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응렬 목사, 야고보서 2장 1-13절, 살아있는 믿음은 생활을 바꾸어 놓습니다. 믿음 4,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류응렬 목사, 야고보서 강해, 류응렬 목사 야고보서 강해
살아있는 믿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 워싱턴중앙장로교회 류응렬 목사 -
야고보서의 말씀은 정말 살아있는 믿음,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차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법도를 향해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법도를 향하여 차별하지 말라는 거예요. 오늘의 주제를 읽어보면, 마음속에 부담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서도 차별하면서 좋지 않은 일인데 어떻게 교회 안에 차별이 있어서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가?
예수 믿다가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할 때 한 사람을 전도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을 것인데.. 교회 안에서도 차별이 있다는 말을 하게 되면 복음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당시 로마 시대에는 차별이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였는데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정말 새로운 세계, 새로운 법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이런 일이 잘 없지만, 예전에 아프리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백인 승객이 옆에 앉은 사람을 보고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자리를 바꾸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흑인분이 앉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스튜어디스가 상의를 하고 난 다음에 "마침 퍼스트 클래스석에 자리가 나서 일어나시라."라고 합니다. 당연히 백인이 일어났는데, "당신이 아니고 옆에 있는 사람 일어나세요." 흑인의 손을 잡고 일등석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을 준비할 때 목사님 한 분이 저에게 요즘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그 드라마에 대한 글을 읽어보니가, 자폐 스펙트럼을 앓고 있지만 최선을 다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한 변호사 이야기였는데 글을 읽다가 전장연이라는 곳에서 발표한 글이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전국 장애인 차별금지 연합회'에서 보낸 두 컷의 그림이었습니다. 제가 그 그림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랐습니다. 장애인들이 힘 있게 활동하게 되었지만, 실제 장애인들의 눈에는 한국사회가 얼마나 많은 차별을 가하고 있는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 두 컷의 사진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회는 장애인에 대해서 너그럽게 배려하는 사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대 어르신들.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시대에는 아마도 몇 차례 '차별이 이런 것이구나!' 느껴 보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즘도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에도 차별이 존재하는데 이천 년 전의 차별은 어떠했을까요 과연 어떻게 하면, 차별이 없이 모두가 아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가 있을까요? 오늘 야고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세 가지 제사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믿음을 가진 사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차별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아주 심플하게 말해줍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믿는가? 믿음이 있다면, 차별하지 말라." 야고보서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를 주인으로 모셨다면 사람을 대할 때 차별하지 말라. 차별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옛날 성경은 '너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을 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차별이라는 헬라어 단어 속에 이미 외모로 사람을 취한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외모로, 사람의 겉모습으로, 인종으로, 성별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당시 로마 시대에는 차별하는 것이 보편화 된 삶이었습니다. 남성 우월사상이 팽배했습니다. 하수구가 굉장히 발달해 있었는데 하수구 밑으로 들어가 보면, 어린아이의 시체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여자 아이를 낳으면 사산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노예, 상전이 일상화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도 노예를 어떻게 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칼빈이 쓴 책 중에 '관용론 주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전의 주인이 연회를 벌이다가 옆에서 수종 들던 하인이 실수로 술잔을 깨트립니다. 그러자 하인을 연못으로 집어 던지게 합니다. 악어의 밥이 되어 죽은 사건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노예의 삶이라는 것이 주인의 손에 의해 좌우되었던 이런 시절 때 하는 말입니다. "너희는 교회 안에서 누구라도 차별하지 대하지 말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차별하지 말라는 말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이제는 세상의 법, 사회의 흐름이 아니고, 하늘의 법을 따라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세상에 발을 디디고 서 있지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법을 따라 살겠습니다. 성경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차별하지 말라.
예수님의 삶을 보시면 그 사실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가성에서 만난 여인. 사람들에게는 창녀처럼 취급 받던 여인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깊이 다가가셔서 주님의 딸로 삼아 주십니다. 열명의 나 환자들. 고통 스런 눈물로 살아가던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 고쳐주셨던 주님. 세리장 삭개오. "내려오라. 내가 너희 집에 유하여야겠다." 열두 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쳐주신 우리 예수님.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나약한 사람, 눈물이 흘렀던 사람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셨던 주님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되기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정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차별이 심했기에 교회 안에서 차별하지 말라고 할까요? 야고보서 2:2-4,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금가락지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더 귀하게 여기는 것.'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악한 일'이라고, 범죄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가지고 사람들을 차별할까 싶지만, 성경에는 사람의 겉모습을 가지고 차별한 예가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기로 작정을 하고 다른 왕을 세우기로 작정하십니다. 사무엘을 보내셨지요? 이새의 아들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대면합니다. 첫아들 엘리압을 딱 만났는데, 다른 사람은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너무나 용모가 뛰어나고 딱 보기에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을만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라고 딱! 정했는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키와 용모를 보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16:7,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중심을 본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떤 가치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어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 '형상'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이 쓰였던 고대 근동의 시대를 보면, 이 '형상'이라는 단어가 일반 평민들, 일반 사람들에게는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단어입니다. 왕이나 통치자에게나 '형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요. 그러니,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왕과 같은 위엄을 가진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소중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눈을 가지고 사람을 보아야 차별하지 않고 상대적인 잣대가 아니라, 절대적인 잣대. 하나님의 눈으로 서로를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거예요.
최근에 제가 한 청년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 아프면서도 감사한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렇게 고백을 해요. "이전에 저희가 가난하게 지하에서 살았습니다. 그때는 남들 보기에 부끄러웠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서 내 존재감, 내 자존감을 회복하고 나니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 가난한 어릴 시절에 때로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이제는 장성해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나서의 고백을 들으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나에게도 혹시 은연중에 차별하는 눈으로 사람으로 보진 않습니까? 그 눈으로 나 자신을 상대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까? 요즘 사람들이 가지는 차별은 무엇이 있을까요?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 어떤 직장을 다니고 있는지, 자녀들의 성공 여부를 가지고 때로는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지고 차별적으로 대하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끔 이렇게 말하는 거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별거 있어? 다를 바가 있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때로는 더 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잘 구분이 되어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동떨어져서 차가운 사람으로 느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복음으로 다가서야 될 사람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들려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차별하지 않는 것은 시작입니다.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되겠지요?
2. 사랑을 가진 사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두번째로는, 사랑을 가진 사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사랑을 가진 사람은 차별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 더 나아가서 차별받을 만한 사람. 더 연약한 사람을 두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우리 예수님께서 가장 강조한 것인 사랑의 원리 아니겠어요? 오늘 야고보가 8절에서 하는 부탁입니다. 야고보서 2:8-9,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사람이 차별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범법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을 평범하게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성경에 많은 법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어야 될 교리도 참 많지요? 그중에서도 몇 번이고 반복하신 말씀이 있어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이 사랑이라고, 최고의 법이 사랑이라고 계속 강조하며 말씀하신 것이 '사랑'이에요. 정말 사랑하게 되면, 차별하지 않게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우리를 완전히 휘감게 되면 가장 연약한 부족한 사람을 품고, 배려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웃을 사랑하라.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 이 말씀이 당시에 던졌던 파장을 한번 생각해 보시겠어요?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글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저 사람들은 언젠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원리는 파워게임입니다. 더욱 힘센 사람, 강한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누구든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고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는 세상. 저 사랑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론리 스타크'라는 학자가 쓴 책이 한 권 있습니다. 'The Rise of CHRISTIANITY'(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이 분은 기독교인이 아니에요. 그냥 역사학자입니다. 그가 1세기에 기독교가 어떻게 저렇게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다 죽었는데.. 저 책의 부제목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How Did Obscure, Marginal Jesus Movement Become the Dominant Religious Force in the Western World in a Few Centuries'(어떻게 이름도 없었던 변방의 예수 운동이 몇 세기 만에 서구 세계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는가?)
저자가 여기서 들은 예가 하나 있습니다. 160년도에 '마르쿠스 알리오우스'가 로마 황제일 때의 일이었습니다. 전염병이 번질 때였습니다. 15년 동안 계속되었고, 로마 인구의 30% 가까이 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어요. 그때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을 해두었습니다. 당시에 기독교인들은 약 4만 천명 로마 인구의 0.1%도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알렉산드리아 주교, 디오니시우스'가 남긴 글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형제 중 대부분은 끝없는 사랑과 성실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다른 이들을 생각하였다.
큰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도맡아 온갖 필요를 돌보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섬기다가 때로는 저들과 함께
평온한 행복을 바라며 이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이웃의 병환을 짊어지고 기꺼이 그 고통을 끌어안다 자기들까지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형제가 그처럼 다른 이들을 간호하고 치료하다 환자들을 따라 죽거나
그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참으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전염병이 번지게 되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뭐죠? 격리하고 분리시키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생명을 보존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스도인들이 한 일은 한 사람이 감염되게 되면, 건강한 사람들이 가서 그를 돌아봅니다. 그도 감염이 되면 함께 이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겼던 사람들. 처음에는 우습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과연 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십자가의 복음. 십자가를 간직한 그 사랑이 사회를 바꾸고 로마를 바꾸게 된 것입니다.당시에 '유세비우스'라는 학자가 사람들이 감염되면, 어떻게 했는지를 잘 소개한 글이 있습니다. 먼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리, 구분하는 일이고.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은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멀리 피신시키는 일. 역사가가 기록을 안 했더라도 이것이 상식 아니겠어요? 이런 상식을 뒤엎고 하늘의 사랑을 보였을 때 그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복음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번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을 차별이 아니라, 넘치는 사랑으로 대하는지 한번 깊이 돌아보기 원합니다.
이번에 선교대회를 하면서 참으로 귀한 젊은 이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호스킨 목사님의 아들. 그분도 목사가 되어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데 뉴욕시에서 푸드 트럭을 가지고,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누며 섬기면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뉴욕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을까요? 많은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던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잠시 쉼을 주시는가보다 처음에는 조금 쉬리라고 생각했는데 1세기 때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나타난 거예요. 오히려 팬데믹이 심하고 더 어려울 때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리라 생각하고 사역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며 섬기는 사역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시대도 그렇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무엇으로 성경을 읽을까요? 그들은 종이로 된 성경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있습니다. 갈라이다서 5:6,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무할례는 그들에게 정체성을 세우는 중요한 지표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무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랑이 중요하다. 우리 교회는 차별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이 사랑으로 사람을 품는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다니는 성도 중에서는 참 많은 아픔을 가지고 온 분들이 계세요. 다양한 아픔을 가지고 내가 교회 오는 것도 조심스럽게 오는 분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분들도 교회를 적잖이 오십니다. 그때 정말 하늘의 사랑과 배려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모습입니다.
"차별하지 말라"에 대해 2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내 속에 예수의 복음이 있다면 차별하지 말라. 예수의 사랑이 있는가? 차별을 넘어서 오히려 가장 연약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향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라. 누가 이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3. 긍휼을 가진 사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긍휼을 가진 사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을 가진 사람. 성경 모든 글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긍휼'이라는 말이 될 겁니다. 아픔을 함께 아파한다는 것.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을 향해서 보여주시는 그 마음. 그 마음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꼽으라면 '긍휼', '스플랑크나' 입니다. 죄인을 향해서 화내지 아니하시고 분노하고 심판하지 아니하고 예수의 눈에 눈물을 맺게 하는 그 단어. 긍휼이라는 단어. 오늘 야고보가 하는 말씀을 들어보시겠어요?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심판을 이기는 것'이 '긍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누가 그 심판을 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자비에 강물을 맛본 사람만이 심판대에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긍휼을 품고 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긍휼을 입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 앞에 긍휼함을 받은 사람이라야 그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아파하며, 눈물로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캐나다 토론토에 부흥회를 갔을 때입니다. 토론토 근교에 보면 장애인 공동체가 있어요. 제가 방문했을 때 어떤 아이는 괴성을 지르며 뛰어 다니고 있고 그런 모습을 볼 때 선뜻 가까이 가기가 좀 부담스러웠던 아이들도 많이 있었어요.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헨리 나우웬 교수님이 그곳에서 마지막 삶은 보낸 곳이기 때문입니다. 1971년도에 예일대의 교수로 있다가 1981년도부터는 하버드 교수로 섬기다가 1986년이 되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라르쉬 데이버'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삶을 예수님을 따라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마지막 인생을 다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 헨리 나우웬이 긍휼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긍휼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 입기 쉬운 자들과 함께 상처 입기 쉬운 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긍휼한 마음. 헨리 나우웬은 말을 하고 글을 쓴 것 만 아니라 그의 삶으로 긍휼히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마음. 예수님께서 손과 발로 살아내신 그 삶. 긍휼한 삶입니다. 불신자들이 읽는 성경. 이러한 긍휼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를 통해서 우리는 긍휼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듣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신학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칠 때였습니다. 한 학생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담을 하는데,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쭉~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잘 들었는데 서서히 인내심의 한계가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이것을 꼭 실천하고, 훈련하고 찾아오라. 그래야 자네도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다음에 찾아왔길래 물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사랑의 마음이 바닥이 난 거예요. 제가 차갑게 마지막 부탁을 했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제가 당부한 것들을 실천하고 오시고, 만일 실천하지 않는다면 할 때까지 찾아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 일 이후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어떻게 내 사랑이 이것 뿐이 안된단 말인가?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절실한 친구인데..'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났어요. 강원도 아주 산골에서 몇 교회가 모여서 교사들 연합 부흥회를 한다고 해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 데 반갑게 다가오는 한 형제가 있어요. 예전에 헤어졌던 그 형제였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는데, 종이 한 장을 내밀어 보이는데 예전에 설교수업을 들으면서 코멘트를 달아 주었던 평가지(?)였습니다. "설교하러 올라갈 때마다 교수님이 써주신 코멘트를 읽고 올라갑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전도사님, 설교할 때 진지한 모습이 좋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정성스레 읽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 참 훌륭한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이 코멘트는 칭찬할 게 정말 없을 때 쓰는 말이에요. "목사님 제가 제 자신을 압니다. 감히 강단에 올라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이 코멘트를 읽고 용기를 내어 올라갑니다." 제 긍휼을 너무나 쉽게 바닥을 드러냈는데, 그래서 아파했는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끝까지 지켜주셨고 그 큰 사랑으로 그날까지 인도해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존재였어요. 죄인 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원수 된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부담스러웠던 우리.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죠? 하늘을 버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우리를 사랑하시어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주신 우리의 주님. 너무나 긍휼이 풍성하셨기에 그렇게도 배신하고 쫓아간 이들을 끝까지 찾아오셔서 자비하신 손길로 우리를 안아주신 주님. 우리는 주님을 멀리하고 도망갈 때 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시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해 찾아오신 주님의 끝없는 사랑. 긍휼 때문에 우리가 오늘 주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그 영원한 생명을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머리도 감히 들 수 없어 아파하는 데, 우리 주님을 우리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나의 형상을 따라 만든 소중한 사람이란다. 내가 너를 기뻐하고, 내가 너를 사랑스러워한단다." 이 사랑, 이 긍휼을 받은 사람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차별하지 말라.긍휼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라. 지극한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라." 그 사랑으로 바라보면,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겁니다.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초라한 나 자신이라도 내 자신도 주님 앞에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으로 살아가게 될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은 하늘의 기쁨으로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다 같이 일어나셔서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우리의 고백으로 찬양하기 원합니다. "모습은 달라도,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입니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따스함으로 보듬어 가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통해서 계획하신 그 일을 부족한 입술로 다 찬양할 수 없지만 우릴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실 위대한 일, 역사를 기대합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주님에게 참 부담스러웠던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오늘도 호흡하고 주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도 십자가를 지시고, 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월 지나가고 나면 언젠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 조금이라도 우리 마음속에 불편하게 여겨졌던 것 그분들이 떠오르면서 아픔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 우리 가정에 이 사랑과 긍휼함이 넘치게 하소서. 우리 주변의 상처 입은 자, 흐르는 눈물을 닦게 하시고, 상처를 싸매며 아파하는 형제자매들을 세워가는 것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게 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내게 하시고 주님 우리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게 하는 살아 움직이는 성경이 되게 하옵소서. 한목소리로 기도합니다."
"차별하지 말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라. 우리가 그 주님의 긍휼을 받았고, 우리가 그 사랑을 입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정에 긍휼한 마음, 사랑이 넘치게 하시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이 하늘의 긍휼이 넘쳐흘러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통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간곡히 부탁드리오니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 그 크신 긍휼로 우리를 안으실 주님. 우리가 땅 위에서도 그렇게 살다가 주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 그 크신 사랑과 긍휼로 다가오신 우리 주님. 주님께 참 고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하심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긍휼을 부으시고 우리에게 따스한 사랑으로 다가오신 주님 그렇게 살아내기를 결단하며, 살아냄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성경이 되기를 열망하는 주의 모든 백성들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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