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저녁기도회. 다섯째 날. 마가복음 15장 42-47절, 아리마대 요셉의 선택, 서부교회. 임채영 목사.
마가복음 15장 42-47절 I 아리마대 요셉의 선택
- 서부교회 임채영 목사 -
금요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수난의 날입니다. 예수께서 새벽에 붙잡히시어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 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매달려 계셨습니다. 마지막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가장 고통스러운 6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세요.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샤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숨어 버렸어요. 샤이 크리스천.. 우리 중에서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신자임을 밝히지 않고 숨으려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샤이 크리스천'으로 불립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을 알고 믿지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던 그때.. 용감하게 일어나서 옛님의 제자임을 밝혔던 한 사람이 있어요. 아리마대 요셉.
먼저, 성경은 이 사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43절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의 이름이 아리마대 요셉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아마 성씨는 요셉이고 이름은 아리 마대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라는 것은 본래 지명입니다. 유대 중앙 산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한 20마일 정도 올라가면 존재하는 한 작은 마을, 본래는 <라마다임소빔>이라고 불리워졌던 마을인데 바로 사무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거기 출신,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다. 왜 이렇게 구별할 필요가 있느냐 하면 요셉이라는 이름이 워낙 흔하고 보편적인 이름이니까 요셉아.. 하면 서너 사람이 함께 대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 이런 구별이 필요했던 거죠.
이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같은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기사를 읽어보면 이 사람은 아주 본래 일찍이부터 예수를 믿고 따르던 제자였다는 기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시면요. 요한복음 19장 38절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재미있는 것은 예수의 제자지만 제자이나.. 이 뉘앙스가 아주 흥미롭지 않습니까? 예수의 제자나, 유태인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가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던 제자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신자인데, 회사에 가서는 예수 안 믿는 척하시는 분들, 친구들 만나면 절대로 교회에 다니는 티를 안내는 분들.. 이런 분들 계시지 않을지 모르겠어요? 이런 유형의 제자, 그것이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데, 겉으로는 더르내지 않는..
그런데 마침내 이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가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숨길 수 없는 시점 앞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가 예수의 제자인 것을 알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입니다. 무엇이 그에게 이런 변화를 주었을까? 우리는 자세히 동기를 성경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컨대 아마도 십자가 사건을 둘러싼 어떤 충격이 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그는 먼 곳에서 계속해서 아마 그는 주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던 그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을까요?
혹은 자신이 아픔과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함께 매달린 강도 중의 한 사람이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란 부르짖음 앞에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던 당당했던 그 모습, 그것이 그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캄캄한 어둠 이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향해서 내려오고 하늘의 빛을 잃어버린 그 순간, 마침내 그분이 운명한 후에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로마의 백부장조차도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마음에 변화가 왔을지도 몰라요.
어쨌든 그가 돌아가시자마자, 돌아가시자마자 이제 금요일 날 밤이면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안식일 시작되면 장례식을 지낼 수가 없습니다. 장례라도 지내드려야지. 그는 마침내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시체를 주어서 장사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는 드디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릴 수밖에 없는 공개적인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또 자기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숨기고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크리스천인 것을 숨기는 한 영향을 줄 수가 없어요. 편할지는 모르죠. 그러나 영향을 줄 수가 없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리마대 요셉이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리자마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일을 시작합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 19:38을 보십시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없는 구절이 뒤 이어 나와요. 39절입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 지라'
니고데모, 성경은 말하기를 일찍 예수께 밤에 나왔던 니고데모 여러분, 니고데모와 예수의 처음 만남 그 장면을 생각하십니까? 밤중에 나와서 예수님 앞에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는 중생의 도리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 후에 니고데모의 활동이 없잖아요. 그러니 니고데모도 비밀 제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아리마대 요셉이 공개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어떻게 됐어요? 그다음에 보면, 여기 39절에 일찍 예수께 밤게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이유, 성경은 밤에란 단어를 결코 침묵을 하지 않고 여기에 그대로 집어넣고 있습니다. 이 사람도 사회적 신분이 높을수록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리는 것을 힘들어하는 모습들을 많이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 찾아왔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런데 드디어 그 밤중에 찾아왔고 예수 믿는 것을 숨기고 있었던 니고데모도, 이 단어. 니고데모도 드디어. 드디어 장례 행렬에 참여하게 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니고데모를 이렇게 용감하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공개적인 선택의 결단이 니고데모에게 영향을 끼쳤어요. 우리 공개적 신앙의 고백은 영향을 끼쳐요. 주변에 영향을 끼쳐요.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삶에도 영향을 줍니다. 공개적으로 신앙을 선언하면 책임이 따라옵니다. 그것은 내 신앙 성숙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회사에서 여러분이 크리스천인 것을 알리십니까? 알릴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내가 광고를 안 해도요.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식사기도 한 번하면.. 야 저 사람 크리스천이구나 아 크리스천이로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담스러워서 회사에서는 전혀 예수님과 상관없는 척, 속으로 딱 하고 먹어 버리는. 틀림없이 웃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일단 정중하게 기도를 해 조세요. 아, 저 친구 크리스천이었구나 그다음부터 나를 주목한단 말이죠. 물론 그다음에는 책임을 져야 돼요. 크리스천다운 업무처리, 크리스천다운 성실성, 크리스천다운 정직함 이런 삶이 요구되는 것이죠. 나에게 도움이 돼요.. 그것이..
저는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인으로서 본격적인 삶은 바로 이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모르죠. 그전까지는 믿으나 마나 영향력이 없는 삶, 그러나 그가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 삶이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인 것을 주변에 드러내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샤이 크리스천'을 넘어 "나는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주변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예수님은 우리가 부끄러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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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번째 요셉의 모습을 보면.. 본문에서 마가는 요셉의 결단을 소개하면서 그 결단은 당돌한 결단이었다고 말합니다. 43절에 보세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뭐라고 그랬어요? 당돌히 빌라도에게. 당돌히 빌라도에게 시체를 요구했다. 당돌하게. 성경은 그것이 당돌한 행위였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당돌하게 다른 말로 바꾸면.. 대담하게 이 말입니다. 대담하게. 또 다른 말로 말하면 모험적인 행동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모험적인 선택이었고 결단이었습니다. 왜 모험이었습니까? 잘못하면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자기의 모든 지위와 출세의 탑이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그랬습니다. 공회원,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70명으로 구성된 소위 산헤드린이라고 불리워지는 의회가 조직되어 있었어요. 그중의 한 멤버예요. 국회의원 비슷한 사람. 자, 그런데 범법자로 붙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은 예수, 그가 예수 편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그는 가 그 사회에서 정말 문자 그대로 왕따를 당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제 무시를 받고 어쩌면 자기의 자리까지 잃어버릴 수 있었던 결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모험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주 앞에 구체적인 헌신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그의 삶이 영향을 주기 시작해요. 니고데모를 변화시키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삶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가 신앙생활 하지만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다 이런 분 계세요? 소위 신앙생활의 매너리즘, 주일날 예배 드리고 왔다 갔다 그것 밖에는 의미가 없는 사람, 변화가 없어요. 감격이 없습니다. 다이내믹한 삶의 생동감이 없어요. 무력한 매너리즘에 빠져서 그저 주일날 예배드릴 땐 뭔가 좀 느껴지다가 그다음에는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삶. 뭔가 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서 그래요. 주님을 따라가야지요. 그래야 거기에 우리 주님의 능력이, 기적 같은 역사가.. 예수님..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래야 주님을 따라갈 수 있어요. 오늘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있어서 그래요. 그러려면 희생의 각오가 필요해요.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 희생
희생을 시작해 봐요. 구체적인 희생 그리고 헌신을 해보세요 내게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 앞에 드리고 시간을 바치고 사랑을 바치고 그러면서 영혼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하는 구체적 헌신의 삶을 시작해 보세요. 인생이 좀 달라질 거예요. 주님은 주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런 모험적인 결단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험은 믿음의 모험이어야 합니다. 저는 모험을 다른 말로 말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믿는다는 것은 모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우리가 믿음의 장.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의 이름이 쭉 열거되고 그들이 살았던 모습이 증언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다 모험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노아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그 시대에 넘쳐나는 죄악을 보고 그 시대를 심판할 것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후에 홍수 심판을 작정하시고 나서 노아에게 배를 짓도록 명하십니다. 비가 올 징후가 전혀 없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 배를 지어야 하는 노아의 노력, 그것은 모험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주시고, 아브라함에게 네가 너를 위해서 약속의 땅을 준비했다. 그 약속의 땅을 향해서 떠나라. 익숙했던 오늘의 고향. 오늘의 친구들. 오늘의 가족들과 작별하고 그 땅을 새로운 땅을 향해서 떠나가는 것은 정녕 모험이 아니었겠습니까. 백 살이 다 되어서 얻은 아들. 그 아들을 하나님의 명하심에 따라 제단 위에 그 이삭을 눕혀 놓았을 때 그것은 정녕 아브라함에게는 모험이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이스라엘의 군중. 이백만에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이끌고 애굽 땅을 떠나, 노예 되었던 그 땅을 떠나서 약속의 땅을 향해서, 광야로 들어서는 순간 그것은 모세의 모험이 아니었겠습니까. 드디어 가나안 당에 들어왔지만 가나안 땅에 버티고 서 있었던 여리고의 거대한 성.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하심을 좇아서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을 거느리고, 하루에 한 바퀴씩 그 여리고 성을 돌고 있었던 모습은 바보들의 행진 같은 모험의 행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뿐만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을 본문이 소개하면서 계속 보면 이런 인상 깊은 단어들을 첨부하고 있습니다. 43절 맨 마지막에 보시면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그다음에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다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과거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었다가 아닙니다. 소위 현재 분사로 쓰여져 있어요.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 말입니다. 예수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그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었어요. 그는 구약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특히 이사야 53장 9절에는 예수님의 장례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사야는 700년 전의 예언을 통해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가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예언하였으며 또 죽은 후에도 부자의 묘실을 쓰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요셉은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예언된 말씀에 따라 요셉은 자신의 무덤을 주님을 위해서 내어 드렸습니다. 요셉에게는 무덤보다도 더 중요한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동정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무덤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이 너무도 처참해서 시신이라도 치워드리겠다는 그런 동정에서 요셉이 자신의 무덤을 내어 드린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는 기쁘게 자기의 무덤을 내어 놓았습니다. 자기 재산을 내어 놓은 것이지요.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내어 놓습니다. 그는 이제 지상의 부요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저 영원한 명예, 하늘의 부요를 찾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땅의 명예, 땅의 이름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명예.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어도 좋다. 아니 나는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고 나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나를 알아주신다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가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가 있다면 기꺼이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 앞에 내어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빛깔을 달리합니다. 그의 삶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붙잡히기 시작합니다. 쓰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의 인생은 역동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삶은 찬란한 빛깔로 하나님의 능력을 채움을 받고 성령충만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진짜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순간적인 이 땅에 있는 것, 지나가 버릴 명예 지나가 버릴 이름, 지나가 버릴 부요에 그의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의 선택, 그의 결단은 영원을 향한 선택이었고 영원을 향한 결단이었습니다. 후회할 필요가 없는 결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살아 있으면서도 자신의 무덤을 미리 예비해 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무덤은 작았고 부자들의 무덤은 사람이 서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큰 무덤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무덤은 땅을 파고 봉분을 세우는 무덤이 아니라 큰 바위덩어리에 굴을 파서 거기에 시체를 안치하는 굴 무덤이었습니다. 요셉도 아마 인간이 죽으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해서 손수 무덤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 무덤을 예수님에게 내어 드렸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요셉에게는 부활 신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덤을 내어 드렸다 함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덤은 인간이 이 땅에 있는 동안에도 마지막까지 애착을 갖는 소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제 무덤이 필요 없다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며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마지막까지 소유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소망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도 무덤을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차원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의 끝은 죽음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직도 무덤에 대한 애착 가운데 생활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끝은 무덤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끝은 무덤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영생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무덤은 필요 없어요.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도 주님의 뒤를 따라 믿는 자의 부활에 참여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에는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그렇게도 발버둥을 치면서 모으려고 했던 물질도 우리가 죽을 때에는 하나도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죽음 후에도 물질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과감하게 무덤에 머무르는 신앙을 주님께 내어 드리고 주님으로부터 부활 신앙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무덤을 주님께 내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무덤의 신앙을 내어 드리고 부활의 신앙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무덤을 내어 드리고 영생의 신앙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덤을 내어 드리고 영생의 신앙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소유물인 무덤을 내어드리고 요셉처럼 부활 신앙을 선물로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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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위하여 살지 말고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여러분의 물질을 무덤을 위하여 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썩어 버릴 명예와 썩어 버릴 부요, 잠시 이 순간 밖에는 나에게 의미가 될 수밖에 없는 헛되고 헛된 그것들을 붙들고 그것들을 위해서만 인생을 소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원히 있을 그것, 하나님 앞에 인정되는 그 삶을 위해서 나는 정말 영원한 투자 속에, 영원한 선택 속에 인생을 살고 있는지, 이 땅의 지위, 이 땅에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그것들이 잠시 잃어버려진다 해도 과감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고 선택하고 살아가는 삶. 주님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나머지 인생 그렇게 살기를 원하오니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우해서 우리 인생을 버리는 자들이 되지 않게 도와주시고 영원한 가치, 영원한 보람, 영원히 주 앞에 인정되는 삶을 위하여 우리 인생을 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 성령 하나님 역사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임하시사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고 주 앞에 우리의 삶이 새롭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주의 권능으로 함께 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온전히 주 앞에 새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아리마대의 요셉의 선택, 그의 희생적이고 모험적인 선택, 공개적인 선택, 영원을 향한 선택, 주 앞에 후회할 필요가 없었던 선택, 늦지만 마침내 주 앞에 해야 할 결단 속에 섰던 그의 선택이 우리의 선택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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