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저녁기도회. 넷째 날. 마가복음 15장 1-15절, 빌라도의 선택, 서부교회. 임채영 목사.
빌라도의 선택 I 마가복음 15장 1-15절
오늘 네 번째날.. 오늘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고별설교를 하십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를 하신 후에 가롯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되십니다. 그리고 다음 날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오늘 본문 12절에 보시면 그는 재판의 자리에서 재판관의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이런 외침을 토해냅니다. 너희들이 유태인의 왕이라고 하는 이 자를 내가 어떻게 하랴 내가 이 자를 이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결론을 잘 압니다. 그는 결국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바로 그의 이러한 선택과 결정 때문에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이 사람은 크리스천의 입술에서 영원히 비극적으로 회자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많은 교회서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 가운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렇게 회자되는 인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빌라도의 선택 어떤 선택이었을까요? 우리는 그의 선택에서 경고받아야 할 그릇된 선택의 레슨을 역설적으로 교훈받을 수가 있습니다. 빌라도의 선택 어떤 선택일까요?
첫째로, 그는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 선택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15절은 본문의 사건에 대한 일종의 결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에서 빌라도의 선택의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결단을 했다' 그의 선택은 자기 확신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군중들의 압력에 따라 내린 결단이었어요. 자기 확신과는 정 반대의 결단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말하니까 나도 그렇게 말하고 세상이 이렇게 행동하니까 나도 그렇게 행동하고 세상이 이런 옷들을 입도록 요구하니까 나도 맹목적으로 유행에 따라가고 세상에 편승하는 삶. 세상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때때로 이 세상은 잘못된 방향으로 얼마든지 나갈 수 있는 위험한 가치관의 함정을 가진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군중 심리가 개인의 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한 실험을 했습니다. 비슷한 크기의 두 판에 하나는 검은색으로 칠하고 또 다른 하나는 회색으로 칠했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과 50명의 학생 중 40명의 학생들끼리만 미리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은 이러했습니다. 선생님이 "어느 판이 검은색입니까?"라고 물으면 40명의 학생 모두가 회색 판을 가리키기로 한 것입니다. 이때 나머지 10명의 학생들이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는가를 보는 실험이었습니다. 심리학자는 이 실험을 열 번에 걸쳐 실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열 명 모두가 진짜 검은색 판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계속 실험을 반복하자 마지막에 가서는 한 명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9명이 모두 회색을 검은색이라고 가리켰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진리를 좇기보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결코 물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내어 맡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무리 큰 바위와 우람한 나무라도 물에 하염없이 물에 떠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속에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송사리와 같이 작은 물고기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물고기들은 나이아가라와 같이 엄청난 폭포수도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 엄청나게 커졌지만, 영적으로는 생명력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며 말씀하신 대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게 되었으며 부자가 되어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계 4:! 5-16). 왜 한국교회가 생명력을 잃었습니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주셨는데,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는 세상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세상의 탁류에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하나님께서 촛대를 다른 나라로 옮기시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아니 벌써 옮기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교회는 대형 교회가 아닙니다. 흔히 작은 교회는 "힘이 없다."라고 말하지만, 이 말은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지, 교회의 생령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력으로.. 이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의 공동체.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리를 가르칠 때 잘 아는 로마서 12장 2절에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초대교회 시절에 콘스탄티노플의 초대교회의 유명한 설교자요 교부였던 크리스소스톰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교회에서 중대한 한 가지 결정을 내렸을 때 주변 사회가 그 당시의 세상이 아주 들끓면서 교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자기의 참모가 이 보고를 올렸을 때 크리소스톰은 이런 유명한 말을 한 것으로 전해 내려옵니다. 온 세상이 반대한다고? 그러면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해야지. 그러면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하리라. 이 흔들릴 수 없는 확신. 확신. 그러나 대부분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세상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적당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교회 나온다는 사실만 빼놓고 주일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 빼놓고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정말 우리는 다를까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우리도 너무나 쉽게 세상을 모방하고 또 세상을 따라가고 또 세상 속에서 오히려 삶을 우리가 배우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세상을 카피하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교회는 나와 있지만 별수 없는 세상의 사람은 아닌지라는 질문입니다. 남이 그렇게 사니까 우리도 카피하는 거예요. 우리는 삶을 성경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배우지 않아요. 이웃들에게서 세상에서 배우고 세상을 그대로 카피하고 세상의 무리들처럼 우리도 그 흐름 속에 우리를 인생을 맡기고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요. 군중 심리에 의한 삶. 그것이 빌라도의 삶이었고 그것이 빌라도의 선택이었습니다.
둘째로, 빌라도의 선택은 세상의 가치를 향한 선택이었습니다.
왜 빌라도가 무리를 맹목적으로 따라갔느냐, 빌라도의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군중을 따라가는 것이 자기의 삶을 안전하게 만들고 자기의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빌라도의 가치관이 있었다면 그의 가치관 제1호는 출세였을 것입니다. 출세하는 것. 오늘 본문의 사건에 보면 빌라도가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에게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해서 빌라도가 질문을 던집니다. 이 기사는 본문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4 복음서에 공히 이 빌라도의 사건이 실려 있습니다. 빌라도가 많은 질문을 해요. 그것이 사실을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질문을 하는 것이라면 그 질문은 필요한 것이고 진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본문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앞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빌라도가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24절에 보시면 '바라바' 대신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을 내리는 이유를 마태는 설명하기를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빌라도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빌라도를 놓아줬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면 유대를 다스리는 총독으로서 내 입지가 불리해지지 않겠느냐 그것이 빌라도의 계산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입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 여기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했다. 예수를 놓으려고 한 것이 그의 원래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유태인들이.. 예수를 놓아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요, 아니 당신은 가이사 로마의 가이사 황제를 반역하고 있는 것이요. 그런데 그다음 13절에 보시면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는 판결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빌라도는 철저하게 자기의 입지만을 생각했어요. 물론 인생을 살면서 내 입지 내 출세 내 안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생각해야죠. 그러나 그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결정할 때에 이것이 정당한 행동이냐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기뻐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없어요. 나를 유리하게 한다고 하니까 나를 출세시킨다고 하니까 출세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던 사람 그것이 빌라도입니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은 기복이 있어서 (지난번에 성경공부하면서, 기복신앙이 뭐냐고 했더니.. 한 자매가.. 어떤 때는 신앙이 좋아졌다 어떤 때는 신앙이 나빠졌다 하는 신앙이라고..) 복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되어버린 신앙을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형태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전적으로 복을 받기 위해서 믿는 것이 되는 거죠. 집안에 문제가 있으면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하고 문제 풀리면 교회도 잘 안 나오고.. 뭐 그러한 신앙의 형태가 이러한 기복신앙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이 기복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복주머니로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복주머니.. 또는 우리를 지켜주시는 수호신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주권자 하나님이시거든요 개념이 완전히 거꾸로 되는 거지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신앙도 굉장히 많이 삐뚤어진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검증될 수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본래 유대 땅에서 제5대 총독이었습니다. 로마에게 파견된 다섯 번째 총독이었습니다. AD 26년부터 36년까지 정확하게 10년간 팔레스타인 유대땅의 총독으로 빌라도는 제위 했습니다. 유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셉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잔인한 총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지나치게 로마에게 아부했고 로마 황제 숭배를 강요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였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던 사람. 그래서 그는 다른 총독보다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안에 머물렀어요. 보통 한 5,6년 하고 떠났는데 이 사람은 10년 동안 했습니다. 그의 아부 그의 출세욕 그의 처세술이 10년간 총독 자리를 지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떻게 됐을까요. 결국은 사마리아 학살사건이 일어났는데 사마리아인을 학살하게 됩니다. 빌라도가 로마의 정부가 이 소식을 듣고 빌라도를 소환합니다. 중앙정부에서 빌라도가 소환을 받지 이제는 자기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한 빌라도가 자살을 합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종말이예요. 자살로 끝났습니다. 조금 더 그 자리에 있었지만은 결국은 자살로 끝난 인생. 자기의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 잃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얻을 수가 있다. 빌라도의 삶은 이 진리를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출세가 가져온 파멸, 출세를 소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출세만 생각하는 출세의 가치관이 다른 모든 가치관을 압도해 버린 출세지향적인 선택의 비극 그것이 바로 빌라도의 비극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성공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대부분이 자신의 뜻, 자기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라고 자기의 계획이 이루어지면 성공,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말한다. 자기의 성공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당연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하나님께.. 가족에게.. 사실은 자기예요.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이유가 무어이냐고 물으면, 다른 사람이 도움을 안 주거나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의 구도를 가지고 있기에 일을 이루면 교만해지고, 일을 이루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믿음이란 이 구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표가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할 때, 다윗은 분노하며 나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불신자는 자기의 이익 때문에 분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분노합니다. 주어가 하나님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강합니다.
대학 수학 능력 시험 때가 되면.. 기도를 더 열심히 해요. 저도 기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교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절에서도 빌고요, 성당에서도, 그리고 점집에서도 수험생의 어머니들은 자식이 좋은 점수를 얻게 해 달라고 정성을 다해 빌었습니다. 부처님께도 비록, 하나님께도 빌고, 조상님께도 빌고, 천지신명께도 빌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어느 종교에서 대학을 가장 많이 보낼까? 기독교인들의 자녀들이 가장 많이 대학에 갔을까? 누가 조사해 봤으면 좋겠어요. 만일에 다른 종교에서 대학을 더 많이 갔으면 그 종교가 더 능력 있는 걸까요?
우리가 저들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저들 우상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혹시 우리가 하나님을 다른 우상들과 동급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우리 자녀들이 수능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기 위해서입니까? 기독교 가정의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좋은 지작 얻고, 출세하기 위해서입니까? 기독교 가정의 자식들이 출세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까? 그러면, 수능 시험에서 좋은 성적 얻지 못하면, 좋은 대학 가지 못하면, 좋은 직장 얻지 못하면, 출세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까? 좋은 성적을 얻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출세한다는 것은 결국 이 메마른 경쟁 사회에서 승자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 경쟁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에 어그러지는 모습은 없을까요?
좋은 성적을 못 얻어도, 좋은 대학에 못 가도, 좋은 직장을 못 얻어도, 크게 출세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기독교 부모들도 없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경쟁해서 이기려고만 하는 기독교인들, 그런 교인들을 밀어주는 교회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반드시 출세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좀 달라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미국에서 만난 권사님.. 일찍이 혼자되어서 미국까지 와서 아들 하나 바라보고.. 그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 결혼해서 가정도 이루고 그리고 지금은 한국의 대기업에서 그러면서 저에게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도할까요? 믿음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런 과정에서 믿음 없는 며느리를 만나서 아들이 교회를 떠났어요. 쫄딱 망해도 좋으니 믿음을 다시 회복하게 해달라고.. 저는 처음 봤어요. 아들을 망하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어머니는..
세 번째는, 빌라도의 선택은 양심 회피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양심회피적인 선택, 오늘 본문에 14절에 보시면 빌라도가 이렇게 소리칩니다. 이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예수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예수가 잘못하지 않은 것을 알았어요. 본문의 10절을 보세요.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대제사장들이 시기해서 예수를 시기해서 예수의 인기가 높아지고 같은 종교인으로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자리가 좁아진다고 느끼고 예수를 코너로 몰고 십자가에 죽이기로 그들은 결정하고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했어요. 예수의 무죄를 빌라도는 알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 27장의 기사에 보면 빌라도 총독이 재판을 진행 중인데 메모 하나가 올라옵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보낸 메시지예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 올바른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소서. 그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요. 내가 꿈자리가 이상하오." 빌라도의 아내가 무슨 꿈을 꾼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그 올바른 사람에게 당신이 관여하지 마시오. 그래서 빌라도도 부단히 예수를 놓아주고자 애를 씁니다. 세 번씩 그는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판결합니다. 그는 예수가 무죄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는 끝내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판결합니다. 그는 예수가 무죄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확신과 정반대의 결단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양심을 배반하는, 양심을 거스리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양심을 따라갈 수 있는 용기가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저 유명한 도스토옙스키는 말하기를 양심이란 우리 인간의 내면의 존재 속에 신이 주신 목소리다. 우리 내면 존재의 내면 안에 신의 목소리 신이 주신 목소리 빌라도의 양심은 소리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무죄야 아니 빌라도의 양심은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그리스도일지도 몰라. 인류의 구세주일지도 몰라. 마태복음은 이렇게 소리쳤거든요. 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양심은 그리스도의 무죄를 그리스도의 정당성을 그리스도의 구세주이심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기 양심과 정반대 되는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을 합니다.
이 결정 위에 마태복음 27장의 기사에 보시면 이 결정 직후에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빌라도는 손을 씻습니다. 마태복음 27:24입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손을 씻는 빌라도의 심리는 뭘까요. 나는 직접적인 책임은 없어 나는 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손을 씻어요. "나는 죽이고 싶지 않았어. 나는 예수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 그 사람의 내면의 양심은 소리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너는 비겁자야. 너는 네 양심을 거스렀어. 너는 네 양심을 불순종했어 너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슬렀단 말이야." 우리가 우리의 내면의 양심을 따라간다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 확신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내 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일제 말기에 이 땅에서 살았던 크리스천 지성인 시인 윤동주의 심정은 그러했을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세상이 뭐라 그래도 세상이 뭐라 그래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신앙 양심을 따라 내가 걸어가야 할 내 인생의 길을 나는 묵묵히 걸어야 한다. 이것이 나에게 출세를 보장하지 않아도 나는 올바른 길을 내가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밤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을 함께 하려고 합니다. 세수식.. 우리의 손을 씻는.. 빌라도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부인하며 손을 씻었지만, 오늘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며, 나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우리의 손을 씻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신앙 양심이 아니라 세상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처럼 살아가지 못했던 빌라도가 바로 내 모습이 아니었는지요. 주님의 기대처럼 살아가지 못했던 내 모습을 인하여 주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 우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바꾸어 주시옵소서. 빌라도가 바로 나였습니다. 예수를 팔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줄 알면 서도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빌라도는 다름 아닌 나였습니다. 주님 우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의 죽어 있었고 무디어 있었고 하나님 더럽혀진 우리들의 양심을 이 시간에 일깨워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우리를 살아나게 도와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주 앞에 새로운 존재로 서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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