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교회 송태근 목사의 설교문, 마가복음 5:25-34,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는가?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는가?
오늘의 본문은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아온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뜬금없이 나온 이야기가 아니고 무슨 사건 사이에 샌드위치 형식으로 삽입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앞에 무슨 사건이 있었나? 21-24절을 보겠습니다.
막 5:21-24,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여러분 여기 다시 바다를 건너온 예수님은 큰 무리 앞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무리가 다 목격하는 청중 앞에서 한 사람이 엎드립니다. 그 사람을 가리켜 '회당장 야이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당시 유대사회의 회당은 어떤 곳이냐? 백성들을 교육하고, 백성들을 먹이고, 백성들을 살려내는 곳입니다. 말하자면 예배를 관리하는 종교지도자입니다. 그렇게 높은 사회적 신분이며 동시에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백성들을 지도하는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름이 야이로입니다. '야이로'는 이름의 뜻은, '내가 살리로다'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의 인생의 위치나, 사회적 위치가 사람을 살리는 목적을 가지고 회당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회당은 그런 공간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열두 살 먹은 딸이 있었습니다. 23절을 보시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린 딸이 죽게 되었다. 앞뒤가 뭐가 안 맞지 않습니까? 회당장, 그 이름이 '내가 살리리다.'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자기의 딸은 절망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좋지요? 이것은 정확하게 그 시대의 유대교가 부딪힌 시대적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 회당에 제도와 회당의 생성되는 내용으로는 백성들을 살리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살리리다'라는 아이러니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름만 가지고 있어요. 자기 외동딸 마저도 살려내지 못하는 절망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얼마정도 이 상황이 급박했냐 하면? 어느 정도 검증되지 않은 한 나사렛 무명의 청년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주십시오." 그만큼 이 시대가 절박했고, 이 시대의 종교적 상황이 절망스러웠다는 얘기를 이런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길을 나섭니다. 24절을 잘 보세요. 막 5: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항상 어떤 한 사건의 주인공과 그 뒤에는 큰 무리가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 큰 무리는 그 때의 배경이라면, 야이로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큰 무리는 사실 같은 입장에 처해진 유대 공동체.. 그 대표적 그림으로써 야이로가 소개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살리리라'는 이름을 가진 '야이로' 그러나 그 역시 '죽어가는 딸'을 보고 있어야 하는 현실 앞에 놓여 있는 아버지요 회당장입니다. 이것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처한 위기요, 시대적 한계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갑시다."하고 길을 나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 자체도 원격으로 치료 못하나요? 어떤 때는 직접 가지 않고도 치료를 하셨었는데, 굳이 거기까지 길을 나서는 수고를 하십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길을 주님이 계획하지 않은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오늘 열두 해 동안. 여기도 공교롭게 숫자가 12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마치 샌드위치 형식의 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도 12살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병을 앓았던 횟수가 12입니다. 12이라는 말은 '완전하다'는 완전수입니다. 7이라는 숫자는 '충족수'입니다. 뭔가 더 이상 사람으로서는 회복될 수 없는, 인간의 작용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를 12이라는 숫자를 슬쩍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 대한 성경의 저자 매우 상세하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25절을 보세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왔으니 얼마나 이 인생이 피폐하고, 고난했을까요? 여기의 혈루병에 대해서 레위기는 '유출병'이라 하는데.. 피가 멈추지 않는 병입니다. 부정한 병입니다. 유대인들은 당시에 어떤 못된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었냐 하면, 세 종류의 인생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첫째, 여인으로 태어난 것을 부정하다 했습니다. 둘째, 이방인으로 태어난 것을 부정하다 했습니다. 셋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을 부정하다 했습니다. 그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로 태어난 것도 부정한 인생인데, 그 부정한 자가 유출병을 앓고 있어요. 유출병은 여인들이 앓는 병 중에 가장 부정한 병입니다. 그 병을 열 두 해 동안 앓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여인의 인생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회복이 가능한 여지가 없는 상황에 내몰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은 절대로 길거리를 돌아다녀서는 안돼요. 왜? 레위기에 보면, 이 여자가 손 닿는 것마다 모두 부정해지기 때문에 길거리에 돌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그렇게 죽음을 맞기에는 너무나 절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 같습니다. 26절,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의사는 뭐 하는 사람입니까? 고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 시대의 의사는 사람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더 괴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또 보세요. '...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당연한 귀결이겠지요? 그리고 '..아무 효험도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 가던 차'입니다. 무슨 뜻이냐? 죽음의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처럼 절망을 그려낼 화가가 있을까요? 소설가가 있을까요? 이 보다 더 씁쓸하고 절망스러운 표현이 어떻게 더 가능하겠습니까? 병 고침을 위해서 많은 의원을 찾았지만, 오히려 많은 의사로부터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 모두를 탕진했고, 거리로 돌아다닐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데.. 이제 그 마저도 그 병이 더 중해져 가던 중이었다는 거예요.
27-29절 '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직 한분만을 제외하고.. 청중이 바짝바짝 에워싸서 밀려 밀려가고 있습니다. 그 청중 가운데 이 여인이 끼어들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그 표현은 마치 이 여인을 두고 한 말 같아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더 이상 내가 방법이 없겠다 싶어서 모든 체면 염치 다 걷어내고 거리로 뛰어나와서, 청중 틈에 끼어서 지나가던 예수님의 옷을 만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어요. 바짝바짝 에워싸서 누구나 예수님의 옷 한번 스쳐갔을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의 손댐과 이 여인의 손댐은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리고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주님이 정확히 아셨어요. 이 여인만 손을 대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옷과 신체접촉이 있었을 거에요. 왜? 바싹바싹 에워싸 밀고 가던 때이기 때문에.. 성경을 잘 보세요. 24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 그대로 육체적인 접촉이었어요. 그런데 이 여인은 동일한 접촉이었지만 간절함과 믿음과 열망이 담긴 인격적인 접촉(?) 혹은 어떤 기대감을 접촉이었습니다. 그 수많은 청중 가운데 예수님이 정확하게 그 여인을 찾아냅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오늘도 이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냥 물리적으로 앉아 있는 경우도 있겠고, 정말 이 여인의 심정과 같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는 마음으로 인격적인 접촉을 기대하고 나오신 분들도 계실 거예요. 바라기는 후자와 같은 예배자가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물리적으로 앉았다만 가는 예배자가 아니라, 열망과 기대를 가지고 손대는 접촉, 예배자.
그런데 31절을 봅니다.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제자들의 인식세계였습니다. 한계였습니다. "주님, 지금 사람들 안보이십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어 밀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냐 물으시면 어떡합니까?" 자, 보세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물으심에 물리적 접촉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 이 청중 가운데 가녀리고, 연약하지만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떤 기대와 소망과 열망을 가지고 손댄 여인이 분명 있다. 의도적으로 손을 댄 사람이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 지금 청중이 에워싸 미는 거 안 보이세요? 이 사람 저 사람 다 밀고 다니는데.. 여기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냐?라고 물으시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분명한 인식의 한계, 차이였어요.
32-3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여기 오역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을 여쭈니'가 아니라, '진리를 여쭈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인의 두려움은 뭘까요? 어떤 성격의 두려움일까요? 이것은 마치 사도바울과 실과 감옥에 갇혔을 때 커다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깨달아지는 순간 찬송과 기도를 터트렸을 때, 사람들이 감옥 안에서 두려워했던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경건한 떨림입니다. 그리곤 이 여인은 바로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서 진리를 묻습니다. 진리를 여쭙습니다.
그런데 34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도대체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이 사건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요? 레 15:1 '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 3 그의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함이 이러하니 곧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막혔든지 부정한즉 4 유출병 있는 자가 눕는 침상은 다 부정하고 그가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하니 5 그의 침상에 접촉하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6 유출병이 있는 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7 유출병이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8 유출병이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9 유출병이 있는 자가 탔던 안장은 다 부정하며 10 그의 몸 아래에 닿았던 것에 접촉한 자는 다 저녁까지 부정하며 그런 것을 옮기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가 정한 자의 옷에 손을 대면 그 정한자가 어떻게 되냐? 부정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을 뭐라 하면? '전가'라 합니다. 지금 이 여인의 태도를 잘 보세요. 오늘의 본문 28절을 보세요.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뭘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예수님 옷에다 손을 댄 행위는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 건가요? 자기의 고단한 인생과 병든 몸을 누구에게 전가시키는 겁니까? 그렇지요. 예수님에게 전가시키는 행위예요. 즉, 이 말은 "당신이 내 죄를 가져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내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하게 평생을 살아왔던 여인이 열두 해나 그 병으로 고난을 당했던 여자가.. 고쳐낼 수 없는 절망적인 질병을 끌어안고 있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다 손을 대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뭐하러 오셨나요? 부정한 모든 죄를 대속하러 오신 것을 믿으십니까? 이 믿음을 예수님이 놀랍게 여기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구속의 주로 확인했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조금 시각을 높이 띄어놓고 두 사건을 엮어봅시다. 지금 예수님이 어디가시가 예수님이 이러고 계신 거예요?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다가.. 지금 야이로의 입장은 어떨까요? 열불이 나겠지요? 지금 내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예수님 한가롭게.. 열두 해를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에게는 한가로운 일이 아니지만..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엉뚱한 일을 하고 계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서 자신의 질병과 죄악을 전가시켜 버려요.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것을 귀하게 여기셨어요. 그리고 부정한 중에서도 가장 부정했던 여인을 향해서 마지막에 뭐라고 부르시나 잘 보세요.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아마 이 여인의 평생에 가장 복된 소식을 들은 현장이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의 믿음은 어떤 것이 었나요? 나의 질병과 죄를 저 사람에게 전가시킵니다. 주님을 정확히 구속의 주로 보았다는 거예요. 그것을 레위기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여인이 정한 자의 손을 대면 정한 자가 부정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죄를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주님은 "내가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 온 줄 아느냐?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다."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다. 내가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
그러면 회당장의 사건과 이 기적의 사건은 어떤 역학 관계가 있을까요? 지금 유대 공동체로는 희망이 없다. 유대공동체는 그때까지 회당에서 율법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수많은 백성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고, 제단 하며 죽이고 있었어요. 생명을 죽이고 종교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그 시대를 숨 막히게 하고 있었어요. 어쩌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과 매우 흡사할지도 몰라요. 그 하나님의 대한 소식과 내용과 가르침이 백성들을 살려내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종교화 시켜서 백성들의 숨통을 끊어놓고 있었어요. 그것이 야이로의 딸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열두 해 동안 절망에 놓여 있던 여인을 자기 죽음의 대속의 메시지로 고쳐내면서 이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 12 갖는 암시된 숫자의 의미가 뭔가요? 하나님의 12사도를 통해, 이제는 회당이 아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복음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 사건 속에 감추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삼일교회가 그런 대안적 공동체로 새롭게 거듭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당장은 자기의 죽어가는 딸 마저도 고쳐내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와 유사한 12해를 혈루증을 앓던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써 주님만이 내 죄를 대속해주시고, 이 민족의 숨통을 끊어져 가던 이 절망의 시대를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실 분이라는 것을 고백함으로.. 새로운 십자가의 대안적 공동체를 안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딸아~ 평안히 가라." 그리고 성경을 다시 보세요.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회복의 소망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시선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카메라 렌즈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 혈루증을 앓던 이 여인은 중간에 어떤 메시지 차원에서 샌드위치럼 껴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35절,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쩌면 좋지요? 아니, 그 딸이 죽어가고 있었고, 죽은 거나 같았어요. 그런데 헐레벌떡 들려온 소식은 결국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는 유대교는 종교지도자들이 꽉 붙들고 숨통을 조여 가던 로마치하의 유대 종교는 회당의 종교는 성전의 종교는 죽어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습니다. 사망이 선고된 것입니다.
자, 그런데 성경을 잘 보세요. 36절,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따라옴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은닉성을 이야기 합니다. 계속해서 38절,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떠들고, 사람들이 울고, 심히 통곡을 합니다. 이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이 처해져 있던 정확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소리가 난무하고 떠들고 울고 통곡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의 종교가 그랬습니다. 그 시대의 이스라엘이 그랬어요. 그 시대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그랬어요. 마치 12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모습이었고, 죽어가던 야이로의 딸의 모습이었어요. 그 결과가 무엇이겠어요? 울고, 떠들고, 통곡 밖에 남은 게 뭐 있겠어요? 그런데 그러한 분요로운 소리를 향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절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이 아이가 누구입니까?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여러분 절 보세요. 마가복음과 성경에서 '잔다'는 말을 부활을 언급할 때 사용이 됩니다. 자는 것은 깨어나는 것을 전데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무엇을 암시하냐? "걱정하지 마라, 너희들은 숨 끊어진 물리적인 죽음만을 보고 통곡하고, 떠들며, 울고 난리 치는데 조용히 해라. 잔다." 즉, 일어날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뭐라고 했어요? 비웃었어요. 잘 보세요. 40절입니다.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뭘 잡았어요? 예수님은 말씀으로도 천지를 창조하시는 분인데 왜 손을 잡으셨을까요? 성경에서 항상 손은 권능을 의미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권능과 에수님의 권능이 죽어가던 이스라엘 공동체에 손 대어 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 그림입니다. 죽어가던 이스라엘 공동체와 이 시대를 향해서 하나님이 손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손대시면 일어납니다. 과부의 아들일 슬피 울며 장례를 치르러 마을 밖으로 무덤가로 갈 때에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제자들의 행렬과 만납니다. 이때 정통 유대인인 예수님께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 하나를 하셨는데, 그게 무엇이냐?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 죽은 자가 일어나 말도 하거늘 슬픔으로 가득 찼던 어머니의 품에 아들을 돌려줍니다. 주님이 손대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자꾸 손대려 하지 마세요. 주님한테 손댐을 맡겨야 합니다. 그게 순전하고 온전한 믿음인 줄 믿습니다.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어떻게 되었나요? '..이르시되 달리다굼..' 했어요.
자, 여기를 보세요. 달리다굼은 무슨 뜻인가 하면? 조용히 아침에 엄마가 깨우는 소리입니다. "얘~ 00야 일어나야지.." 대개 한국 엄마들은 이불을 확~ 재끼면서 "야! 야! 지금 몇 신데 이러고 있냐?! 학교 안 가?!" 그러면 애들이 더 미칠 노릇이죠. 그런데 이건 그런 소리가 아니라 아침에 조용히 엄마가 아이를 깨우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뜻 밖에도 히브리어도 아니고, 당시 상식이 있던 사람이 썼던 헬라어도 아닌 아람어입니다. 정통 히브리인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입니다. 뭘 말할까요? 여기에 사람들을 제한시켜 일부만 따라오게 했던 이유가 있어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끼리만 아는 영적인 비밀이 있지요? 서로가 얼굴만 보아도 마음속에 교류가 되는 어떤 암시들이 있어요. 눈빛만 보면 알아요. "형제~ 힘들지~ 조금만 참어 주님 곧 오셔~" 이런 암시가 우리에겐 서로 있단 말이에요. 왜 웃어요. 웃을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서 왜 아람어를 썼느냐? '달리다굼' 지금 절망스럽지만, 어둠만 깔린 것 같지만.. 지금 아무런 방법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달리다굼. 옆에 사람들에게 속삭이듯 '달리다굼' 해보세요. 서로 알아들으세요? 그 뜻이 뭐냐 하면, 성경을 잘 보세요. 해석을 해놓았지요? '..하시니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자, 보세요. 밖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예수님을 비웃고, 울고, 떠들고 통곡하고.. "그럴 줄 알았어~ 그 사람을 뭐하러 부르러 가?! 미쳤지" 별의별 비난과 악플이 달렸을 거예요. 저는 게시판 때문에 10년은 늙은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다 뒤로 하고, 소녀에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이건 생명을 가진 자만이 아닌 비밀이다. 그 말이에요. 이 한 주간도 많은 힘들을 부딪칠 거예요. 그때마다 속으로 자기에게 얘기하세요. "태근아~ 달리다굼" 제 이름이 태근이에요. 클 태 자에요. 키는 작지만.. 그런데 그 뒤에가 뿌리근 자에요. 뿌리가 크다 이 말이에요. 나타나서 커서 뭐해요. 뿌리가 커야지. 결론이 이상하지만.. 성경을 보세요. 42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왜 자꾸 나이를 밝힐까요? 열두살이에요. 유대인들은 열두 살부터 어른이 됩니다. 그런데 그냥 어른이 되지 않지요. 어떻게 해야 어른이 되나요? 43절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소녀에게 뭘 주라? 먹을 것을 주라.
들녘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 뭐라고 하셨나요? "먹을 것을 주라." 그게 그냥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도록 하라는 그 말 아니에요. 먹여야 어른이 돼요. 우리 청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야 어른이 된다 그 말이에요. 믿습니까? 이 한 주간도 삼일운동을 하면서 "소녀야 일어나라!" 이 하나님의 약속에 흥겹게 붙들리는 행복한 한주가 되기를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찬양 '주께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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