별과 같은 너무 많은 차별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때로는 누군가를 차별하기도 하고, 미처 알지도 못한 채 누군가를 차별하며 세상을 살아가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이것이 세상 만의 일일까요? 성경은 어떨까요?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자신의 본 처 사라를 유독 편애했던 사람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었어요. 이삭은 어때요? 그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어요. 야곱과 에서였어요. 그런데 이삭은 누구를 사랑했죠? 첫째 아들, 에서를 사랑했고 그리고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을 사랑했어요. 자신과 기질이 비슷한 야곱을 사랑했다는 거예요. 결국 부모의 빗나간 사랑. 그것이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이 두 아들의 평생의 삶이 경쟁하는 인생이 되었다는 거예요. 부모의 빗나간 사랑이 차별이 되어서 아들의 인생을 망하게 했다는 거예요. 

그럼 평생의 인생을 차별당하는 인생을 살았다면, 야곱은 그런 삶을 살지 말아야죠. 12아들 중에 누구를 사랑했냐? 요셉을 사랑했어요. 요셉이 사라지고 나서 누구를 사랑했냐? 베냐민을 사랑했어요. 명백한 편애입니다. 결국 이 야곱의 차별 때문에 요셉은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고난의 시간들을 가족들이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그리고 이 신앙의 삶 속에 나타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스스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포장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와 비슷한 차별이 숨어 있다는 거예요. 가장 차별이 없어야 하는 교회 안에서 우리도 알게 모르게 차별을 행하는 모습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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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은 세상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었어요. 경쟁사회, 차별사회를 향해서 그렇게 살면 안 되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몸 담고 있고, 평생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차별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말성경)야고보서 2:2-3, 2 만일 여러분의 회당에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또 누더기 옷을 걸친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3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시오"라고 말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판 아래 앉으시오"라고 말한다면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야고보서에서는 세상의 차별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은 늘 평등을 외치지만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던 곳이 세상이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차별 없는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차별 없는 사랑으로 구원함을 받은 교회 안에도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2절에 보면, '만일 여러분의 회당..'으로 오늘의 본문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빈부의 차별을 콕! 집어서 분명하고 선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의 회당에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안내팀이 정말 좋은 자리로 안내를 해주는 거예요.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과한 친절을 베푸는 거지요. 그리고 수시로 불편한 곳은 없느냐? 물어가면서 세심하게 챙겨가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굉장히 좋아요. 문을 열어 주는 게 나쁜가요? 좋은 자리로 안내하고, 불편한 점은 없는지 세심하게 물어보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들어오는 사람이 문제예요. 그 뒤에 누가 들어왔냐? '누더기 옷을 걸친 가난한 사람이 들어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아도 가난해 보여요. 자신은 최대한 깨끗한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러 왔지만.. 자신의 가난을 감추기에는 역부족인 거죠.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아요. 이번에는 안내팀이 전과 다르게 응대하지 않는 거예요. 이런 정도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어디로 앉아야 할지.. 자리도 없어서 고민을 하다가 용기를 내서 뒤 쪽에 리더십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제가 어디에 앉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죠? "거기에 섰든지 아니면, 내 발판에 앉든지.." 여기서 '발판'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휘포포디온'으로 '발아래 까는 판때기'를 의미해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발판 중에 아무 데나 앉으라는 거예요. 의자가 아닙니다. 당신이 앉을 의자는 없으니 바닥에 깔려 있는 발판 아무 데나 앉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 안에 차별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차별을 안 한다고 생각을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본성 가운데 나와 비교해서 차별로 깍아내리는 모습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크든 적든, 그것을 내가 인식하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의 삶 속에는 여전히 이러한 차별의 모습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냐? '아무도 차별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작디작은 차별까지도 용납하지 말아라. 결코, 차별하지 말라는 거예요. 1절의 말씀을 개역개정 버전으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사람을 어떻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나요? 차별하지 말라. 그런데 2장의 내용을 계속해서 읽어나가다보면 하나님의 명령의 점차 강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성경) 야고보서 2:9,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며 율법이 여러분을 범죄자로 판정할 것입니다 

1절에서는 단순히 차별하지 말라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는 차별은 죄라고까지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간음을 죄라고 생각하고, 살인은 더 큰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차별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인식을 하지 않아요. 때로는 나도 차별을 받을 때가 있고, 나도 차별을 할 때가 있지요. 그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닌가? 은연중에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니 죄를 짓는 것이라. 그리고 13절까지 가면 더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성경) 야고보서 2:13,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깁니다. 

정말로 충격적인 메시지 아닌가요? 사소한 차별로 시작된 우리의 죄의 종말의 그 끝은? 하나님의 긍휼없는 심판으로까지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돌아볼 수 있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 안에 차별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차별이라는 죄의 잔재들이 남아 있지 않은지.. 혹 나도 모르게 그것을 행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차별을 행하고 있지 않은지 날마다 사람과 말씀 앞에 우리를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차별 없이 대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차별 없이 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장의 이야기가 나와요. 그는 생존해 계신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떼어달라고 할 만큼 안하무인, 패륜아였어요. 아버지가 죽지 않았는 데 유산을 달라고 할 만큼 정신이 없었던 아들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유산을 떼어서 주었습니다. 유산을 받자마자 아버지를 떠났고, 성경은 그 많았던 재산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탕진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유산도, 가족도 남지 않았어요. 하다못해 돼지는 먹는 쥐엄 열매도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하루를 생존할 만큼의 최소한의 양식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인생으로 전락했어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그가 선택할 대안이 없었어요. 결국 이 아버지의 집에서 품꾼으로라도 살아야겠다고 그가 가진 자존심을 버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마치 아버지께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것을 알았다는 듯이 언덕위에서 그를 보고 뛰어가 영접했다. 그리고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여러분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는 것은? 당시 시대의 이해로 보면 화해와 용서입니다. 관계회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요청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용서를 요청해야 할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지요?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 사항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는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차별하지 않았어요. 집에서 자신의 옆에 건실하게 버텨주었던 아들과 비교해서 그 아들을 책망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저 말없이 집 나갔던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화해의 마음을 전해주었다는 거예요.

또한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의 이야기도 나와요. 삭개오는 당시에 세리장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어요. 세리장이라는 것은? 당시대를 살아갈 때 가장 폐륜적인 직업이었어요. 동족의 혈세를 뜯어내는 사람이었잖아요. 혈세를 뜯어내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어려웠던 유대인들에게 악착같이 세금을 걷어냈던 사람들이 세리였는데 그중에서 삭개오는 세리 중에 세리, 세리장이었어요. 매국노였어요. 아마도 그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돈은 벌어서 풍족했지만 참으로 외로웠던 인생이 바로 삭개오였어요. 그런데 그의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먼저 "삭개오야~ 나무에서 내려오라! 내가 너희 집에 오늘 유하여야겠다."라고 그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냐? 누가복음 19장 8절을 보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자신이 가진 소유의 절반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토색 해서 빼앗은 물건이 있다면 내가 네 배로 쳐서 갚겠습니다." 그러니까, 회개의 변화,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어요. 예수님께서 찾아와 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착각을 할 때가 많이 있어요. 나 정도면 괜찮겠지? 이 정도 신앙이면 괜찮겠지? 나 정도 열심이면 하나님도 나를 축복해주시겠지? 여러분 이러한 잘못된 의가 얼마나 복음의 은혜와 값없는 사람을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회개도 얻게 되어진 구원의 기쁨에는 우리의 노력이 단 0.1%의 지분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래서 이야기 하잖아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할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모든 삶의 은혜들이 성령의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이루어졌는데 성령께서 역사하셨을 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이루어졌다. 구원이 그곳에 임했다는 거예요. 그리고서 이 모든 성령의 역사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모든 회개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는 거예요.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이 있어서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 로마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라고 해요. 

하나님의 역사를 믿었더니 그것을 의로 여겨주셨다고 해요. 믿음, 그 믿음이 아브라함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스펙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믿음마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자신이 구원을 위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지요. 오늘의 본문 5절입니다. (우리말성경) 야고보서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택해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택하셨다고 해요.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누구를 의미하냐? 정말로 빈곤한 사람들.. 정말로 돈이 없어서 하루를 살아가기에 버거운 사람들.. 보여지는 가난을 일상으로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가난'을 확장해 가면, 마음의 가난함을 이야기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팔복을 선언하실 때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이 임한다고 해요. 여기서 '가난'에 해당하는 단어는 헬라어 '프토코스'로 '파산을 당해서 남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전적인 무능력의 상태를 의미'해요.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빚을 면죄해 줄 수 있는 사람에 따라 자신의 처우가 결정이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는 거고, 이 사람이 처벌을 원하면 처벌을 받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선택불가의 상황. 심령의 가난함으로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파산을 당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 본문 5절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요. (우리말성경) 야고보서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택해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차별하기로 작정하셨다면 파산당해서 자신의 어떠한 빚을 견제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를 그저 바라보셨을 거예요. 알아서 하라고 내 버려 두셨을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어요.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선택하셨다. 그것이 오늘의 말씀이라는 거예요.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자, 지혜 없는 자나, 율법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나, 하례 자나, 무할례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어떤 존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선택하셔서 믿음에 부한 자가 되게 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희를 차별 없이 선택하지 않았냐?" (우리말성경) 1절, '그러므로 너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9절,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니', 13절 '긍휼히 행하지 않는 자에게 긍휼 없는 심판이 잇을 것이다.'

계속해서 차별하지 말라. 차별은 죄다. 차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차별하심으로 긍휼없는 심판으로 역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야기고, 최근에 화두가 되었고 교회 안에서도 담임목사님을 위시해서 많이 언급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국회상정이 되었지요? 정말로 많은 논란과 갈등을 빚고 있지요.

이 법이 통과되기를 원하는 쪽에서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거예요. 너무 많은 차별이 있고, 약자에 대한 차별이 있다. 소수자의 인권을 우리가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겠냐? 는 거예요. 그런데 아직 까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현재의 법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확실한 법. 차별하는 사람들을 징계할 수 있는 법을 만들자. 그 법까지를 만들어야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하여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기독교 진영을 향해서 이야기하지요. "편협한 시각이다. 일방적인 주장이다.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해질 수 있는 권리를 반대하고 있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데 왜 기독교가 나서서 그것을 반대하냐?"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우리가 차별을 넘어 평등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 단체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엄격한 기준으로 뭐라고 하시죠? "차별하지 말라. 차별은 죄다. 내가 창조한 저 사람을 네가 무슨 기준으로 너의 생각과 판단으로 차별하느냐? 내가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하서 구원한 저 사람을 네가 왜 차별하고 판단하냐?" 매우 단호하게 그것을 죄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기에 차별하는 세상과 교회를 향해서 선언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차별해선 안 돼요. 그것은 세상의 차별이 겁나서 차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차별의 모습을 없애기 위해서 끝없이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앞에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포괄적 차별 금지법은,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구별에 대한 문제에요. 세상은 계속해서 젠더 이슈를 가지고 차별이라고 얘기하고 있죠? 성적취향, 성별 정체성에 대해서 차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차별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구별이라고 하세요. 구별해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구별해서 드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차별을 분명한 죄라고 말씀하세요.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면 나도 너희를 긍휼없는 심판으로 대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구별까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모든 것을 허용해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차별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단호하면서도, 명확하게 말씀하시지만 구별에 대해서는 더 세심하고, 더 선명하고, 더 강력하게 말씀하신다는 거예요. 특별히 죄의 문제, 오염의 문제. 이 죄가 들어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처절하고 단호하게 끊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수많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 한 개도 남겨두지 말고 진멸해 버리라는 거예요. 

 

 

 

 

사무엘상을 보면 아말렉과의 전쟁이 났을 때 사울을 향해서 다 죽이라고 해요. 모든 생명을 다 진멸하라. 그리고 모든 전리품을 다 불사르고 없애라고 했는데 사울이 결국 그 말을 듣지 않지요. 가지고 옴으로 인해서 사울이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별해서 멀리하라는 것을 가까이 함으로 인해서..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피신을 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8:22, 22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땅도 구별 하시는 분이세요. 당신의 백성들이 머물 땅조차도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23절입니다. 출애굽기 8:23,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지금 하나님의 백성과 애굽. 세상백성 사이를 구별하시겠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9장에 와서는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마저도 구별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별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13장에 가면, 처음 모든 난 것들까지 다 거룩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하세요. 여러분 우리가 왜 십일조를 드려야 할까요? 구별하는 겁니다. 사실은 10의 10 다 드리면 좋지만 우리가 9/10는 있어야 살아갈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전부를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1/10이라도 하나님께 구별해서 드리자. 그 구별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왜 우리가 결혼을 통해서 한 사람만 만나야 되죠? 다른 모든 연인들은 무시하는 건가요? 아니죠? 내가 평생을 함께 할 여인을 구별하여 내 인생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 여자 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 달에 한 번씩 신청자가 있으면 세례를 하는데, 왜 세례를 하지요? 왜 입교를 해요? 안 하고 살아갈 수 있잖아요? 이것 역시 다른 신이 아니라 다른 종교가 아니라 다른 우상이 아니라 오직 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길이지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삶을 드리겠음을 결단하여 구별하여 드리겠다는 우리의 신앙적 선택이자 결단인 거예요. 그래서 레위기 20:24,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그리고 에스겔 44:23,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라고 말씀하세요. 어떤 것이 거룩한 것인지 어느 것이 속된 것인지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점점 어려운 이 시대 속에서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과 가족들과 공동체 안에서 그것을 구별하여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신앙을 갖기를 원하신다는 거예요. 구별하리니.. 구별하여.. 구별돼라. 구별한. 끊임없이 성경을 통해서 구별된 인생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이 구별을 차별이라고 이야기 해요. 차별이라는 거짓된 속임수로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남자와 여자 외에 또 다른 성을 차별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이제 그 외의 다른 성에 지적하거나 이야기하거나 혹은 그들이 모욕감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을 처벌해야 하니 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포괄적 차별 금지법의 문제는 결코 차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구별의 문제인 거예요. 만약 이것이 차별의 문제였다면 예수님의 성육신, 그분의 낮아지심도 없을 거예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이 땅으로 보내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시지도 않으셨을 거예요. 그분께서는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차별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를 구별하여 구속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의 사랑은 차별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구별함에 있습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구별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우리를 구별하여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의 구별된 사랑가운데로 들어오기를 원하신다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의 삶도 결코 차별해서는 안 되겠지요?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의 기간을 보내고 있지요? 이 사순절은 부활절 전까지 6번의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시간을 이야기 해요. 이 시간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여정을 통해서..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왜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시간이라는 거예요. 이 사순절의 시간은, 재의 수요일로 시작해요. 여기서 '재'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물건을 태우고 남은 재 혹은 가루를 의미입니다. 이것은 "너는 흙이니 ,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거예요.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영원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지만 우리의 능력으로는 영원을 살 수 없어요. 사람들은 실낙원을 찾아서 헤매지요.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가지요. 유토피아의 헬라어 원어를 보면, '그런 곳은 없다'가 그 뜻이라는 거예요. 바벨탑을 통해서 하늘에 닿을 수 없는 거예요.

십자가 사역의 당위성과 필요성은 이것을 인정하는 정체성과 필요성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아! 우리는 흙이구나! 우리는 재와 같고 먼지처럼 사라져 버릴 인생이구나! 우리의 존재가 유한할 뿐이라는 이 겸손의 고백을 통해서 시작된다는 것이에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바로 이런 인생을 위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한낱 흙에 불과한 우리의 인생이 그저 흙으로 썩지 않기를 바라고, 재로 사라져 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별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이 얼마나 초월적인 사랑이고 은혜이고, 특혜입니까? 그렇게 우리의 삶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차별 없는 그 사랑의 은혜처럼 차별이 아닌, 차별을 넘어 구별에 이를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고난의 이유는 차별이 아니라, 구별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며 삶을 통해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구별된 인생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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