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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송태근목사

[새벽설교] 야고보서 5:1-6 I 심판의 날을 준비하라 I 송태근 목사 I 삼일교회

by №1★↑♥ 2021. 7. 9.

  오늘의 5장은 사실 어제의 본문에서 이어지는 하나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5장이라고 끊어졌기 때문에 다른 내용처럼 비춰질 수 있어요. 우선 어제 우리가 어떤 내용을 살펴보았지요? 교회 안에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성도들의 살림이 나아지게 되었어요. 주로 그들은 이곳저곳을 왕래하며 무역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심판의 날을 준비하라

  그리고는 축적되어진 부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랑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자랑이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주었고, 또 나아가서는 복음이 오해를 가져오게 되었지요. "저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고, 나는 왜 못 받았을까? 내가 기도가 부족했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나?" 이런 식으로 복음이 오해되고, 심지어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그런 흐름에 편승이 되어서 하나님 잘 믿으면 물질적으로 복을 받게 된다는 식의 복음의 변질과 왜곡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벌어서 자랑까지 하게 된 사람들의 돈을 벌게 된 과정이 건강했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굉장히 그 과정 자체가 불투명하고 건강치 못한 방법을 통해서 신앙 다르고, 나가서 비즈니스 다르고 철저하게 이분법적인 생활의 태도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도 덕이 안되지 못했던 이중적 고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그 범위를 조금 확대해서 야고보 사도가 이야기를 꺼냅니다. 1절 '들으라 부한 자들아..' 여러분, '들으라'는 말은 사실상 어투 자체가 "내 말을 잘 들어라"는 뉘앙스가 아니라, 경고성 발언으로 부한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조심해서 분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부 자체를 정죄한 적은 없습니다. 물질 자체를 나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물질을 대하는 뷔폐 된 상태. 자세, 마음에 언제나 문제가 있었지 물질 자체를 성경이 부정하거나, 나쁘다거나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1-3절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여기서 재물이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 2절 끝에 '너희 재물은 썩었고'라고 하지요. 이 재물과 3절 끝의 재물은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우선 2절에 나타나는 재물은 '플로토스'로 소위 우리가 말하는 그런 재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3절 끝에 나오는 재물은 '대사무리조'라는 단어를 특별히 썼습니다. 이것은 곡식을 이야기합니다. 당시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곡식을 말하는데, 이 재물에 대한 이면의 시대적 아픔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사람이 살았던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는 사람은 더 잘살게 되고, 없는 사람은 그 있는 것 마저도 점점 가진 자들에게 빼앗기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양극화 현상이 어느 나라나 사회적 문제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문제이고, 이 때도 이런 현상이 있었어요. 땅을 많이 가진 대 주주들이 조그마한 1-2평 남짓한 손바닥 만한 밭이나 논을 가진 이들의 것을 계속 흡수해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이 경제논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땅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대 지주의 밑으로 소작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완전히 경제적 주권을 빼앗기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가진 자들은 더 많은 밭을 소유하게 되어서 항상 그들의 창고에는 늘 어마어마한 곡물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 이 질문의 단어를 분리해서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이상한 것은? 장차 일어날 일을 말하는데 왜 완료형으로 썼을까요? 이러한 문장 기법을 보통 문법적으로 예언적 완료형이라고 합니다. 언제 이런 기법을 사용하나? 안 일어났지만 하나님의 예언과 예고의 내용은 반드시 성취될 것을 나타낼 때에는 이와 같은 형식의 예언적 완료형을 사용합니다. 신학용어이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완료형으로 쓰였을 때의 내용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 재물이 나오고 옷이 등장을 했어요. 은금이 나왔어요. 잠깐 우리가 숨을 고르도록 할게요.

  뉴스나 사건에 연루되어서 드러나는 부자들의 이면이 있습니다. 특별히 영화 같은 데서 부자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드러낼 때가 있는데, 완전히 차원이 다르지요. 그네들의 그런 삶은 거의 신인류라 할 정도로 우리의 개념과 상상을 뛰어넘는 내용들이 많던데 고대 시대에는 부자들이 뭘로 부자 행세를 했는가? 세 가지로 부자 행사를 했다고 해요. 

  1. 매일 연회를 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자기들의 범주에 들어올 수 있는 로열 층들을 초대하고, 어마어마한 음식을 차려놓고 밤새 먹고 마시면서 해가 뜨는 줄도 모르고 음탕한 짓들을 합니다. 그런 파티를 매일 합니다. 먹고 마시고 토하고.. 먹기는 먹는데, 더 먹고 싶은데 위는 한계가 있으니 약을 먹고 다 토하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위를 다 비우고 다시 먹었다고 해요. 한쪽에서는 기본적인 음식조차 못 먹어서 죽어가는 이들이 많을 때에..
  2. 호화로운 옷을 걸칩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옷을 걸침으로써, 특별히 남편들을 과시했다고 해요. 
  3.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거예요. 은금을 어마어마하게 쌓았습니다.

  은금은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안 변하지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변한다 '녹이 슨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금과 은일지라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묘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곡식으로 어마어마한 창고에 쌓아둡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고를 1절을 잘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모든 것이 마르고 끝나는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부한자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한자들이란? 하나님께 기초하지 않고 자기들이 모든 물질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를 위해 먹고사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부한자들아'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마태복음의 기자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며 장가갔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또 역시 분리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하거나, 정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 목적에 두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들조차, 입술만 고백할 뿐 모든 삶의 방향이나 가치 그 사람이 쓰는 재정의 소모를 보면,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 대로가 아니라 자기만 위해서만 쓰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인생들이 몰두하더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시대를 어떻게 심판하셨죠? 홍수로 심판을 하십니다. 

  자, 그런데 여기에 중요하게 연관된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에녹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와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에녹은 이 땅에 몇 년을 머물렀지요? 365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한 시간은 몇 년입니까? 300년입니다. '삼백 년 동안 동행하더니..' 그러면, 적어도 몇 살 때 인생의 중대한 변화가 왔다고 할 수 있을까요? 65세. 무슨 일이 있어서 삶의 극적인 반전이 있었을까요? 별일 없었습니다. 창세기 5:21-22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성경 기자가 평이하게 기록을 해놓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예리하게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300년 동안 동행하게 된 것이 누구의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므두셀라의 출생. 히브리 사람들은 이름 속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감추어져 있어요. 그런데 '므두셀라'의 이름은, '이 자녀가 죽으면 곧 심판이 임한다.' 웬걸 65세 되던 해, 하나님이 귀한 아들을 주셨는데.. 아들의 이름이 심상치 않아요.. 이 자녀가 죽으면 곧 심판이 임한다. 뭔 아이 이름이 이러에요? 아이의 이름을 듣고 정신 안 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사람의 내일 누가 아나요? 우리는 내일을 몰라요. 하루살이에게 물었다지요? "내일 보자~" "내일이 뭐예요?" 하루만 살다가 끝나는 인생에게 내일이 어딨어요? 이때부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성경 기자가 정확하게 분리를 해놓았어요.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65세까지는 어떻게 살았나요? 그냥 살았어요. 별일 없이, 남들 아파트 평수 늘리는 재미처럼, 화장실 개수 늘리는 재미처럼.. 은행 잔고 쌓아가는 재미로 살았어요. 특별히 죄지은 것 없습니다. 그런데 본래 '에녹', '에노크'라는 말이 무슨 뜻인고 하니? '가르치다. 증거 하다, 교수하다, 전파하다' 이 쪽에 관련된 모든 내용들이 전부다 함의된 내용입니다. 에녹은 어떻게 부름 받은 인생이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택한 자로써, 온 생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며, 증언하며 일생 속에 녹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인생으로 부름받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65세까지는 그냥 살았어요. 그렇게 나른한 일상을 어느 날 깨고,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감춘 것입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므두셀라입니다. 

  우리는 므두셀라라고 하면 또 다른 기억이 하나 있지요? 성경의 인물 중 가장 장수한 인물 969세. 그의 나이에 감춘 하나님의 마음은 뭘까요? 패역한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길고 긴 기다림입니다. "너희가 언제까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살아가는 일에만 몰두할 것이냐?"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 아닙니다. 언제까지 그것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붙들고 살겠이냐에 대한 하나님의 기다림이었어요. 그런데, 므두셀라가 969세의 일기로 죽습니다. 그가 죽던 해 노아의 나이가 600세입니다. 정확하게 그 해에 하늘의 창이 터지면서 홍수가 쏟아지고, 땅의 심판이 임합니다. 모든 걸 다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은 노아 속에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던 자에게는 구원의 방주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린 인생들에게는 말 그대로 심판의 날이 되었어요. 오늘 야고보 사도가 사실 그거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약 5: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 있지요? 추수한 자들이 소리를 지릅니까? 삯이 소리를 지릅니까? 추수한 자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추수한 자들에게 돌아갈 부자의 창고에 쌓아진 삯이, 가난한 자들의 몫이 소리를 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품꾼의 입을 부자들이 틀어막았기 때문에 소리를 못 지르고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지요? '추수하는 자의 우는 소리가..' 울 수밖에 없는.. 소리조차 낼 수 없도록 입을 틀어막아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삯들이 그 창고에서 소리를 지르고 절규하는 거에요. 가난하고 가슴에 멍든 자들이 소리 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 삯이 소리내어 울고 있는 거에요.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 이런 신음소리가 얼마나 탄식으로 터져나오고 있습니까? 그래서 추수꾼들은 울 수 밖에 없는데요. 그것을 누가 듣는다고요?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나이다. 민군이라는 말은 전쟁 때 수식되는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누가 대신 싸우시겠다는 건가요? 하나님이 반드시 이것을 갚으시리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에 보면 히브리인들이 무려 애굽이라는 이방 땅에서 객이 되어서 400년 동안을 품삯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하는 품꾼으로 살아왔어요. 그들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조치하셨나요? 수레마다 은금을 구하게 하여 바리바리 실어서 출애굽 시키십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 모세를 그들의 리더로 부르실 때 중요한 이야기 하나 하셨지요? "내가 그들의 고통소리를 듣고, 내가 그들의 고욕을 알고, 그들의 고난을 보았다." 듣고, 알고, 보았다. 하나님이 그 시대의 아픔을 들으세요.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을 주인 삼지 않은 모든 부한 자들이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갚으세요.

 

  무서운 사실이 5-6절에 극명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돼지를 살 찌울 때,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죠? 도살할 날을 위해서 먹이고 살 찌우는 거예요.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의 결말을 그렇게 소개합니다. 6절을 보세요.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의 죽음에 대해서 묘사한 구절을 재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그래서 누가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땅의 소망이 되어주시고 구원이 되어주시고 우리의 목자가 되어주신다는 얘기예요. 그러면 여기에 부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그렇게 살았어요. 이 땅의 머리를 갖고 도살할 날을 예비하는 어떤 동물처럼 하나님 없이 그렇게 살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절망의, 구원받을 수 없는 인생들..

  신앙이란 것이 이런 것 같아요. 여러분들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저의 개인적인 모습만 보더래도 나이가 먹으면서 신앙생활 해갈 수록 '왜 나 같은 걸 구원하셨을까? 왜 나를 위해 죽으셨을까?' 설명 불가한 내용입니다. 신앙을 살 수록 이 질문이 더 커져요. 우리가 부한 자의 삶의 모습 속에 사실은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또 한 측면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주님이 오셨고, 우리를 영원의 눈을 열어서, 귀를 열어서 생명이 무엇인지를 우리 코에 호흡을 주셔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는 구속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옛날 부한 자들의 삶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서도 안되고, 일말이라도 동경해서는 안됩니다.

 

  자, 그러면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이 뭘까요? 교회 헌금 많이 해서 복 받으라는 이야기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고, 인생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많은 것들이 아니라 다 주셨어요. 그걸 누굴 위해 쓰라는 것입니까?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쓰라는 것입니다. '쌓아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땅의 사람들은 유한하고 제한하고, 한계적인 것에 전 생의 목적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녹슬고 폐하여지고, 불살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짜 가치 있는 게 뭐예요? 어제 새벽에 말씀드렸듯이 무엇이 영원한가? 가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영원하십니다. 그분의 뜻이 영원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영원합니다. 믿습니까? 오늘도 이 고백이 이 준엄한 경고가 우리에겐 복이 되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이 임했다는 것을 붙들고, 또 하루도, 남은 생애도 하늘에 복을 쌓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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