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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송태근목사

[새벽설교] 야고보서 1:1-11 I 송태근 목사 I 삼일교회

by №1★↑♥ 2021. 6. 29.

[새벽설교] 야고보서 1:1-11   

송태근 목사 삼일교회

  오늘부터 야고보서를 보겠습니다. 특별히 시작되는 야고보서 강해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현실에 견고한 주를 향한, 나그네 길이 힘 있게 이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기 전에, 책에는 기록된 목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선 이 배경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이후에 그가 일관되게 가르쳤던 복음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환란과 고난 속에서 복음을 서아시아 지역의 이방 땅에서 전하며 다니다가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냐 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현장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 혹은 거짓 교사들이 다니면서 가라지를 뿌리기 시작했어요. 그 가라지가 바로 율법주의를 심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구원이 완성되겠느냐?" 그 혼란이 사실 갈라디아서를 쓰게 했던 이유가 되지요. 그런 혼란이 있었어요. 결국은 A.D 48년, 내지는 49년 정도에 이 문제로 예루살렘 본부 교회에서 실질적인 1차 종교회의 '예루살렘 회의'가 열립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그 공회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도가 모였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온 시끄러웠던 주제를 가지고, 신학적인 문제가 바르게 적립되지 않으면 신앙의 문제가 흔들리기 때문에 이 문제로 격론이 벌어진 거지요. 최종적으로 베드로가 나서서 바울의 말에 지지를 해주고,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최종적 신학적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이 일단락이 지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한 겁니다.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면.. 아무렇게 살아도 되지 않겠느냐? 실컷 놀다가, 못된 짓 하다가 끝에 가서 믿어 괜찮지 않겠느냐?"와 같은 도덕폐기론자 내지는 율법 폐기론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삶과 행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거니까.. 이런 생각이 아무래도 가능하겠지요? 부패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게 아니다." 강조하면서 여기에 함께 동역의 입장에 붓을 든 사람이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서를 쓰게 된 배경이 그런 잘 못된 믿음에 대한 오해를 보충 내지는, 보완하기 위해서 붓을 든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한 게 아니라, 진짜 믿음이 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믿음이 진짜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행위라는 열매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야고보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글을 읽으면, 종합적으로 이해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한 책이 아니고 오히려 더 참된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 쓰인 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맞습니다.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여기서 말하는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야고보를 말합니다. 여러 야고보가 성경에 등장하는데, 한 네명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쓴 사람은 예수님의 형제 인 야고보로 학자들은 합의를 보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야고보가 자기를 뭐라고 소개했냐 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그래서 어쨌든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형제들은 요셉의 혈통으로 태어났다 할지라도 친 형제 아닙니까? 그런데 혈육적인 관계를 넘어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종이란 말은? 굉장히 그 시대 사람에게는 무언가를 퍼뜩 알아차릴 수 있는 보편화된 개념이고, 용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종'이란 개념은 그리스도인들 외에는 생소한 표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100여 년 전에만 해도 종이 엄연히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은 종이 갖는 의미가 뭔지를 대번에 알았지요. 그건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종에 대한 제도가 없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킨타 쿤테'가 등장하는 '뿌리'라는 오래 전에 보신 분들 계실 거예요. 이 영화는 현대인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가 갖는 비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에서 찾고자 하는 뿌리가 뭔가? 자유.. 거기에서 종들이 생활하는 비참한 생활상이 등장을 하는데.. 종들은 어느 정도 비참했는가? 하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주인이 팔아도 아무 대항을 못했어요. 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한 상황입니까? 종은 일정 자기에게 주권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사실사 그리스도의 친 형제인 야고보가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종'이라 합니다. '..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얼핏 보기에는 열두 지파에게 국한된 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렇게 봐서는 안되고 현대의 개념으로 확대시켜서 본다면 '이 세상의 한 복판에 던져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까지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쓰는 표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저부터도 시험은 싫던데요. 학교에서의 시험도 싫지만, 일상에서의 시험이 달갑지 않은데 어떻게 기쁘게 여길 수 있을까요? 여기서 '기쁘게 여기라'는 말은 굉장히 단호한 명령 어법입니다. 여러분 시험이 오거든, 주님의 명령처럼 '아! 기쁘다' 그렇게 할 수 있나요? 가능할까요? 우선 이 말이 같은 이성적 의미를 이해하기 원합니다. 예, 대장장이가 한분 계셨어요. 대장장이란, 쇠를 녹여서 뭔가를 만들어내거나 고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머릿속에 뭔가의 작품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거의 원석에 가까운 쇠붙이를 먼저 불에다가 넣어서 녹이겠지요? 시뻘건 불에다가 쇠를 녹여냅니다. 그리고는 이제 바깥에 부은 다음 집게 집어서 여러분 두둘기는 대장장이들의 망치가 있어요. 그 연장으로 머리 속에 계획한 작품의 모양이 나올 때까지 살살 두들렸다가, 세게 두들겼다 반복되는 이런 과정을 그리스도인들은 뭐라고 표현합니까? 시험 또는 환란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과정만 보면, 그게 전혀 달가워할 과정도 아니고 기뻐해야 할 이유도 없지요. 그런데 분명 대장장이의 머릿속에는 뭐가 있어요? 그가 만들고자 하는 작품이 넣어져 있어요. 이 과정만 끝나면 그 과정 끝에는 뭐가 나올까요? 대장장이의 머릿속에 그려졌던 걸작으로 탄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는 강한 명령 어법은, 바로 이 결과물이 만져지고 눈에 보이고 드러날 때까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결과물을 거기까지만 본다면, 그리고 거기까지만 볼 수 있다면.. 당장에 부대끼고 어렵고 힘든 이 과정을 실질적으로 기쁘게 여길 수 있다는 얘기죠. 지금도 여러가지 시험 중에 있는 분들이 계실 거에요. 또 그런 시험이 우리가 숨쉬는 동안에는 끊이지 않을 거예요. 그럴 때, 기쁘게 여기라는 명령어법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어느 한 국면에 어떤 작품을, 작업을 시작하셨구나! 이렇게 여겨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 있는데, 무엇일까요? 인내입니다. 그런데 그냥 인내를 성경을 말하지 않고 이렇게 소개합니다. 2-3절,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뭐가 인내를 만들어 내요? 믿음의 시련이..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설계하신 어떤 작품과 내용물이 시각적으로 보이기까지는 반드시 인내라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런데 이 인내는 부단히 나의 성품과 인성을 가지고 견뎌야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앞에 '믿음의 시련이.'라는 수식어가 있지요? 이 믿음이라는 말은, 내게 근거한 확신이나 어떤 내 성품에 기초한 긴긴 참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 믿음의 실체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분인가?를 정확히 알면, 견딜 수 있어요. 그게 불확실할 때 우리의 믿음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이 필요하냐? 성경은 그다음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여기 뭘 구하라고 되어 있어요? 지혜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에 담겨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인지, 어떤 신실함과 계획을 갖고 계신지, 그분의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여기에 다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셨어요. 믿으십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기도 가운데 매일 열어가고 깨달아 갈 때, 우리는 그 인내를 경주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인내의 끝에는 하나님이 내 인생 속에 설계하셨던 어떤 목적물을 만지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상 야고보는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구한다는 말은, 뭘까? 기도를 말합니다. 기독교 사도들의 많은 전설들이 문건이나 구전으로 이어져 내려오는데.. 특별히 이 기록을 한 야고보 사도는 별명이 낙타 무릎이에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했던지.. 그의 무릎은 사막에서 걷는 낙타의 무릎처럼 굳은살이 배기고.. 그만큼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느라.. 더욱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기를 사모해서 기도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삶의 신앙의 태도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믿음의 기초가 되어서 삶 속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수많은 환란, 시험들을 견디어 낸 것입니다. 알기 때문에.. 뭘 알았을까요? 하나님의 이 시험 끝에 어떤 결과와 열매를 예비하실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실은 믿음으로써 아는 거지, 앎으로써 믿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믿음으로써 보는 것입니다. 보고 믿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알아가는 거예요. 그 앎의 지혜가 우리로 하여금 더 기도하게 만들고 그 열매가 보일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인생의 풍랑을 헤쳐가고 견뎌 낼 수 있는 믿음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에 찬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특별히 새롭게 시작되는 하반기 속에 오늘 이 아침에 주시는 말씀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사소한 대소사에 흔들리지 않는 말씀의 근거가 되고, 더욱더 여러분들이 기도의 자리로 나올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말씀을 놓고 다 같이 눈을 감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하반기를 시작하면서 내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의 문제를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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