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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새벽기도 I 출애굽기 21:12-27

by №1★↑♥ 2021. 9. 16.

  출애굽기 20-23장의 9절까지는 '언약의 책'이라고 합니다. 이 언약은 법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부분의 시작 부분인 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도덕적, 윤리적 율법 규정이 시작되는 21장 1절에서는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라고 함으로써 전체의 단락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율법을 이해할 때 몇 가지 주의해야 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이 율법이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모든 율법의 규정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가? 우리는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이라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가 반영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그 율법에 의미를 발견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많은 학자들이 고대 근동지역에서 발견되고, 발전되었던 법조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율법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서로 비교 연구할 수 있는 그 당시의 법조문이 7개 정도 되는데, 학자들의 주장대로 실제로 그 법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이다라는 것을 반대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강화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의 문화 속에서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하나님 나라의 율법을 세워가시는 데 각기 자신의 공동체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세워진 규례들은 그 목적 때문에 서로의 공통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도 동일한 것을 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율법의 법조문들을 하나님 안에서 이해하게 될 때에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창조질서가 하나님에 의해서 율법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사형 형벌에 내릴 수 있는 범죄입니다. 

 

  율법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또한 주의해야 할 또 다른 점은, 항상 이 율법이 출애굽의 구원과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네러티브의 맥락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금 이 율법이 누구에게 주어졌느냐? 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 율법을 받은 사람들은 모세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었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백성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수여받는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법은 분명하게 가나안 땅에서 거주하게 될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3장 후반부에 가면 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출애굽 1세대가 민수기 14장에서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함으로 두 명을 제외한 모든 1세대가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에는 아직 그 사건이 벌어지지 않은 그 이전의 사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내러티브의 흐름 안에서 이 율법이 당시의 공동체 안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오늘의 성경 해석에 1차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번째, 독자는 모세가 오경을 글로 쓰는 시점, 여호와의 말씀을 글로 받아보았던 출애굽 2세대 백성들입니다. 율법은 가나안 땅에서의 정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그 성품은 가나안 땅에 정착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행동 가운데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중심으로 율법을 살펴보아야 하고, 오늘날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핵심적인 단어가 몇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12절의 '쳐 죽인 자'라고 했을 때, 누군가를 치다는 동사입니다. 이 동사가 오늘의 본문을 12-27절까지를 하나의 문단으로 묶어 줍니다. 12절에서 보시면 '사람을 치는 자', 15절, '자기 부모를 치는 자', 18절, '쳤으나' 20절, '남종 여종을 쳐서' 26절 '한 눈을 쳐서' 이렇게 '치다'라는 동사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2절과 27절에도 '쳐서'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원어상으로는 다른 단어입니다. 물론 단어가 달라도 문맥이 같습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쳐서 상해를 입힌 경우에 대해서 판결하는 규례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치다'는 단어는 출애굽기 3장 20절에서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할 때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열가지 재앙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치셨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경험해서 알고 있습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을 치는 행위가 가지고 있는 그 무게. 파괴성에 대해서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2-17절까지는, 첫 번째 단락으로써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문장이 반복됩니다. 사람을 '치다'라는 파괴적인 형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 가지의 경우를 다루고 있는데 첫 번째는 12-14절, '사람을 고의로 쳐서 죽였을 때' 두 번째와 네 번째에 '자기 부모를 치거나, 저주한 자에게', 세 번째는 '사람을 납치한 경우'를 말합니다. 민수기 35장 16-34절을 보시면, 이 본문과 관련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민순기의 본문 34절을 보면, 살인을 왜 금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십계명의 여섯번째 계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되어 있는 살인에 대한 규정은, 살인으로 인하여 흘린 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땅을 더럽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너희가 거주하는 땅'은 누가 거주하는 땅이라는 것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거주하는 땅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누군가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쳐서 피를 흘려 죽게 되었을 때에 그 피는 그들이 거주하는 땅을 더럽힙니다.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지만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거주하시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여호와께서 거주하시는 땅을 오염시킵니다. 범죄함이 땅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남자와 여자가 범죄함으로써 저주를 받게 된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거주하시는 것에 대한 개념은, 성경에서 점점 더 확장됩니다. 출애굽기에서 성막을 지었을 때에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사도 바울은 기록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피가 하나님이 거주하는 땅을 더럽힌다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이해할 때에 우리는 레위기에서 대속죄일에 피를 뿌림으로 성막과 지성소를 정결하게 하게 하고, 성전인 지성소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 속죄의 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17장에 의하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이 피에 있음으로 이 피가 죄를 속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인, 누군가를 파괴적으로다가 쳐 죽이는 행위를 여호와께서는 강력하게 금지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 되시며 그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존중하신다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존중하신다는 이 문장은 성경을 볼 때에 그 문장 자체로 약간의 모순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과 반드시 죽일지라는 명령이 서로 대립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편에서만 모순이지 하나님의 그 성품 자체에는 모순이 잃어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 존중에 대한 성품이 더욱 강조됩니다. 율법이 온전하고 정당하게 지켜지기만 한다면 사형당할 일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인간의 불순종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존중하신다면 우리도 그 하나님의 성품을 그 행동 속에 반영하여서 생명을 존중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고의로 쳐서 죽이는 행위의 책임과 무게.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이 율법이 강조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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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문단, 18-27절은 조금 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쳐서 피해를 입혔을 때에 그것에 대한 보상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몇 가지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2절에 기록되었듯이 이러한 상황들은, 재판이 전제됩니다. 재판에는 여러 가지 판례를 따라 판결이 내려지지만 이전의 무엇보다 구체적인 기준이 필요합니다. 피혜를 입혔다면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그 기준에 대해서 23-25절은 동해 복습법, 동형 복습법이라는 규정이 주어집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어! 그래, 누가 나의 눈을 빼면 나도 저 사람의 눈을 정당하게 요구해야 된단 말이지?' 이런 식으로 복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동해 복습법은 복수를 허락하는 규정이라고 하기에는 야박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있어서 누가 내 눈 하나를 빼면, 눈 하나를 빼는 것으로 인간은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대 맞으면 몇 배로 갚아줘도 속 시원하지 않지 않습니까? 동해 복습법은 이러한 것을 금지하는 법입니다. 이런 식으로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수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법을 통해서 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런 본문의 내용을 확장시키십니다. 바리새인들과 보수적인 유대인들의 잘못 해석된 율법을 바로 잡으시면서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만 품어도 살인하는 것이라며.. ' 이 율법을 제한하고 있는 바운더리를 확장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그것을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것을 약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누군가를 쳐서 피를 흘림으로써, 그 땅이 더럽혀지는 것을 금지시키십니다. 복수가 율법의 원리가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나의 생명처럼 아끼는 것이 이 율법의 원리입니다. 사실상 오늘날, 우리에게 또 이 당시의 많은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적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살인을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마도 생명의 하나님을 그 가운데서 발견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존중하신다면, 내가 만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존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도 하나님께는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나에게는 비록 원수 같은 자라 할 지라도 의도를 가지고 그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원수로 부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원수 된 나를 위해서 기꺼이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내가 거기까지 이르는 그날에 이르기를 간구하면서 주님 앞에서 가슴 치며 눈물 흘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 계시고, 거기까지 이끌어가실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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