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그래서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이 너희와 같이 되었다.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이 되었다는 게 뭐냐? 여태까지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되는 율법의 문제를 가지고 계속 말씀을 나누었는데.. 복음을 위하여 내가 유대인으로 지켜야 될 율법, 정결 예 이 모든 것들을 너희를 위하여 기꺼이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붙들고 너희와 함께 나아간다. 그래서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하면 '너희'는 갈라디아 교회인데, 이들이 유대인처럼 다시 절기를 지키고,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으려고 하는 그들을 다시 붙들고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도 나와 같이 복음의 유연성을 가지고 율법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로 사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복음을 따라 사는 자가 되기를 원하노라' 얘기를 하는 것이지요.
지금 이곳에 펼쳐지는 신앙의 전성기
이런 모습이 고린도전서 9장에 보시면 좀 더 쉽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것에 얽메이고, 그들에게 맞춰주는 살 필요가 없지만 내가 그들을 맞추어 주고 그들과 비슷하게 되려고 한 것은? 그들을 섬기게 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20절에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절 '율법 없는 자에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자, 그러면 율법 없이 살면, 방종하게 사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 없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율법 규정에 따라 절기와 해와 달과 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고, 기뻐하시는 방향대로 걸음걸음을 걷고,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사는 새로운 법. 그리스도의 법이지요. 그 법의 핵심과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에는 사랑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22절에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어떻게든 복음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여러가지 모습을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23절에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그래서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유연하게 감당하는..
그래서 다시 오늘의 본문 12절로 오시면,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는 건? 복음을 위해서 너희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방인과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 것처럼 비본질적인 것에 얽매이다 보니까 사도 바울을 처음에는 그렇게 고마워하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믿음으로 살고 예수 믿는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자유가 있는데 자꾸 이것도 해야 한다. 저것도 해야 한다. 안 하면 구원 못 받는다 하나님의 백성에서 나가떨어진다. 그러니까, 마음이 굳어지게 되고 사도 바울이 거짓 교사와 같고 사람들을 정죄하기 시작하고 '나는 하는데, 왜 그것도 못하냐?'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이 거칠어지면 믿음의 열정이 식어지고, 옛날에 그 뜨거웠던 믿음 생활이 예전과 같지 않아 지게 되지요. 그래서 12절에 보면, '..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이 내게 예전에는 그렇게 해롭게 하지 않고, 나에게 잘해주지 않았느냐? 나를 고맙게 여기지 않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3절에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육체의 연약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래? 저 사람 보니까, 예수 믿으면 안 되겠구먼?' 요런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절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아, 예수 믿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들어주시고, 인도해주신다고 하는데 여전히 내 안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보면 시험거리가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약함이 뭘까? 크게 두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안질입니다. 이 눈의 질병이 있었던 이유는? 추측하기로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강렬한 빛 때문에 쓰러져서 눈에 비닐 같은 것이 씌어서 며칠을 보지 못했지요. 그때에 얻었던 눈의 질병, 안질을 얻지 않았느냐? 그래서 평생 이 눈의 병으로 고생할 때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기억하며 아픔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중심을 지키는 육체의 가시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합니다. 그래서 15절 중반에 보면 '..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눈이라도 빼서 사도 바울에게 주고 싶을 만큼 사도 바울을 끔찍이 여겼다는 거예요.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로 지목되는 것 중 하나가, 간질이 아니냐? 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복음을 전하다가 거품을 물고 쓰러지면 사람들이 귀신 들린 게 아니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러냐? 비난하지 않았겠습니까? 어쨌든 육신의 결함. 육신의 약함이 있으면 복음을 증거 하는 데 장애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가서 육신의 약함이 있었지만 복음을 증거 할 때에도 이들은 사도 바울을 오늘의 말씀 14절 중반에 보시면 '업신 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여기서 '버리지도 않고'는 직역하면 '침 뱉지도 않고' 그러니까 무시하고, 멸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사도 바울을 하늘의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을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15절에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이 말은 너희들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가 들어와서 "사도 바울 가짜야, 너희 그러다가 구원도 못 받아! 빨리 할례 받아! 빨리 율법 지켜~" 이러니까 사람들이 불안해지면서 사도 바울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이 사람들의 이간질로 사도 바울을 원수와 같이 아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참된 말을 함으로는 '알레듀오'라는 말로 '진리를 선포함으로'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선포했다고 해서 너희와 원수가 되겠느냐?"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은 거짓 진리를 선포하는 거짓교사들의 꾐에 빠져가지고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게 되는 일로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거짓 교사들의 의도, 실체를 이야기합니다. 17절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이게 이단들, 거짓교사들의 핵심적인 지침 사항이 사실 17절입니다. 이단 단체에 가게 되면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너무너무 사랑해주고, 잘해주니까 천국이 따로 없구나?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열심을 내는 것은 17절에 뭐라고 합니까? '좋은 뜻이 아니요' 깊은 곳으로 가면, 정말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그래서 모든 이단들은 들어가면 자신들이 다녔던 기성 교회들과 이간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다니는 교회는 바벨론 세상이다. 진리가 없는 비진리의 세상이다. 너희가 다니는 교회는 거짓이 횡행하는 곳이다. 거기 다니면 구원받지 못한다." 특히 바울을 공격했던 것처럼 "너희들이 다니는 교회의 목회자, 목사님 진리를 제대로 아는 줄 아느냐? 거짓 진리만이 가득하고 너희들에게 참 진리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때에 결국 그런 목자 따라갔다가는 영원을 잃어버린다." 그러면서 "빨리 거기서 나와라." 고 한다는 거예요. 결국은 뭐냐?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는 것. 거짓 교주들을 향하여 열심을 내게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위하여 삭~ 들어가서 이간을 시키는 거지요. 이 갈라디아서 4장 17절의 말씀은 모든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들어가서 이간시켜, 갈라서게 하고, 비방하고, 결국은 거기서 나와서 자신의 단체들을 위하여 열심을 내도록..
18절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좋은 일을 위하여, 예수의 몸을 이루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지금은 온통 교회의 에너지가 사도 바울을 비난하고 사도 바울에게서 갈라서게 하고 엉뚱한 거짓 진리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데 쏟아부으니 안타깝다는 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품고 사랑했던 자녀들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Christ is formed in you.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너희들 안에 빚어지기 까지.. 성도들이 다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게 교회인데 지금까지는 찢기고 분열되어가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다시 하나가 되고 섬기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열심을 내고 바울을 사랑하면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이 잘 드러나길.. 그래서 여러분 교회는 하나하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함께 서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냥 다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함께 예수의 형상을 이루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선명하게 드러나기까지 내가 '..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이 해산의 수고라고 하지요. 다른 말로 하면, 다시 이들이 진리 가운데 복음 위에 든든히 서는 것이 참~ 어려운 해산의 수고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거짓 교사들에 의해 휘둘려서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고, 거짓 교리에 경도되어서 빠져 있는 것에서 돌이킨다는 것. 정~ 말 해산의 수고와 같이 진이 쫘악 빠질 만큼 쉽지 않지만, 그 수고를 사도 바울이 다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20절에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너희들이 자꾸 이런 식으로 하는 데 내가 소리를 좀 높여서 내가 정신을 좀 차리라고 언성을 높여야겠다.
여러분, 이런 것을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전에 사도 바울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믿음의 전성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성기가 지나고 이제는 변질이 되고 변색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매일매일 하는데, 기쁨보다는 미움, 원망, 이런 것들이 자꾸 올라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맛이 별로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힘들긴 하지만 여전히 그리스도를 붙들고 다시 예전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고 이들을 붙들고 다시 씨름하는.. 힘들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면, 사도 바울 개인으로써는 본인의 믿음 생활에 있어서 또 다른 단계로 도약하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무너졌던 이들을 다시 붙들고 예수의 형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도록 헌신하는.. 이전에는 해보지 못한 또 다른 깊고 높은 차원의 전성기로 올라가게 되는 거예요. 내가 이들을 여기까지 붙들 수 있다. 이전에는 사랑해주는 정도로 감사하고 행복했는데, 어려워도 내가 이들을 더 끝가지 사랑하리라. 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모습을 닮는 아름다운 전성기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것으로 보면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 신앙의 전성기가 이미 지나서 빛바랜 믿음 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내가 예전에는 이렇게 열심히 했었었었었는데.. 그때가 좋았었었었는데.." 다 옛날에 그랫었었었는데.. 그때가 좋았지.. 이런 이야기만 하고.. 여러분 믿음 생활의 전성기가 지금 우리에게 늘~ 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예전과는 다른 국면입니다. 사도 바울도 물론 복음을 뜨겁게 전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들이 무너졌기에 다시 이들을 붙들고 믿음으로 일으켜 세우는 정말 힘든 과정이지만.. 새로운 믿음의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믿음 생활이 이전에 늘 평안하고 좋은 상황만이 아니라,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온 몸으로 받고 이것들을 다시 붙들고 일으키고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붙들어 주고, 눈물로 호소하고 해야 하는 과정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전성기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계속 과거에 좋았던 한 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진전하고 전전하고 우리 인생의 전성기가 바로 지금이 되어야 할 줄이 믿습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여러 가지 차원이 우리에게 펼쳐지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통해 더욱더 성숙하고, 더욱더 그리스도를 향하고, 더욱더 주변 사람들을 붙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주님께 의지하며 나아가며.. 이것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에 더 깊이 동참하고, 복음의 동참에 더 뜨겁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게 되지요. 이러한 몸부림이 우리에게 오늘날도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지치고 나가 떨어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다시 일으켜 붙들고 함께 세워가는 일들이 정말 지치고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섬김과 수고로 다시 성도들을 일으킬 수 있다면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도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믿음의 전성기를 향하여 나아가는 줄 믿습니다. 이전과는 다르지만 더욱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달려갈 수 있는 전성기의 성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신앙의 전성기가 오늘이 되게 하시고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때가 지금이 되게 하시며 주께 순종하는 때가 내일이 아니고 지금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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