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응렬 목사, 야고보서 2장 14-26절, 살아있는 믿음 5, 살아있는 믿음은 삶으로 증명합니다, 야고보서 강해,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살아있는 믿음은 삶으로 증명합니다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류응렬 목사 -
오늘 말씀은, 야고보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가장 논란이 되며, 신학적으로도 가장 혼란스러운 말씀입니다. 24절 말씀 때문입니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다시 말하면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 이 말씀은 평소에 우리가 배우는 것과 전혀 다른 말씀이지요.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라고 배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틴 루터는 매우 부담스럽게 여겼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사도 바울을 보아도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이라는 말씀 하나 가지고 생명을 걸고, 종교 개혁을 일으켰는데 오늘의 말씀을 통해 야고보 사도는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는 느낌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도, 갈라디아서를 읽어도, 에베소서를 읽어도 어떤 바울 서신을 읽어도 믿음으로 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가리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고 독일어 성경을 번역할 때 야고보서를 맨 마지막에 붙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말씀.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야고보가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요? 야고보서의 말씀을 잘 이해하게 되면 정말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의 정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말씀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행위, 선행에 대해서 잘 못 생각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선행이 충분해야 구원 얻는다. 선행이 우리의 악한 일보다 더 많을 때..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라고 물으면 대 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마도 천국이 있다면, 선행이 많을 때 가지 않을까요? 내가 나쁜 일보다는 착한 일을 더 많이 할 때 천국가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비교적 선하게 살 때 천국에 가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게 아니고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생각은? 믿음뿐 아니라 선행이 따라야 구원 얻는다. 믿음+선행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구원의 마지막 결정은? 우리의 선행이 있어야 된다는 잘 못된 생각입니다.
세 번째, 잘못된 생각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선행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끝까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선행이 뒤 따라야 한다. 영어로 이것을 표현하면, 'saved by grace' 은혜로 구원을 받고, and keeping it by obeedience.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닌가? 선행으로 구원을 얻든, 선행과 믿음으로 구원을 얻든,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선행으로 유지를 하든..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 세 가지 모두가 마지막 마침표는 하나님이 찍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행. 우리의 열심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 공통점이 모두 잘 못되었다고 말한다면 정말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일까? 성경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는 왜? 이렇게 선행,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고보가 이 말씀을 쓰고 있는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예수님을 믿었던 유대인들입니다. 이전에 그들은 모두가 다 유대교였던 사람들. 유대교의 구원관이 어떻습니까? '아브라함 피 혈통을 이어받는 사람들' 또 하나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율법 지키는 사람들.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지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죠? "천국에 가는 길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사도 바울도 "천하에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라고 하지요. 오직 예수 이름만 강조하다 보니까 이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 삶을 약화시킬 가능 성이 있었지요? 그들을 향해서 야고보가 정말 신앙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다시금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맴도는 관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복음을 체계적으로 아는 것.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잘 못된 믿음의 예를 하나 들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지적인 믿음, 관념적인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에 대해서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합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죠?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과 구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대신 피 흘리시고 죄 용서함을 주셨다."라는 나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성도들은 믿고 있어요.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분을 내 속에 주인으로 받아들여서 성령이 내 속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삶의 패턴이 달라지고,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주인을 모시기 때문입니다.
( 구원자, 주인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예화)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는 것.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그리고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 나의 주님으로 모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를 고백하게 되고, 주님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예수님을 닮아 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는 순간 그분처럼 살려는 행위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야고보는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24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2:24,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이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사람이 믿음에 뿌리내린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단순히 착하게 살고, 좋은 행실과 같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뿌리내린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만은 구원을 얻을 수 없느니라.' 왜 그렇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으로만 구원을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진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이것을 뿌리와 열매와 같은 의미입니다. 뿌리가 살아있으면, 당연히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 야고보는 믿음과 행동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읽어보면 거짓 믿음. 죽은 믿음과 살아있는 믿음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열매가 없고 행함이 없음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요. 살아있는 믿음은, 반드시 열매가 있기 때문에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두 가지로 우리에게 믿음과 삶에 대해서 잘 정리를 해주고 있습니다.
1. 행함이 없으면 믿음도 없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도 없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 자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고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가 지금 공격하는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 죽은 믿음. 종교적인 관념을 가지고 공격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죽은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가요? 야고보가 예를 하나 들어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15-16,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라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오늘 야고보가 예를 들고 있는 것은 굉장히 실질적인 부분입니다. 복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실천적이고, 실제적이고, 삶 속에 나타나는 것. 그게 진짜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정성진 목사님'이 쓰신 '행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믿음과 행함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말씀이 실천되지 못하고 곰팡이 피는 서제에 갇히거나 책상 위에 머물 때 일어난다. 한국교회만큼 성경 열심히 읽고, 성경통독, 성경필사를 한 나라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공부만으로는 결국에는 지식 쌓기, 사변 놀음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에 부족하다. 우리의 신앙이 사무실, 책상 위, 예배당을 넘어서 일상의 삶 속으로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방법이요.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나라를 확장하는 우리의 사명이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 뿌리에 근거한 열매로써 세상에 드러내라는 말씀. 그것이 개인이 삶뿐만 아니라 이 시대 교회의 사명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그렇게 행위를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땠을까요? 그토록 믿음을 강조했던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기 기억함이니
지금 데살로니가교회를 칭찬하면서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 하지 않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역사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신앙,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선한 행위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데살로니가교회가 아름답게 열매를, 믿음의 행동을 나타내는지 그들의 삶을 두고 바울이 한 말이에요. "내가 너희들의 믿음이 각 처에 소문이 났기 때문에 내가 할 말이 없노라."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이 시대에도 누군가가 "여러분들의 믿음이 아름다운 향기로 온 지역에 다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가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세상 속에서 이런 멋진 칭송을 받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가기를 축복합니다.
2. 보이지 않는 믿음은 보이는 삶으로 증명된다.
두 번째로, 보이지 않는 믿음은 보이는 삶으로 증명이 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는 삶을 통해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행함으로 내 믿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서 바울과 야고보의 행함에 대해서 비교해 볼 수 있어요. 바울이 행함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구원받기 전의 행함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행함이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우리의 행함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행함이라는 것은 더러운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구원받고 난 다음의 행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정말 뿌리가 예수로 바뀌었다면, 당연히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이 믿음 있는 사람. 행함을 강조하면서 두 사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자 영적 아버지 아브라함과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던 기생 라합. 아브라함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죠? 야고보서 2:21-22,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 여러분 누가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해서 자식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 엄청난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증명했다고 합니다. 그의 행함을 보면, 절대로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내려갔을 때 기근이 일어나자 하나님께 한번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애굽 땅으로 들어갑니다. 반드시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첩 하갈을 취했던 아브라함. 자신의 아내를 신변 보호를 위해서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였던 사람. 이처럼 아브라함의 행위는 모두가 부족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이 마침내 아브라함을 빚어가서 믿음의 명장이 되게 했죠. 아브라함이 마침내 자식까지도 바치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7, 19.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칠 수 있는 근간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도 마찬가지였어요. 라합의 삶을 보시겠어요? 야고보서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역시 기생 라합도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만났을 때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상천하지의 하나님이라',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이라. 우리가 그 소식을 듣고서는 간담이 녹아내렸습니다.' 그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 주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라합도 뛰어난 행위를 했지만, 그 배경에 믿음이 만들어 낸 행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행실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던 믿음의 사람.
전도하기 참으로 어렵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말로만 전도하지 않았으면 해요. 사람들은 너무 말을 듣는 것을 피곤해하고, 힘들어합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그 삶으로 어두워져 가는 세상 속에서 빛 된 삶으로 섬기는 삶으로, 감히 할 수 없는 사랑과 희생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도저히 행위로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을 때에는 말씀으로라도 해서 복음을 전해 보기 원합니다. 세상이 기다리는 것이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 아닐까요?
앤드류 카네기의 명언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에는 관심이 줄어든다. 다만 그들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다(As I grow older, I pay less attemntion to what men say. I just watch what they do.)" 말이 아니라, 행동이 정말 그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동적인 실화. 이차 세계 대전 때의 일입니다. 1943년 1월 20일 뉴욕항구에서 904명의 병사들을 싣고 배가 출항했습니다. 항해한 지 12일째, 2월 3일 도체스터 호가 독일 잠수함의 어뢰에 맞게 됩니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병사들이 물에 하나 둘 빠져 들었습니다. 죽음 그 순간에도 병사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누어 준 사람들이 있었어요. 네 명의 군목이었습니다. 그중에서 '클라크 중위'가 한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기독교인인가?"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구명조끼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죽어도 하나님 앞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네, 자네는 어찌하든지 살아남아서 꼭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서 만나기를 바라네." 네 명의 군목은 모두가 자신들이 입고 있었던 구명조끼를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기울어져가는 갑판 위에서 "네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찬송을 부르면서 물아래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병사 904명 가운데 605명 모두가 전사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네 명의 군목들을 희생을 기억합니다. 이 네 분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기념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필라델피아 시에서는 이 네 명의 목사님을 위해서 기념관도 세웠고, 기념우표도 발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기꺼이 부하 병사들을 위해서 준 네 명의 목회자들. 영원한 천국을 믿었기에, 영원한 생명을 믿었기에 그 믿음이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드리는 헌신의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만들어내는 실제적인 삶.
오늘 우리는 믿음과 행위.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본문이자 신학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많은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바울과 야고보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나아간다는 것. 한쪽은 믿음을 강조했고, 한쪽은 행위를 강조했지만 똑같이 함께 나아가야 균형 잡힌 진정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저 일하면, 이렇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만들어 낸다.' 크리스천의 선한 행동은 믿음이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만일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그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두고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의 해석을 보면, 루터 역시 행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살아있고 아주 활동적인, 힘 있는 믿음이다. 끊임없이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 선행을 해야 할지 말지 묻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이 나오기 전에 선을 행했고, 계속 행하고 있다. 반면 그런 선행을 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 믿지 않는 사람이다."
야고보가 하는 말을 루터가 로마서 말씀을 주석하면서 똑같이 하는 거 아니겠어요? 사실 루터 자신이 믿은 바대로 삶으로, 행동으로 옮겼던 사람입니다. 당시에 가톨릭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 '이신칭의'가 옳다는 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어요. 1517년도 10월 31일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4년이 지났습니다. 루터는 1521년 4월 17일 보름스 회의에 잡혀 가 로마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책을 네가 썼는가?" "네!", "네 사상을 취소할 생각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것, 취소할 생각이 있느냐?" 그러자 루터는 "하루 동안 생각할 시간을 달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4월 18일 다시금 황제 앞에서 했던 유명한 말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내 양심의 반하는 행동은 지혜로운 것도 아니며,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저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도우소서 주여. 아멘." 그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었고, 그 믿음대로 생명을 걸고 행위로 옮긴 사람이었습니다. 믿음대로 살아가는 삶. 믿음이 낳는 아름다운 열매.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정말 보이는 한 분이 계시지요? 예수님이요.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 땅에 오신 분.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오른뺨을 때리면 왼 뺨도 내어주라고. 겉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을 며칠 앞두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뭐죠? 먼지 나는 제자들의 발에 꿇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십시오. 그러나 내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로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렸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기다리는 골고다를 향해 뚜벅뚜벅 걸으신 예수님. 당신의 손과 발에 대 못이 박힐 때 천군천사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옆구리에 창으로 찔려 피를 쏟을 때 하늘의 병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묵묵하게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 하나 가지고, 우리를 향한 그 사랑 하나 가지고, 마지막까지 사랑을 보여 주신 예수님...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어볼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는 죄인이었고, 이런 죄인을 사랑하셔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셨고,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시 물어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정말 믿는 믿음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오늘 그 답을 야고보가 우리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행실로 내 믿음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 살아 있는 믿음을, 내 선한 행실.. 사람들이 섬기는 나의 사랑. 이를 위해 기꺼이 내 자신을 드리는 희생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 그것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참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희미한 그림자라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그 선한 삶이 한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선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믿음대로 살아낸 삶. 그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들고, 어두워져 가는 세상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생명을 살려내는 이런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제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다 같이 일어나셔서 함께 찬양하기 원합니다. 보여지는 예배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노래하는 찬양이 아니라, 삶으로 고백되어지는 예배. 주님 저를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향한 예배.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나의 모든 삶. 내 모든 뜻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어볼 것입니다. "당신이 믿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이 위대한 고백. 영원한 생명을 만드는 고백은, 하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다시금 물어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안 길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이 야고보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가정에서 남편 아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을 대하는 자세가 새로워지게 하소서. 믿지 않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 주님, 우리가 말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전도의 통로가 될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해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살아있는 신앙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소서. 함께 기도합니다."
기도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우리를 향한 절대적인 사랑으로 생명을 바침으로 증명해 주신 우리 주님, 이 위대한 믿음을 저희가 선물로 받았으니 한 사람도 값싼 믿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거룩한 감격과 설렘으로 눈 뜨게 하시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 말뿐이 아니라 진실한 행동, 참된 사랑. 나를 기꺼이 드리는 희생적 사랑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이고,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게 하소서. 저희가 이렇게 살아있는 믿음을 회복하게 하시어 점점 더 어두워져 가는 세상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삶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하심이 나를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선물로 주신 믿음에 합당하게, 믿음에 걸맞게, 진실로 삶이 있는, 품격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기를 결단하는 이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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