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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새벽설교] 이사야 43:1-7 I 고난 걷기 I 삼일교회 I 이광일 목사

by №1★↑♥ 2021. 7. 16.

[새벽 설교] 이사야 43:1-7

고난 걷기

삼일교회 이광일 목사

 

  이사야서는 총 66장으로, 내용에 따라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39장까지는 대부분 저주에 대한 내용이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40-66장까지는 위로와 축복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원 독자들.. 처음에 읽었던 독자들은 구원자로 사용받는 고레스에 대한 이야기, 고레스로부터 바통을 받은 여호와의 종은 어떤 분인지? 그리고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생생한 미래적인 예언들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위한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선포된 심판과 저주 대신에 축복과 구원의 소식이었습니다. 진노와 심판 중에 숨겨져 있던 사랑이 점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의 고역이 끝이났다. 그리고 그의 죄악이 사함 받았다고 합니다. 40장은 회복을 알리는 시작입니다. 그런데 세 가지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1. 포로의 비극적인 상황 가운데 있었던 백성들에게 회복의 메시지
  2. 그들의 죄에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회복을 온전히 맛볼 수 있다는 메시지
  3.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진정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는 메시지

 

  오늘 이 새벽에는 회복과 구원의 안식이라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지를 본문 2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축복의 회복과 구원의 안식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첫번째로는, 물이라는 단어와 불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물과 불은 고난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로 보아야 할 것은? '지나다', '건너다'라는 단어입니다. 진행을 함의하는 지나다, '건너다'라는 단어는 한 마디로 말하면 '걷다'입니다. 실제로 고난과 마주해서는 성경이 '걷다'라는 표현을 은유적으로 사용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시편  23: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어둠속을 걸어간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고난을 걷다. 걷다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 물을 지나간다를 보면, 시편 69:2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오늘 본문 2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 가운데로 지나간다. '걷다'라는 표현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종합해보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뭐냐 하면? 고난을 걷다. 성경은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고난은 걷는 것이다. 당시 고대인들은 고난을 받아들이는 삶의 모습이 우리와는 조금 달랐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그저 참고 견디어 내야 하는 일로 보았습니다. 어두움과 소용돌이치는 물 그리고 아주 뜨거운, 사나운 불길은 인내하면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겪으면 충격을 받거나 놀라지 않는 것이 고난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괴로움, 연약함을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망하거나 두려움에 얼어붙지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항복하거나 좌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고난 앞에서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을 고난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대처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성경은 고대인들이 가졌던 이 고난에 대한 개념을 잘 알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고난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은 시련을 겪지 않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시련 속에서, 아픔 속에서 너희의 고난과 함께 나란히 내가 걸어가겠다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시편 23편 4절을 다시 읽어보면 다윗은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오늘 본문 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네가 고난 가운데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다. 이 약속은 약 150년 후에 사람들의 현실 안에 문자적으로 실현이 입니다. 다니엘서 3장을 보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젊은이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의 바벨론식 이름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였습니다. 이들에게 정권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절을 해야 한다는 강요받았지만, 그러나 이들은 절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소식이 왕의 귀에 들어갔고 왕 앞에 불려 갔고 "당장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끔찍한 죽음을 맛보게 될 것이다."라는 협박을 받습니다. 그때에 이들은 아주 유명한 대답을 하지요.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지 못했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와 맞든 지 어긋나든지 한결같이 그분을 따를 것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런 대답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색이 변하여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불을 달구었고, 이 불 가운데 이들을 밀어 넣었습니다.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들을 밀어 넣었던 병사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불 가운데 있었던 이 세 젊은이를 보고 놀라서 급히 일어납니다. 다니엘서 3:23-25 '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네 번째 인물은, 느부갓네살 왕과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합니다.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세 젊은이가 불길 가운데 들어갔을 때에 단숨에 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네번째 인물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25절 이후의 말씀을 좀 더 살펴보면 네번째 인물은 불속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궁금증이 생길 수 있지요. 네번째 인물은 누구인가? 불은 고난을 상징한다고 했는데, 이 세 젊은이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 함께 동행하며, 걷고, 고난을 견디어 낸 인물이 누구일까? 구약학자 볼딩게이는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네 번째 인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주변에 거하시며, 그들을 공경에서 구하시는 하나님의 돕는 자, 하나님의 탁월하신 에너지를 통해 해를 입히는 세력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불로 들어가신다. 젊은이들의 복과 성공의 삶은 위험이 전혀 없는 승리의 방식으로 다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방식으로 다다랐다. 그들은 정원에서 거니는 것처럼 자유로웠다." 이 해석을 들어보면 우리의 머릿속에 한분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구약학자 알렌 모티어는 노골적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네 번째 인물은 자비로운 돌봄과 겸손으로 임재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 젊은이는 극심한 풀무불, 극한의 고통 가운데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불 가운데서 전혀 상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원에서 즐겁게 거닐듯이 자유로움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경험하게 될 때, 회복의 축복, 구원의 안식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사야서의 예언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와 축복을 하셨던 이 말씀은 "내가 너희의 고난을 제거해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내가 너희의 고난 가운데 함께 걸어가겠다."는 위로와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회복의 축복, 구원의 안식은 고난 가운데 있을 지라도 그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것. 함께 동행하는 것. 이것이 회복의 축복이고 구원의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예수님의 자리에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마음을 쏟아서 그분 앞에 우리의 이야기를 진실로 쏟아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불구덩이로 뛰어드셨는지에 대해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걷는 것입니다. 

  이것은 펄펄 끓는 우리의 일상의 열기 가운데 꼭 붙들어야 할 사실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놓지 말아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우리의 삶 속에서 기억하고 살아낸다면 우리가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의 한가운데에서도 우리는 함께 우리와 걷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부터 우리는 온전한 구원의 자유로움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회복의 축복과 구원의 안식이 바로 그 가운데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각자 처한 상황들이 다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한번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난에 대하여서 "하나님 고난이 제거되기 원합니다."라는 기도보다, "하나님 이 고난 가운데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인생 가운데 나와 함께 걷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함께 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큰 물과 불 속을 걷고 있는데.. 걷고 있는 이 과정 가운데 나와 동행하시며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이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리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며 지난날들을 제가 경험했던 아픔 가운데 눈물을 흘려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몇 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나의 무능력함 때문에, 그리고 이 내면에서 요동치는 감정 때문에 아파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 웃고, 울고, 즐기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는 이 현실이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이 판단, 선택, 결단으로 인해서 지쳐가고 있는 아내와 상처를 받은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볼 때에 그리고 나보다 더 고민하는 부모님들을 볼 때에 마음이 더 아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 고난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고통의 불길 속에서 가끔은 너무 뜨거워서 아무 말 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가끔은 그 불이 너무 뜨거웠지만 물리적으로 감각이 되지 않고 무뎌지는 경험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고난을 즐기는 저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시간 이후에도 이러한 아픔과 눈물과 탄식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이 지금까지 나와 함께 걸어주셨고, 지금도 걷고 계시고 앞으로도 걸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의 인생 가운데에서도 정원을 걷는 것처럼 즐거움으로 걸어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확신이 생긴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성도님들에게도 이 믿음의 확신이 생겨나기를 축복합니다. 고난은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고난을 누구와 함께 걷고, 동행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에 함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 있고 요동치는 큰~ 물결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때마다 예수님이 함께 걸어가 주심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감사드리옵고, 우리가 이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마다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과 함께 손 잡는 회복의 축복과 구원의 안식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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