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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새벽기도 I 출애굽기 21장12-27 설교 I 새벽설교

by №1★↑♥ 2021. 9. 18.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참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면 모든 희로애락도 모든 것은 역시 생명이 있어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혼자 있지는 않습니다. 공동체로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나 누군가와 함께 있습니다. 

출애굽기 21:12-27 새벽기도 설교문

 

높은뜻정의교회

  오늘 본문의 맥락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되, 나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12-17절 말씀은, 육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헌법에 대한 법령이라 할 수 있는데요. 오늘 보니까, 살인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비의도적인 살인. 그러니까, 의도하지 않았는데 일어난 살인이 있는가 하면 의도적인 살인도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법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고려하는 부분이지요. 13절에 보면, 의도적이지 않게 사람을 살인한 경우를 언급하고 있는데 가령 신명기 19장 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과 함께 벌목을 하러 산림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도끼질을 하던 중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나감으로 의도치 않게 이웃이 맞아 죽은 경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이 이런 경우에는 그 살인자의 생명도 보호를 했습니다. 도피성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의도적이지 않게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잠시 피신을 시킨 다음에 살인의 의도를 다시 검토하는 것이지요. 그럴 경우에도 괜찮다고 본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에 거하면서 반성을 하다고 나오도록 했는데요.

  반면 14절에 보면, 고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반드시 처단하도록 했습니다. 이 단락에서 많이 반복되는 구절이 '반드시 죽일지니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 단락이 살인 자체보다 의도적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더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갈 때 그냥 생각 없이 살아가서는 안되구요? 무엇을 하던 어떤 의도를 갖게 되거든요. 그러기에 선을 행하건, 죄악을 행하건 어떤 의도가 도사리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상해법에서도 그 의도를 대단히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말씀이 12절, 15절, 16절, 17절. 네번이나 반복되고 있는데, 성경은 중요한 말씀을 반복합니다. 이에 대해서 '게르스텐 베르그'라는 학자가 이런 사실을 주목합니다. 이 단락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잘못한 사람을 어떻게 죽일것인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누가 죽일 것인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즉, 이 본 단락은 사형의 명령이나 경고가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라, 범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경각심을 주는 게 일차적 목표다.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랬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갖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주된 관심은 누굴, 어떻게 죽여라가 아니에요. 이 만큼 생명이 중요하다. 그 경각심을 주는 것이 이 본문의 주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단락을 잘 읽었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은 생명을 이렇게 귀히 여기시는구나!라고 느끼셨다면 오늘의 말씀을 잘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19절의 말씀을 이어서 보시면, 이것은 언쟁을 하다가 상해를 입히는 경우에 대한 말씀입니다. 확실히 주먹이 오고 가기 전에는 대개 거친 말이 오고 가죠. 비판이 주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입니다. 본 단락의 말씀은, 선술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언약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시고 주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 간에 거친 말과 주먹이 있었기 때문에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부터 났느냐 다툼이 어디로 부터 나느냐' 이걸 물어봐요. 우리는 은혜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은헤 받은 사람들 안에서도 그런 다툼이 있었단 말입니다. 제가 잘 아는 어떤 목사님께서 교회 내에 갈등이 많았어요. 교회가 힘을 합쳐서 죄 된 부분과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데 교회 내에서 서로 싸우느라고 세상을 대항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많이 하시거든요. 고 한경직 목사님은 "교회는 싸우지만 않아도 부흥한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갈등이 있을 수 있고, 다툼이 있을 수 있는데 본 단락에 비추어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싸우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부분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걸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요 싸우기 위해서 싸우게 되요. 거기서 이제 한 발 물러서서 왜 싸우는데?를 물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흐름을 보면, 만일 싸움이 있을 때 누군가 다치게 되겠지요? 몸 뿐만 아니라 마음도 다치게 되는데 그 마지막은 반드시 치료로 끝나야 합니다. 흐름을 자세히 보면 항상 마무리는 치료해 주어야 한다로 끝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노라 하면 누군가와 다툴 수 있습니다.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 너희가 다툴 수 있다. 싸울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마무리는 생명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가서는 안되고 반드시 그 생명력을 키우는 것으로 마무리 해야 한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배상하도록 하라.' 배상으로 마무리를 하도록 해요. 또 완치하도록 해라. 

  26절, 종에 대해서도 '놓아 주어라' 반드시 그 싸움의 생명을 해하고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복시켜서 마무리하라고 말씀하시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 다음을 좀 내다볼 줄 알아야 해요. 우리가 어떤 갈등 상황에 봉착했습니까? 그걸 어떻게 잘 봉합해야 하는가? 그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성숙한 싸움입니다. 그냥 다투고 끝내버릴 생각으로 하면 그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구요. 특별히 은혜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다툼이 있다고 한다면 그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 할 수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죠. 그게 리더고, 신앙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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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우리는 십계명이라는 헌법 이후에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노예법이라는 것을 주목한 적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법은 약자들을 위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20-21절은 그와 같은 맥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합무라비 법전 등을 보면 만일 주인이 종을 죽이잖아요? 주인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주인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법에만 종을 보호하는 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역사서도 읽어보면 승자의 역사 아닙니까? 역사는 패자의 목소리가 없습니다. 역사를 누가 썼습니까? 승자는 자신의 행동을 다 정당화하는 거에요. 역사에는 승자 이면의 패자의 소리가 없습니다.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을 누가 만들겠습니까? 법을 전공도 안하고 공부도 안해본 사람이 만들겠습니까? 법을 전공한 사람들이 만들고 그래도 이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법을 만들거든요. 그래서 약자를 위한 법이 과연 얼마나 발달해 있는가? 저는 그것이 얼마나 법이 발달해 있는가?에 대한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현대법이 발전하고 있다면 얼마나 약자와 없는 자들을 위한 법이 발전해 있는가를 봐야해요. 권력자들이 법을 만들고 거기에 자본주의 논리까지 들어가면 돈과 권력만 있으면 사람을 죽여도 괜찮습니다. 돈을 써서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의 망을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습니다. 그런 법망은 아주 허술하고, 발달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법이 발달했다면 돈과 권력이 많더라도 법의 제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무엇보다도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 보호 받을 수 있는 법이 정말 발달한 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법이 얼마나 철저히 약자들을 위하고 있는가? 처음부터 등장하는 것이 종들을 위한 법이었으니까요.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종이 어딨냐?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귀히 여겨라' 아닙니까? 그게 하나님의 법 아닙니까? 그 법의 적용이 우리하고 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는 그렇게 약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있습니까? 약자들과 힘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습니까? 다음세대들은 단지 우리의 미래일 뿐 아니라, 약자들입니다. 그들을 보호하는 내규가 있습니까? 우리에게도 적용을 해볼 수 있는 그런 말씀입니다. 

 

  22-25절 말씀은, 그 유명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복습법에 관한 내용인데요. 대개의 경우 우리가 피해를 보면 그것을 앙갚음하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상대방이 한쪽눈 때리면 한쪽눈만 때립니까? 우리는 두짝다 때립니다. 보복은 항상은 배 이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멀쩡하게 있는 내가 해를 받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앙갚음을 할 때 사람은 절대 적게 갚지 않습니다. 그 필요 이상으로 갚거든요. 그런데 그 필요이상으로 악을 갚았을 때 돌아오는 보복은 더 큰 보복으로 돌아옵니다. 그러기에 인류의 역사는 어찌보면 보복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명칭은 거창하게 붙이지요.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다 복수입니다. 나라간에도 그렇고, 부족간에도 그렇고, 개인간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다가는 다 죽습니다. 그래서 동해복습법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인간적인 법인데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복수를 제한하는 법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보복의 강도를 제한하는 법이 동해복습법인 것인다. "한쪽 눈을 맞았냐? 한 쪽눈만 때려라." 보복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둘 다 산다. 이걸 제한하지 않으면 서로 복수하느라 결국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동해복습법은 보복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의 본문 말씀을 대하고나서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하나님이 참, 두려운 분이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라는 말씀이 반복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드셨습니까? 아니면, 역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마음이십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본 대로 구체적인 법령들은 표현은 부정적 경고로 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갈 수록 시대가 경쟁이 치열해지고 우리가 서로를 돌아보지 못하는 그런 풍토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남을 제치고 이겨야만 내가 살 수 있다. 이게 교육이라면 애들을 우리는 잘 못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친구들을 돌보는 아이들입니까? 아니면, 내가 살겠다고 친구를 다 적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잘 가르치고 있는지 돌아보셨으면 하고, 그렇게 남을 죽이면 남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도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되 특별히 오늘의 본문의 맥락은 서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고. 약한 자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열매는 나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것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닌다. 

  저는 오늘 생명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정적으로 보기보다는 동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생명이기보다는, 생명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은 흐름이거든요. 생명은 살아 있어서 멈춰있지 않습니다. 옮겨 다녀요. 그래서 교회 공동체에 와 보면 생명력이 있는지 없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그룹에 갔을 때 내가 힘을 얻고, 죽어 있던 생명력이 살아나는 곳이 있고요. 반대로 어떤 곳에 가면 다운 되고, 침체되는 곳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 새벽에 나아온 것은? 우리의 작아진 생명력에 은혜를 불붙이기 위한 것 아닙니까? 생명력을 공급받기 위함 아닙니까?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데도 참 많은 힘이 필요하고, 우리는 여러가지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생명력이 크지 못하면 감당해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 생명력을 키워나가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 아닙니까?  생명력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명력을 서로 전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우리가 좀 더 입체적으로 본다면? 내 이웃의 생명을 해하지 말라. 이상으로 네 이웃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 줘라. 우리는 반대로도 살 수 있습니다. 이웃의 생명력을 죽여야 내가 권위 있어 보이고, 그래야 내가 잘나 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의 생명력을 더 많이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약하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 더 소망을 불어 넣어주고,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때 그 때 나 역시 더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다시 표현하자면 '서로의 생명력을 크게 해줘라.' 서로 긍정해주고, 칭찬해주고, 용서해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면서 생명력을 쇠하게 하지 말고, 생명력을 키워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집에서 배우자에게, 자녀들에게, 또 오늘 하루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생명력을 더해 주십시오. "잘 될거야. 괜찮다. 할 수 있다. 기다려주마." 그렇게 생명력을 나눠주고, 불어넣어 주면? 내 생명력도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생명력을 죽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생명력을 불어넣으면서 살아가는지.. 오늘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생명력을 키워나가며 살되, 특별히 이웃과 그것을 나누며 살아가라. 그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특별히 연약한 자들에게 생명력을 키워주고, 복 돋아 주는 그런 은혜의 통로로 사실 수 있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생명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력 있게 말씀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의 말이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찌르며, 분노함 같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의 생명력을 꺾고 있지 않은지요. 그 결과 우리 자신의 생명력 역시 약해지고 있지는 않습닌까?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가 각 가정과 오늘 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모든 공동체에서 생명을 살려주는 사람들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말에 용서가 있게 하시고, 격려가 있게 하시고 칭찬이 있게 하셔서 꺼져가는 촛불과 같이 생명력이 사그라드는 그런 곳에 우리가 생명의 불을 붙여 주는 그런 귀한 은혜의 통로로 쓰임받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이웃의 생명력을 북돋아 주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꺼져가는 생명력처럼 약해진 이들 위에 성령님께서 생명력을 복돋우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을 아름답게 피워나가는.. 또 그 생명을 전하는 은혜의 통로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생명이 생명되게 하시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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