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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새벽 I 출애굽기 15:22-27

by №1★↑♥ 2021. 9. 15.

  오늘의 본문은 매우 짧은 내용이지만,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축약해서 요약해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광야에 빗대어서 이야기하기도 하는데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는지에 대해서도 잘 보여주고 있고요. 또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모세는 또 어떻게 대응했는지.. 광야생활의 전부가 들어 있습니다. 

 

새벽 말씀, 출애굽기 15:22-27

  오늘의 본문 내용은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요, 그런 인생을 향하여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애굽 직후에 홍해를 건넌 직후의 짧은 이 본문이 앞으로 계속해서 이런 것이 반복될 것이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가 갈라지는 큰 기적을 체험한 직후에 밤새도록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아주 영적으로 고양된 상태에서 광야길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동화나 드라마처럼 오래오래  잘 살았을까요? 모름지기 인생은 항상 그다음이 더 중요한 법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형통하고, 좋을 때도 있는데 언제나 그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다음이 더 좋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3일 길을 건넜지만 마실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실 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단순히 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 이상으로 생존의 문제를 겪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바다를 가르고 건넌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을 경험한 이후에 그다음에 직면한 문제는 목숨이 위태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3일 길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3일이라는 길이가 사람에게 인내의 한계를 느끼는 그런 시간이라고 합니다. 객지 생활을 하게 되면, 3개월째가 제일 힘들다고 합니다. 집 생각이 제일 많이 나고 외로움이 가장 많이 엄습해도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직장을 옮기면 3년 차가 되면, 1-2년 차와는 다른 한계를 느끼게 되는 시점이 3년 차입니다. 그러니까 3일, 3개월, 3년. 삼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인간으로서 한계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뜻하지요. 

  자, 그러면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감격을 안고 들어간 광야라는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광야는요? 그야 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의지하고 기댈 곳이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인간의 기술과 문명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처절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보니 하나님만을 간절히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런 광야 길을 3일간 걸은 끝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큰 구원을 경험하고 나서 광야에 들어가자마자 보여주는 모습은, 원망과 불평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만의 모습일까요?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만, 주일이 지난 다음 바로 월요일에 우리는 월요일 원망하고 불평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린 바로 직후 주차장에서부터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곤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서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어떤 불평에 대해서는 듣고 해결해주시고, 어떤 불평은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은 어떤 것이고? 들어주시기보다는 징계하시는 불평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에서 비롯된 불평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생존과 직결됨으로 인한 불평에 대해서는 징계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그 불평을 해결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불평의 패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수르 광야를 지나서 3일간은 불평하지 않았어요. 목마름을 잘 견뎌냈습니다. 목마름의 한계의 시점에서 드디어 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너무나 써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는 물이었습니다. '마라'라는 것이 '쓰다'라는 의미입니다. 물이긴 물이지만 마실 수 없는 물을 만나자 원망이 폭발합니다. 그러자 이제 모세가 어찌할바를 몰라서 홍해를 만나서 부르짖어 기도했듯이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한 나무를 보여주시고, 그 나무의 가지를 꺾어서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마실만한 물이 되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뭐냐? 광야에는 늘~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길에도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말씀은 무엇이냐?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도 항상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움도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도 있습니다. 이 간단한 진리가 계속 반복됩니다. 

  남미의 숲에 아주 위험한 독사 한 마리가 사는 숲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 물리면 수시간 내에 죽게 될 만큼 맹독을 지닌 독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숲에는 그 뱀의 독을 해독해 줄 약초가 산다고 합니다. 독사도 있지만,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 숲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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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 불평과 원망이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들으시고 해결해주시는 일들은 주로 출애굽기에 나오고, 들어주시지 않는 불평과 원망은 주로 민수기에 나옵니다.  들어주시지 않는 불평과 원망은 뭐냐? 욕심과 불신 때문에 하는 원망입니다. 생존과 직결되어서 불평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죄로 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욕심 때문에 불평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어서 불평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냥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교훈하시고 징계하시고 심판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습니까? 생존과 직결되는 것으로 인해 원망하고 있습니까? 욥이 불평불만 되게 많이 합니다. 아파서 지르는 비명 같은 것. 그걸 하나님이 뭐라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욕심 때문에 하는 불평은, 호락호락 듣지 않습니다. 하나니을 신뢰하지 안아서 하는 불평불만은 하나님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시고, 훈련하시며 욕망을 씻어주시고,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여정을 걷게 하시지.. 문제를 빨리 고쳐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원망과 불평이 있다면.. "하나님 제가 생존에 직결된 부분으로 인하여 원망하고 있나요? 아니면, 제가 지금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까?" 한번 우리의 내면을 말씀에 비추어서 분별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만일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로 인하여 불평과 원망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조금 더 깊이 간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반면 우리 안에 헛된 욕심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고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실 때, 우리는 기도의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욕심을 따라 구한 것을 이루어주시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이러한 욕심이 있습니다. 이러한 욕심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하나님 이 욕심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내가 욕심이 잘 내려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방향을 잡는 것이 좋은 기도이고,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조금 더 길을 가봤습니다.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마라라는 쓴물을 단 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무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또 보니 물샘 12과 종려나무가 있는 오아시스인 엘림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 이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라와 엘림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라와 같은 샘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마실 수 없는 쓴 물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요. 조금 더 가면 엘림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어려움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조금 더 가보니까 엘림이 나왔어요. 시련의 기간은 계속될 것 같지만 언제나 지나가게 됩니다. 가만히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때가 있었지요?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엘림이 나타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만족하고 기뻐하고 감사했겠지요?

  마치 사사기의 패턴이 떠 오릅니다. 이스라엘이 평안할 때는 자기 뜻대로 살다가 위기가 닥치면 하나님께 부르짖어요. 하나님이 사사를 구원해주시지요. 그러면 감사하게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또 평탄할 때는 하나님을 떠나서 방탄합니다. 이 순환을 계속하는 것이 사사기이거든요? 출애굽 광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라가 나타나면 불평합니다. 엘림이 나타나면 기뻐합니다. 이걸 계속 반복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리가 이렇게 신뢰하지 못하는 구나!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껴요.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신실하시고 신뢰할 만한 분이시구나! 이걸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한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커졌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죄송해하고 죄책함을 갖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더 감사한 것이 많아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율례와 법도를 주세요. 이스라엘이 지금 어떻게 광야 생활을 살지 다 아시거든요? "이스라엘아 너는 계속해서 어렵고 힘들면 불평할 거고, 또 내가 도우면 기뻐하고 감사할 텐데 그걸 왔다갔다 하면서 너희가 낙망할게 아니다." 그래서 율례와 법도를 주세요. 요약하면, '들으라, 지키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계시해주시는 당신의 모습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불평하는 너희들에게 나는 맞춤형으로 다가가 주겠다. 여러분 우리가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누구 덕분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광야를 안전하게 건너는 것보다 더 큰 것보다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 가게 되겠지요? 천국은 가는 곳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오늘 사는데,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을 뵈었을 때, 하나님이 낯설지 않은 것이지요. 그리고 가게 될 천국을 여기서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순간,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바로 천국이지요. 그래서 광야는 단지 광야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시는 순간,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순간이지요. 그러기에 힘들고 어려운 광야와 같은 인생길 간다고 했을 때 숨이 막히는 더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넉넉히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광야 한 복판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광야를 가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응하지는, 어떤 모습인지 도우시는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평과 불만이 정말 생존과 직결된 것인지? 아니면 내 욕심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으로 인한 불평과 불만인지 우리의 기도를 다시한번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우리가 되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참으로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모습을 보여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안에 원망과 불평이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이 새벽에 나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안에 원망과 불평을 살펴봐주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생존에 직결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면.. 우리의 불신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 것 같다고 불신하는 것 때문에 우리 안에 원망과 불평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해주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욕심을 바꾸어 주시고, 우리의 불신을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바꾸어 주시어 우리를 영원한 길로 인도해주옵소서. 하나님 우리는 지금 인생이라는 광야를 건너고 있습니다. 마라만 계속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다음에 엘림을 예비하고 계심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마라와 엘림은 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렵고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 그 인내의 한계에 다다라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는 분들이 있다면, 더욱 사랑하여 주시고 더 보살펴 주셔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오늘도 그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셔서 마라를 단물로 바꾸어 주시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결국 우리는 이 인생길 광야를 건너면서 더 하나님을 신뢰하게 도와주시고, 하나님께 감사를 더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늘 불평하다가 신실한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자괴감에 빠지곤 합니다. 하나님 전 안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모습처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저희가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시고,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께 달려가 안기게 하시고 하나님께 죄송할수록 감사한 것을 더 많이 생각하게 하시며 여전히 하나님과 더 친밀함을 누리며 살게 하여 주십시오. 그때 광야는 광야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엘림일 줄 믿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하나님의 친밀함을 경험하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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