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I 창세기 50장 15-21절 I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I 하나교회 I 김성식 목사
창세기ㅣ 50장 15-21절 I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 하나교회 김성식 목사 -
오늘의 이야기는 요셉의 마지막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을 보면,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난 후에 혹시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봐? 불안감으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아버지 때문이라도 형제끼리 다투고 싸우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거리낄 것이 없을 때에 요셉이 혹시 우리에게 복수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요셉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악함을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데.. 거기에 대한 요셉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형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원하면서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형들은 불안해했고, 요셉은 형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이 요셉의 위로가 과연 형들에게 효과가 있었는가? 요셉의 위로가 형들의 불안을 사라지게 했는가? 그것은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셉은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라는 말로 위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요셉에게는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의 상황에 대입해 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나가서 살아가면서 불안해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불안해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하실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이 정말로 위로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위로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에게 이것이 위로가 될까? 20절 말씀,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것은? 형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을 말합니다. 그것은 형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15절에 형들이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우리에게 갚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악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행한 악을 하나님께서는 선으로 바꾸셨다고 요셉이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위로가 된 이 말씀을 형들에게도 전하고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이 말이 어떻게 형들에게 위로가 될까? 사실 비슷한 내용의 말을 이미 창 45장에서 했었는데.. 형들은 17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형들이 요셉에게 악을 행했다.
요셉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왜 선과 악의 문제가 나올까? 본문의 내용에서 조금 더 큰 맥락에서 바라보면 오늘 말씀은 창세기 50장의 이야기이고 창세기 50장은 창세기 전체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 말은 창세기가 1-50장까지로 구성된 책인데 이 책의 결말에 해당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책이든 결말에 이르면 마무리, 매듭이 지어집니다. 그래서 이 창세기 50장의 내용을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라는 관점으로 창세기 전체를 다시 한번 보면.. 창세기가 어떻게 시작되어서 어떻게 발전되어서 결말이 지어지는가?
창세기 1장부터 시작되면서 갈등이 야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갈등 요소가 뭐냐? 인간의 죄입니다. 창세기는 인간의 죄를 어떻게 표현하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것.. 여기서부터 죄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관계가 깨져나가기 시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불행해지는.. 끊임없이 걱정하며, 불안해하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인간의 모습을 창세기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진행되어 오더니 선악의 문제로 결말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이라는 관점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창세기를 꿰뚫어서 볼 수 있는데.. 요셉의 이야기도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단순히 요셉의 이야기를 어려서 극진한 사랑을 받다가 형들의 시기로 한 순간에 노예로 팔려 고생하다가 잘 되어 총리가 되고, 꿈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로도 보지만.. 창세기 전체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선악에 관점으로 요셉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다시 보면, 요셉은 어려서부터 약보의 12 아들 중에 11번째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편애를 받습니다. 그 모습을 형들이 아주 싫어했지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형들이 요셉을 싫어하고 싫어하고 싫어하다가 종으로 팔아넘기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는 요셉의 옷에 동물의 피를 묻혀 요셉이 들짐승에 의해서 죽었다고 거짓을 고하지요. 이것이 형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이었습니다.
왜 그런 악을 저질렀을까요? 오늘 본문 20절의 요셉의 증언을 들어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이게 형들의 악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형들은 요셉을 헤치려고 했습니다. 눈에 가시로 여기던 요셉을 가만두고 싶지 않다. 저놈이 불행해졌으면 좋겠다. 악의를 가지고 요셉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이것이 형들의 악입니다. 이 말은 창세기의 주제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를 이야기하는데...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에서부터 나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기준을 나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형들의 입장에서 요셉이 나빠지는 것, 요셉이 악이라고 느끼는 것이 형들에게는 좋은 것입니다. "저놈~ 망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대더니 고것 참 잘 됐다." 그것이 형들에게는 좋은 것이었습니다. 기준이 나 자신들이었기 때문에.. "나에겐 이게 좋은 일이야." 그러니까 요셉을 향하여 악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놈이 내 눈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더 이상 아버지가 너만 싸고도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으로 행한 것이 요셉에게는 어마 어마한 악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그 기준? 때문에 원치 않은 일을 당하게 되면서 노예로 팔려갑니다. 보디발의 장군의 집에 팔려간 요셉은 그럼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형통하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노년의 삶을 됩니다. 그러다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지요?
유혹을 물리칠 때, 요셉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거절합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악이라고 요셉은 생각했던 것이고 이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서 물리쳤습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서 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 감옥에서 우여곡절을 겪다가 바로의 꿈을 해몽하게 되었습니다.
바로의 꿈은, 일곱 마리의 살찐 소가 있었고, 일곱 마리의 흉측한 소가 있었습니다. 이 흉측한 소는 조금 더 의미를 파고 들어서 번역한다면, '흉악한 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포악하고 흉악한 소. 왜냐하면, 이렇게 흉측한 소들이 살찐 소들을 잡아먹습니다. 요셉은 이 꿈을 해석하는데 7년 간의 풍년 이후에 7년 간의 풍년이 잊힐 만큼의 흉년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7년 간의 흉년이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의 풍년을 잡아먹는 악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러다가 야곱의 집안도 먹을 것이 없어 애굽의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과 만나게 되고 형들을 시험하게 됩니다.
두 번의 시험을 거치게 되는데.. 왜냐하면 옛날과 같이 나에게 악을 행하던 그 형들인가? 두 번째 시험에서 재미있는 말이 나옵니다. 베냐민과 함께 온 형들을 잘 대접하고 돌려보내는데.. 거기에 부하들을 시켜서 베냐민의 짐 안에 자기가 쓰던 은 식기들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쯤 간 형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주인의 은잔이 없어졌다." 하며 물건을 다 뒤졌을 때 베냐민의 짐에서 물건이 나왔을 때.. 그때 요셉은, "너희가 어찌 선을 악으로 갚느냐"라고 합니다. 이것은 형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아닐까요? 우리는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이라고 형들을, 우리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대조적인 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형들의 모습을 통해서 선을 악으로 갚는 그런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형들이 돌아왔을 때에 그 형들이 우리 동생에게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는구나! 하면서 형제들 중 유다가 "베냐민 대신에 나를 잡으라."라고 하면서..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45장에서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이미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어려웠던 삶. 죽음의 위기를 순간순간 넘기면서 총리가 되고 나서.. 총리로써의 역할을 하면서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형들이 나에게 악하게 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심이고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신앙고백입니다.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해서 죽음으로 몰아넣으셔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란느 고백이기 대문에.. 형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고, 뭔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형들은 계속 불안해했습니다. 형들이 불안해한 것은?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행했던 악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형들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남지 않았는데.. 이 형들은 오직 자신들의 관점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들의 악과 선의 기준이 어디에 있었느냐? 자신의 편에서 힘 있는 사람, 총리가 된 요셉에게로 옮긴 것이니다. 자신들의 행위가 나빴다. 악했다는 기준 삼는 것은 요셉의 입장이다. 요셉이 힘 있는 사람,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아.. 이제 우리가 악한 일을 행한 것으로 인해 벌을 받겠구나..'라고 불안해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은 선악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임을 바라보고 믿었기 때문에 오늘 마지막 창세기의 결말에 해당하는 부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에 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형들에게도 위로가 되려면 형들이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안해할 때에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이 고백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려면.. 우리의 선과 악의 기준이 하나님께로 두는 그리스도인이 바뀌어야만 이 말이 위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선이 무엇인가? 악이 무엇인가?
아까 말씀드린, 나에게 좋은 것이 선이고, 나에게 나쁜 것이 악이라면.. 그래서 그 기준이 여전히 나에게 이다면 오늘의 이야기는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좋다. 권력을 누려서 좋다.'라는 것이 선인 것처럼 오해하기 쉬운 것이다. 여기에서 이 오해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만일 요셉이 총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이라면.. 잘 되는 것이 선이라면.. 그러면 형들의 이 악한 행위는 결국 요셉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형들이 요셉을 팔아야 애굽에 가서 총리가 될 수 있었으니까.. 형들은 잘 못한 게 없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지 아니하였더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을 수 있었으니.. 가롯 유다는 자기 역할을 한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해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악을 행한 것은 자신들이 선택이고.. 자신들이 선택하여 행한 악한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 선악의 문제를 나에게 두고 "나에게 좋은 일을 하겠다."는 행동을 할 때에는 여기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좋은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일들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지요. 책임의 문제가 우리에게 부과가 됩니다.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시는 섭리를 우리가 믿는다고 해서 우리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다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임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산다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삶. 드러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에서 오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악한 행동을 했을 때, 거기에 대해서 요셉이 형들의 악한 행동 때문에 겪게 되는 결과물들에 대해서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하는 선'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는..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게 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정말 위로가 되는 말씀이지요. 우리도 불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불안이 좀 더 뚜렷해 보이는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믹 때문에 우리가 불안해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약화시키지 않을까?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지 못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지는 않을까? 팬데믹이 아니어도 근본적인 불안감과 죄책감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내가 벌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이 선악의 판단 기준을 나에게로 두었을 때 생겨나는 일들입니다.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따라 살지 못함으로 인해서 벌 받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팬데믹을 바라보는 여러 학자들의 해석이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 있어야 할까? 에 대해서 많은 책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중에 미국의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이 최근에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라는 책을 보면, 구약 성서의 입장에서 전염병을 바라보는 세 가지 견해, 세 가지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 첫 번째 계약에 근거한 동등한 보응이 측면에서 전염병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 성경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 따라 살면 복을 받고 어기면 벌을 받는다. 이런 관점에서 전염병이나 전쟁이나 기근을 이해하는 표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 두 번째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의도적인 부정적인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 할 때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시지요. 이 재앙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신 방법으로, 거기에 전염병이 있습니다.
- 그리고 세 번째는, 도저히 이것이 내가 잘 못해서 받는 벌인 지.. 아니면 하나님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전염병이라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여태까지 내가 쌓아온 지식으로, 경륜으로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면서 갖게 되는 이해가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나는 모르겠다. 이건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거다.'' 이것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 구약의 욥기입니다. 설명이 불가능한 하나님의 방법.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뭔가를 잘 못해서 한국교호가 뭔가 잘못해서 팬데믹의 상황으로 모여서 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건가?라고 해석한다면... 그동안 열심히 예배드릴 때는 우리가 잘해서 그렇습니까? 우리가 뭔가 하나님 앞에서 잘하고 헌신적으로 열심히 예배드리다가 우리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코로나 바이러스를 주셔서 벌주시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 세 가지 이해는, 이런 구약을 통해서 팬데믹을 바라보았을 때 이런 관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서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분명한 것은, 어떤 관점이든 상관없이 결론은 어디로 가냐?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구약성서의 용어로 '헤세드'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한결같은 사랑'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을 관통하는 한 단어를 뽑는다면 그 단어는 '헤세드'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다루어 가실 때, 결국 고백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를 결말짓는 오늘의 마지막 부분에서 요셉의 입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서로에게 악을 행하는 모든 행위를 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모든 악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하심,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뭐냐? 오늘 20절의 말씀처럼,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게 하려고 내가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생명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 그 구원이 하나님에게 선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헤세드'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라고 구약성서는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가서 '헤세드'를 대체할 수 있는 단어는 '임마누엘'이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실체를 세상에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죠.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것을 실체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고 바라보고 거기에 따라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냐?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온전히 순종하셔서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평생을 살아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오늘 말슴의 관점에서 보면.. 악을 선으로 바꾸어 가시는 이 기준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선이라면.. 그러면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 위로가 될까요?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이 도무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이 사실이 우리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이 선이 나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씀이 신약성경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냐? 로마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어떻게 받아들이냐? 나에게 좋은 것으로 바뀔 거야. 지금 팬데믹 때문에 힘들고 어렵지만, 결국 다 지나가고 나면 나에게 좋은 것으로 바뀌어 있을 거야.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선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준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위로가 되고 이것이 힘이 되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좋은 것이 나에게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체험하고 믿기 때문에 이 선이 우리에게도 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십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본성을 따라 살게 됩니다. 무엇이 나에게 좋은 것인지.. 끊임없이 나에게 좋은 것을 찾아 살아갑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나에게 좋은 것이 있지만, 나에게 좋은 것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정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의 소원이 예수님의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선한 것이 우리에게도 선한 것이 되어지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책임은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이 악해서 벌을 받는 것이고, 이 세상이 악해서 회개하라는 징조로 바라보기보다는 생명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에 우리도 그 역사하심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그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시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이 말씀을 붙잡고 묵상하면서 이 한 주간 이 세상에 나가서 기도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나도 원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가시는 선을 나도 바라보며, 그 선을 이루어가는데 나도 동참키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주님의 제자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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