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제는 5장 앞부분의 말씀을 들었지요? 부한 자들의 경고. 그러나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없이 살아갈 때 정확한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6절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바꾸어놓으셨고, 이제 우리의 모든 의지의 뿌리가 새로운 생명에 근거해서 새로운 자리로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오늘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내용으로 주로 이어지는 내용이 '인내'입니다.
욥의 인내인가? 주의 결말인가?
히브리인들은 자녀들에게 평생을 가르치는 세 가지가 큰 주제가 있어요.
- 군인의 순종
- 운동선수들의 훈련
- 농부의 인내. 농부들에게 배울 수 있는 부분은 부지런함, 성실함 등이 있겠지만.. 가장 큰 덕목이 있다면, 열매가 나기까지 열매가 날 것에 대한 확신 가운데 소망으로 인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소망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언제 그 소망이 흔들립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결국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실제 바라보고, 오늘이라는 현실을 참고 견디고 버티는 것이거든요. 언제 소망이 흔들릴까요? 그 소망에 대한 사실성이 의심될 때.. 그 소망도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이러한 흔들림 속에서 가던 길에서 돌아선 사람들이 뜻밖에도 많습니다. 처음에는 소명을 따라서 신학도의 길에 들어섰지만, 졸업 때가 되면 많은 학생들의 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가운데서도 이런 학생들이 매 학기마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라는 책은, 구약도 약속이고 신약도 약속입니다. 구약은 옛날 약속이고, 신약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구약은 뭐에 대한 약속이었습니까?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따라 역사의 시간 속으로 메시아가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였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 승천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맞지요? 그런데 그날까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인내입니다.
신약성경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하나는 역사의 관한 증언이고 또 하나는 역사의 증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복음서를 보면 누구를 소개하나요? 예수님은 2000년 전 역사 속에 여인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은 이렇게 사셨고, 사시는 동안에 3년이라는 공생애를 통해서 12 사도를 세우셨다는 것을 마태의 관점에서, 마가의 관점에서, 누가의 관점에서, 요한의 관점에서 네 방향으로 소개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소망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인내가 흔들릴 때를 대비해서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소개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12 사도가 3년 만에 세워졌어요. 그 12 사도가 열매로 맺어진 현장이 사도행전 28장까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열매로써 역사 속에 어떤 결과를 나타냈는가? 그리고 나머지 책들은 사도행전 역사 사이사이에서 교회와 교회 간의 문제, 교회와 목회자와의 문제, 교회와 성도 간의 문제 등에 대해서 다룬 책들입니다. 나머지 모든 책들의 내용의 집약된 주제가 뭐냐? 인내입니다. 역사 속에서 사실로 오시고 그분이 이런 결과를 내셨고, 이 결과물들이 펼쳐낸 역사가 사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도행전의 역사다. 그러니까 인내를 가지고 소망 가운데 기다릴 것을 권면한 것들이 나머지 책들이다. 요한계시록까지가 사실은 그 설명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두 가지 정도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시간에 도달할 때까지 너무 길고 멀어요. 그리고 이 길 가는 것이 너무 건조하고 메말라요. 성도들의 삶이라는 것이 인내만 요구되는 삶이어야 하나? 그런 질문이 발생할 수 있어요. 그것이 성도의 삶이 최고의 패턴이어야 할까? 여기에는 뜻 밖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불 가운데서 구원하실 때 그 때 그 모습으로 바로 천국에 이르는 것을 원치 않아요. 그래서 길고 멀지만 험하지만 사랑하는 자녀들을 인내라는 학교에 입학을 시켜서 깎아내고 빚어내고 만들어 제대로 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셔서 하나님 나라에 입성시키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성화'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내라는 학교에 입학시키신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직도 이 땅에는 복음을 듣고 돌아와야 할 택한 백성들이 많기 때문에 그 구원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사역과 미션을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어떤 사역이 우선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꼭 먼저 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나중에 할 수 있어요.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먼저 해야지요. 공부가 중요하기 때문에 공부를 먼저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책임을 지는 그 자리가 너무 막중하고 무겁기 때문에 공부를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그 인내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의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 때문에 사람을 깨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 때문에 사람을 망가트리고, 관계를 부서트려요.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의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성품으로 내 일(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거예요.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이러한 인내에 대해서 성경에서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마크로수메오'. 이것은 의역해서 번역하자면, '짜릿한 인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시간만 기다리지면 확실한 열매가, 내 인생을 걸만한 결과가 맺힐 것을 들어서 알고, 믿음으로 보아서 알아요. 그러면 그 기다리는 기다림이 얼마나 짜릿하겠어요? 그래서 여기서 사용된 인내라는 것은, 짜릿한 기다림입니다. 여러분 주님 오실 그날을 기다리면서 짜릿한 기다림의 심정이 있으신가요? '아이~ 좀 천천히 오시지~ 내가 좀 놀게 많은데?' 여기는 그런 인내가 아니에요. 짜릿한 기다림. 농부가 씨를 심어요. 그 씨에 생명이 있어요. 그렇다면 이 씨는 반드시 열매로 맺히게 됩니다. 수확이 주는 기쁨만큼 큰 희열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여기에 전제가 있어요.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른 비는 파종 후에 와야 하는 비입니다. 그래야 씨가 잘 안정이 되어서 줄기를, 입사귀를 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늦은 비는 열매를 거두기 전에 내려야 하는 비입니다. 이 비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헤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왜? 이것은 우리가 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적절하게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나기 까지.. 우리는 그 열매가 나기까지 내가 받아 심은 이 생명의 말씀이 살아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열매를 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농부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인내라는 것입니다. 그 인내는 분명한 소망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흔들려버리면 다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소망이 있는 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 소망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면 낙심하거나 포기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8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이 번역이 조금 애매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마음을 확실하게 하라.' 확정하라는 단어가 쓰였거든요. 마음을 확정하라!는 것인데, 언제 이런 말을 쓸 수 있을까요? 남자 친구가 군대를 갔어요. 이제 훈련소에서 퇴소를 했어요. 본격적인 군생활이 시작되겠죠? 그 사이에 더 멋진 다른 형제가 나타난 거예요. 그러니까, 자매가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말을 갈아타? 기다려?' 이게 썩 건강한 예는 아닌데.. 이 단어가 쓰이는 정확한 예를 들고자.. 그때에 네 마음을 확정하라. 그 말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강림의 날이 가까워왔는데 그 소망을 계속 기다리고 붙들고 그분에게 네 고백이 흔들리지 않을래? 아니면 계속해서 이 땅에서 목숨을 걸고 살래? 그 마음을, 그 고백을 확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백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도신경'을 주문 외우듯이 하면 안됩니다. 한 문장 한 문장 내 고백, 내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매 순간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부가 신랑이 오시는 거에 대한 자기 정절을 순간순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현실의 삶 속에서 그런 고백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게 굳건하라는 것입니다.
9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여기 원망하지 말라고 했어요. 언제 이런 원망이 터져나올까? 소망이 흔들릴 때.. 결국 우리는 언어로 고백으로 죄를 짓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즉, 두 마음을 품기 시작할 때.. 자기가 바라보았던 것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집니다. "이게 뭐야~ 간사로 시간 다 드렸는데.." 진짜 우리 삼일교회 간사들은 최고입니다. 빈말이 아니에요. 그때 흔들릴 수 있는데, 고백으로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거의 다왔으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거예요. 조금만 더.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인물에 대해서 샘플로 제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의 인내. 욥이 인내로 모범이 될 만한 샘플이 될까? 제가 상식적으로 보아도 욥은 샘플로 등장할 만한 인내의 화신으로의 모습은 사실 아니었거든요? 그는 곳곳마다 불평과 원망을 터트렸어요. 욥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투덜 댔는가 하면 한번 확인해볼까요? 욥 7:11-14, '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 하리이다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 나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잠이라도 들면 근심, 걱정 염려를 떨쳐버릴까 했는데 하나님이 꿈에도 나타나 괴롭히더라는 것입니다. 변명과 원망이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15-21 '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 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 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여러분들 이 정도 불평은 안 하시죠?
욥 10:16-22, '16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17 께서 자주자주 증거 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9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22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거의 욥기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을 향한 항변, 투덜거림, 자기 자조적인 고백들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야고보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욥의 인내를 들었고' 욥의 인내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부분, '..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여러분 욥의 결말입니까? 주의 결말입니까? 욥이 하나님 앞에서 순간순간마다 대들고, "나를 놓아달라"라고 불평하고 원망했을지라도 그 욥의 복된 결말은 누가 만들어가신 결말이라는 건가요? 주께서 만들어 주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뭘로? 두 가지로 '..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그러니까, 욥의 인내는 사실 하나님의 인내였어요. 욥의 인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순간순간마다 징징대, 투덜대는 욥을 참고 인내하셨다는 것입니다. 뭘로? 자비와 긍휼히 여기심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인내를 인간적인 인내로 갈 수 없어요. 주께서 견인하지 않으면 갈 수 없어요. 이 인내마저도 누구에게 맡겨야 된다는 거예요? 주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욥이 딱 하나 잘한 거 있어요. 고꾸라져도 십자가 앞으로 고꾸라졌다는 거예요. 욥은 격렬하게 하나님 앞에서 싸웁니다. 그거 하라는 거예요. 사람이 살다가 비명소리가 나올 때가 있어요. "뭐 이래!" 그거라도 하라는 거예요. 떨어지지 말고.. 비명을 지른다는 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고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마저도 하나님이 믿음으로 보신 거예요. 얼마나 자비하세요.
'죽음의 포로수용소'라는 책을 보면, 독일 군인이 감방 안에 갇혀 있는 유대인들을 매일 아침마다 한 명씩 끄집어냅니다. 실험실로 데려가기 위해서.. 그날은 죽는 날인 거예요. 그런데 매일 아침마다 감옥 안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의 얼굴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을 제일 먼저 불러냈느냐? 첫째, 눈이 풀린 사람들. 그리고 히죽히죽 웃고 삶의 끈을 놓아버렸다고 판단되는 사람들 먼저 착출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공 빅터 플랭클린이라는 의사 출신 유대인은 매일 운동장에서 주은 날카로운 유를 갈아서 덥수룩하게 자라는 수염을 아침마다 깎았다고 해요. "나 아직 살고 싶다. 나는 죽을 수 없다." 이것이 아침마다 의지로 얼굴에 나타나니까 독일군이 그 얼굴을 보면 부르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삶의 끈을 마음으로부터 내려놓은 사람들은 여지없이 불려 나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눈물이 있고, 비명소리가 있고 비명소리가 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아직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붙잡혀 있고 싶다는 믿음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욥이 잘한 게 그거예요.
여러분 살다 보면 욥처럼 불평할 수 있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을 하나님과 하세요.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믿음으로 여기셔서, 자비와 긍휼 하심으로 여러분들의 인내를 견인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복음으로 위로가 되어서 고단한 일상을 다시 한번 주님 안에서 힘 있게 인내의 승리가 이루어지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오늘도 내 삶 가운데 끝까지 붙들어야 할 삶의 영역이 무엇이 있는가? 돌아보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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