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출애굽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법령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에 관심이 참 많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현대 문명에 살면서 젠틀한 무관심. 정도 이상으로 관심 갖는 것은 결례라고 생각하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있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앞집에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웃에 대한 관심이 참 많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22:1-15 새벽기도 설교문
높은뜻정의교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관심이 많으시답니다. 오늘 새벽에도 우리는 나 자신의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아뢰러 나오셨는지 모릅니다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에 관심이 있으시답니다. 어쩌면 우리의 바른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음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데에서 우리의 기도 응답이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내가 이웃에게 부당한 이웃을 취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 우리 자녀들이 잘 되게 하옵소서." 라 구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실까요? "그전에 억울함을 끼치고 있는 일부터 중단하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우리의 기도와 삶은 대단히 밀접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 하나님의 법령은 대단히 정의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가 상반된 개념 같은데, 하나님의 법령에서는 사랑과 정의가 이렇게 잘 공존할 수 있구나! 를 성경 어디서보다 잘 드러나는 것 같아 귀하게 생각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법에도 적용이 가능한데요. 우리 사회에 재정된 법들 중에 과연 이웃 사랑의 정신이 얼마나 깃들어 있는가? 하는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기에 이웃사랑에 대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는 법은, 재고해봐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더 세밀하게 적용을 해본다면.. 교회 공동체에서도 우리는 우리 부서만 위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내가 섬기는 부서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 부서가 이렇게 했을 때 좋지만 다른 부서가 피해가 있다면 중단하고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지 않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앞선 21장에서는 종에 대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법을 보았다면 오늘의 22장에서는 배상에 대한 법입니다. 이것 또한 이웃사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본문의 등장하는 법들은 이미 공동체 내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왔던 관습을 성문화 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첫번째 등장하는 배상법은, 도둑과 도둑질입니다. 도둑질의 공통점은 부유한 도둑은 없습니다. 물론 사기나 횡령 같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도둑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레미제라블의 등장하는 장발장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요? 조카가 굶어 죽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삼촌이 어디 있을까요? 이처럼 동기가 애처로운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도둑이 침입하는 것을 보고 정당방위로 죽이는 경우는 죄가 없지만, 대낮에 도두고가 맞닥뜨렸을 때, 그럴 때 도둑을 죽이면 살인죄가 적용됩니다. 도둑의 살 권리까지 존중해주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강조하는 부분은 도둑질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둑의 경우는 아무리 가난해도 배상을 해야 합니다. 심지어 도둑질의 피해를 받은 사람이 도둑을 용서했을 지라도 배상은 해야 했습니다. 이게 성경이 말해주는 배상법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도둑질을 아주 배타적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첫 고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누군가를 속여 빼앗은 적이 있다면 네 배나 갚겠습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충만해진 사람의 첫 고백이 이웃의 것에 대하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갚겠습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정신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도둑질을 아주 상충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도둑질을 대립하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의 도둑질에 대한 배상법은? 제 팔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의 확장입니다. 헌법의 법령입니다. 십계명을 자세히 보면, 육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칠 계명에 간음하지 말라. 팔 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 구계명에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육계명 이후에 관련된 건 십계명으로 수식이 됩니다.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이 뭐냐? 탐심.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6-9 계명은 다 탐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거든요? 탐심은 뭐냐? 골로새서 3:5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즉, 도둑질의 근본 뿌리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아닌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는 정신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 게 아니고, 물질이 돈이 나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생각이 있는 순간 우리는 얼마든지 내 이득을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도둑질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뿌리까지 파헤쳐서 본질을 말씀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도둑질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웃이 공경에 처해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정신. 그래서 내가 좀 훔쳐가도 정신은 이웃을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엔 나 자신도 위험에 빠트리는 사회적 자살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금하고 있는 것이지요. 단지 금령이 아니라, 하나님은 "얘들어 이렇게 너희가 살면 행복할 수가 없다. 내가 그렇게 귀한 생명을 너희에게 주었는데 이렇게 살아서는 자유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다. 그러라고 준 인생이 아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를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는 것을 조금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이지 법령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8절을 보면,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아주 적극적이지요? 내가 좀 부족해서 남의 것 훔치지 말고, 더 일해서 오히려 도와주어라.
그 다음으로 5-6절을 보면, 내가 기르는 소가 남의 포도밭에 가서 열매를 먹을 때가 있겠지요? 그럴 땐 배상을 해야 하는데 사람의 심리는 안 좋은 것으로 배상을 하고 싶고, 실제로 그랬나 봅니다. 성경은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고요. 소가 남의 포도밭에 들어가서 열매를 맺은 것과 불을 내가 지펴서 태운 경우를 나란히 배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소가 남의 밭을 밟고 들어간 것과 내가 피운 불이 남의 소유를 태운 것은 동일하게 짓밟다는 '바르'라는 동사가 쓰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지만, 남의 것을 짓밟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배상을 하도록 말씀하고 있는데요. 내가 나의 소유물을 소홀히 해서 나의 소유물이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 소유물이기에 나랑 관계만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내 소유가 이웃에게 미치는 그런 영향력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러한 부분까지도 살피고 있습니다. 아주 비근한 예로, 주차장에서 주차 잘못하면 자리가 있어도 다른 차들이 주차를 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내 소유가 내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나님은 그것까지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소유보다 존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인데, 성경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소유냐 관계냐? 소유보다 존재가 더 중요하고, 존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다. 성경은 관계까지 나아갑니다.
이어서 7절 이하부터 마지막 절까지 보면, 기탁자와 수탁자의 관계가 등장을 합니다. 즉, 우리가 살다보면 이웃 간에 물건을 잠시 맡길 수 있습니다. 이웃 간에 신뢰가 생기면 소유, 혹은 물건을 맡기는 일이 이때도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애매한 경우가 발생을 합니다. 7절에 보니까, 물건을 잠시 봐달라고 부탁을 해서 맡아 주었는데 그 물건이 도둑을 맞아 버렸습니다. 또, 9절에 보니까 주인 없는 물건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때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경우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길가다가 만 원짜리 한 장을 주었을 때 '아휴~ 이거 잃어버린 사람은 참 힘들겠다.'는 마음이 드십니까? 아니면, '수지맞았다' 그런 마음이십니까? 이에 대해서 본문이 일정하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8절에 보니까, '맡기잖아 맡은 자나 재판장 앞에서..'라고 했고, 9절의 분실물에 대해서도 '재판장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재판장' 옆에 1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을 것이고, 그 밑에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판장 앞에 나아가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11절에 누군가 자신의 가축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그 가축이 죽거나 없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맹세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당신이 나에게 맡긴거 내가 죽인 거 아닙니다." 하나님께 맹세하면 맡긴 사람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왜 이런 모든 미심쩍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성경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권하고 있을까요? 대개 우리는 거짓말하거나, 이웃의 것을 도적질 할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임재 속에서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고 하실 때에 우리는 이웃이 맡긴 물건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거든요?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 좋은 방법은 어두움을 향하여 '물러가라 물러가라'하는 게 아닙니다. 빛 가운데로 나아가면 어둠은 자동 적으로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혹, 이웃의 소유를 탐하는 어두운 마음 가운데 있다면 그럴수록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새벽예배로, 금요예배로, 주일로 모이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한 주 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듭니까? 그 가운데에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지 못한 것도 많은데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런 것들은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재판장 앞에 나오라.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로 나아가면 된다.
기독교 변증가이자 사상가인 C.S 루이스라는 사람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친구의 전도로 믿게 되었는데 하나님을 믿고 나서 뭐라고 했냐 하면? "하나님을 믿고 나니까, 마치 아침 해가 떠올랐을 때와 같이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라고 합니다. 빛 가운데로 오면 모가 긴지 아닌지? 뭐가 올바른지 아닌지 빛 가운데에서는 보이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혼탁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외롭습니까? 빛 가운데로 나아가십시오. 혼탁한 것들이 선명해질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웃의 소유에 대해서 탐하는 것이 마음에 있고, 내가 이웃에게 맡긴 것을 내가 잘못하지는 않았을까? 신뢰에 금이 가기도 하고, 주인 없는 물건인데 내가 갖는다고 해서 뭐 그리 잘못된 일인가? 마음이 모호해 질 때?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심판받은 것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그다음에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두번째로는, 왜 그 모든 소유권을 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것 내 것이기 이전에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우리는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소유로 인해서 지금 마음이 복잡하십니까?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농부들은 이걸 잘 알아요. 농부들은 자기들이 열심을 내고 비료를 준다고 해서 풍년이 자동적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게 원인과 결과로 당연하게 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불연속성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고, 빛을 주시지 않으면 농사는 아무리 수고해도 잘 될 수 없지 않습니까? 그 사실을 농부들은 잘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을 뿐입니다. 혹 나의 이웃이 잘 되었습니까? 성공했습니까? 그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시기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같이 축하하고 기뻐할 일입니다. 왜 저 사람은 많이 갖고 나는 없는가? 그걸 한탄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 나도 돌봐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소유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는 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 물질과 소유는 영적인 것이 아닌 것 같습니까? 돈은 영적인 것입니다. 왠 줄 아십니까? 그 물질과 소유를 사용한 결과가 남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소유는 여러분 사람에게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는 반드시 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내가 너희에게 준 물질은 어디에 썼느냐?"라는 질문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고 하나님은 그 물질의 주인이시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썼는지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너는 재판장 앞에 나가라' 했을 때 우리는 마지막 날에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재판장 앞에 나와라.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모든 상황 가운데 재판장에게 나아가라. 그리하면 빛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저희의 어두움은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는 하루 되시고 또 그 모든 어두움이 몰려가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앞을 환하게 비춰주시니 감사합니다. 새벽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고 돌아가는 길에 찬란하게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바라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재판장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 앞에 애매모호한 것, 근심과 그늘, 시기와 질투와 같은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게 하옵소서. 빛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선명하지 못하고 모호한 것들이 물러가고 빛이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는 우리가 될 있게 하옵소서.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는 재판장 앞에 나아갈 것이지만 오늘도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오늘도 진리의 말씀의 빛이 우리를 비춰주실 때에 모든 어두운 것들과 죄악 된 것들이 물러가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날 되도록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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