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story/설교문

[새벽설교] 잠언30:1-17 I 아굴의 잠언

by №1★↑♥ 2021. 6. 26.

[새벽 설교] 잠언 30:1-17

아굴의 잠언

 

  오늘 우리가 살펴본 잠언의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이렇게 시작하지요.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교훈한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디엘이라는 이름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이 부분에서만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누구인가? 에 대해서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디엘과 우갈이라는 것도 사람 이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히브리어로 '이디엘과 우갈'의 뜻을 보면 '이디엘'은, '하나님 내가 피곤합니다.' 그리고 '우갈'은, '그러나 이길 수 있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경대로 해석을 하면, 아굴이라는 사람이 이디엘과 우갈이라는 전하는 아굴의 교훈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 의미를 살려서 후자로 해석하면, '아굴이 말하는 피곤한 중에도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둘 다 좋은 의미이기는 합니다. 그리고 아굴이 말하는 교훈이라는 뜻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는, 겸손. 중용을 지킬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자족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본문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아굴은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스스로 사람이 되기에 부족한 짐승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승은 자기중심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을 하는 어리석고 미련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처럼 지각이 있어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아굴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하는 것만 보아도 사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나는 짐승과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그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미련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짐승 같은 사람은, 자기가 짐승 같은 존재라는 것조차 모르겠지요. 

 

  아굴의 이 고백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는 정말 부족하구나! 나는 정말 나약하구나! 나는 정말 지혜가 없구나!'하는 자기 스스로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고백인 것입니다. 3절,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자기 자신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혜와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겸손히 주님의 뜻을 찾을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거지요. 조금 전에 읽은 2-3절을 통해서 본 아굴은 스스로를 굉장히 낮추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2-3절의 말이 아이러니 한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굴은 스스로 지혜와 지식이 없다고 말하고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다음에 나오는 말. 4절 이하에 나오는 말을 보면 아굴에게 그 지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절의 질문을 보면, 그렇게 질문하는 것 자체로 이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게 됩니다. 진짜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4절,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라고 아굴이 누군가에게 묻습니다. 아굴이 이렇게 묻는 것조차 그가 이러한 일을 하신 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굴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사실을 5-6절을 통해서 더욱 확실히 보게 됩니다. '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6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4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질서를 유지하시는 위대하신 창조주라는 것을 아굴이라는 사람이 밝힙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데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합니다. 여러분 이 순전하다는 것은, 아주 순수한 상태로 찌꺼기나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도 100%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기 때문에 그대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시는 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위험이 틈타지 못하도록 그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6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기 때문에, 순수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 덧붙이는 것 그 자체가 큰~ 잘못입니다. 그 자체가 말씀의 순수성을 깨트리고, 훼손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너무 깨끗하고 너무 순수한 상태에서는 무언가를 더하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가 됩니다. 거울이나 유리가 너무 깨끗한 상태에 있었는데 한 아이가 그걸 닦아보겠다고 깨끗한 걸레로 닦으면 어떻게 될까요? 얼룩이 남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뭔가를 더 좋게 하기 위해서 그 위에 얹는 행위 그 자체가 원래 그것을 훼손시키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한 것이기 때문에 순전한 말씀 그 자체로가 깨끗하지, 사람의 지혜로 이렇게 하면 말씀이 더 분명해질 거야.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더 잘 이해될 거라고 하면서 더하는 것 자체가 그 말씀을 훼손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훼손하면 어떻게 되냐? 하나님이 그를 책망하십니다. 아무리 지혜를 짜내어하는 말이라도 거기에 사람의 말이 덧붙여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훼손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책망하고, 그는 결국 거짓말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인이었습니다. 까닭없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중에 하나님께 책망을 받습니다. 왜죠?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원한다."라고 했다가 책망받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얘기해보고 싶다.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신 이유가 뭔지 얘기해보고 싶다."라고 했다가 책망을 받습니다. 그게 왜 책망 거리가 될까요? "얘기해보고 싶다."는 말속에 교만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얘기할 수 있는 존재라는 교만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과 맞서 대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욥에 마음에 그런 교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어~' 그런 반응에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나요?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너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 어디에 있었니? 너 내가 하늘의 끝에 있을 때 어디에 있었니? 바다의 깊은 곳에 있을 때 어디에 있었니?" 욥이 대답하실 수 없는 질문을 계속하십니다. 욥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제야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지요. 이 아굴의 잠언도 비슷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굴처럼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지혜도 없기 때문에 내가 아는 아무리 선한 것도 주님 앞에서는 불순물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겸손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7절에서 아굴은 두가지 일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것을 과거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내가 구하였사오니' 그러니까 과거형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께 기도해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한 표현으로 내가 죽기 전에 거절하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 드러납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크게 보면 2가지, 작게 나누면 세가지입니다. 8절에 그 내용이 언급됩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첫째로,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소서. 헛된 것과 거짓말은 같은 말입니다. 없는 말을 지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 율법으로 금지하시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분명히 거짓 증거 하지 말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번재로,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극단적인 가난이나 극단적인 부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사람은 지나치게 가난하거나, 지나치게 부하면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너무 가난하게 되면, 삶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서 신앙생활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너무 부자가 되면, 유혹과 시험이 많아져서 또한 믿음을 유지하기가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 간구가,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필요한 양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말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최소한이 무엇이었습니까? 만나와 메추라기였습니다. 광야 400년의 시간 동안 이스라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만족하며 충분히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더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더 가질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필요한 양식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냐? 매일매일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너무 가난하게 살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 부자로 살면,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해서 앞으로 당분간은 은혜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그때에 맞게 주어지는 양식으로 살면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내일은 또 내일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굴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의 영적인 건강을 유지해가는 좋은 길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9절 말씀에서는 8절에서 간구의 이유가 나옵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아굴은 두 가지의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 자신이 지나치게 부자가 되었을 경우 하나님을 부인하고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물질적인 부를 갖게 되면 마음의 간절함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조금 전의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로, 내가 잘해서 부자가 된 것 같은 교만이 그 마음에 생겨날 수 있습니다. 잠언 기자는 그것을 경계합니다. 이미 나에게 풍성한 은혜가 있어서 더 이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까 봐 잠언의 기자는 "너무 큰 부는 주지 마십시오."라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남의 것을 훔치려는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봐 걱정하며 그렇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지독한 가난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소액 절도범에 관한 뉴스가 나옵니다. 마트에 작은 것을 훔쳤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끼니 때문에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절박한 상황이 되면 죽지 못해서 살아야 하니까.. 그런 상황이 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이 오게 되면 나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내 자녀가 며칠을 굶고 있는데 빵을 훔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들까 봐 너무나 두렵사오니 제 삶을 지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아굴은 하나님께 스스로 정도를 걸을 수 있도록, 중도를 걸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한쪽에 치우친 삶을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내 의지로, 내 상황적인 형태가 중용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기도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면, 그 종이 너를 저주하고 그것으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당시에 종은 상전에게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피해를 입히면 당해야만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에 대해서 무심결에라도 나쁘게 대하는 것은 그 종에 대해 큰 어려움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당신 집에 어떤 종을 보니 참~ 나쁘더라~" 그렇게 무심코 한 말이 그 종에게는 큰~ 피해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종이 하나님께 탄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 너무 억울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주'라는 표현은, 직접 상대방을 향하여 무서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하소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는가? 약하고 소외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탄원을 들으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종을 비방하나 너에게 벌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1-14절에는 어리석은 무리들이 나옵니다. 11절에는 부모를 저주하는 무리들이 나옵니다. 12절에는 스스로 깨끗한 척 하지만 사실은 더러운 무리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13절에는 '눈이 심히 높은' 이것은 교만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14절에는 치아를 비유해서 표현하는 데,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착취하는 무리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모를 저주하고, 스스로 깨끗한 체 하지만 사실은 더럽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무리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는가? 그 이면에는 교만과 탐욕이 있다는 것을 그 뒤에 말씀에 이어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15-16절에서는 탐욕스러워서 만족을 모르는 것들이 나옵니다. 아주 탐욕스러워서 만족함이 없습니다. 계속 끊임없이 요구하는 존재들 '거머리', 16절, '계속해서 삼키려는 스올', '아이를 베지 못하는 태', '물로 채울 수 없는 땅', '족하다고 하지 아니하는 불' 등 계속해서 요구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탐욕스러운 자들이 어떻게 되는가? 17절에 결론이 나옵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그 사람의 눈이 골짜기에 있는 까마귀에 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 더 이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말이 더 무서운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까마귀와 독수리는 성경에서 부정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까마귀와 독수리는 시체.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시체는 부정하지요? 부정한 시체를 먹는 동물이니까, 당연히 부정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까마귀가 눈을 쪼았다는 것은? 그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까마귀가 죽어 있는 사람의 눈을 먹을 수 있다는 건 그의 장례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돌로 만든 무덤 혹은 땅에 잘 묻혔다면, 까마귀가 시체를 훼손하지 못하지 않았겠습니까? 길거리에서 죽었다. 비명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끝없는 탐욕에 물들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저주가 있을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만족을 모르는 거머리와 같아서는 안됩니다. 스스로 자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굴이 말하는 교훈을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가난하지도, 너무 부하지도 않는 중용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나의 탐욕을 억누르고 나의 욕심을 잘 다스려서 자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굴의 지혜.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겨서 겸손하게 또한 중용의 삶을 살며 스스로 자족할 줄 알아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지혜인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 앞에서 겸손하게 하시고 너무 가난하지도, 너무 부하지도 않는 중용의 삶을 잘 살아가게 하시고 내 탐욕을 억누르고 욕심을 잘 다스려 스스로 자족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