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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설교문 I 이사야 37장 1-4절 I 성전으로 간 히스기야 I 수서교회 황명환 목사

by №1★↑♥ 2023. 10. 25.

해외에 사는 성도 중 한 분이 제 설교를 듣고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어려운 일을 만나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들에게 주신 그것이 특권이라는 것을 알고 제 마음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며칠 동안 노력해 보면서 마음속에 드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라면서 세 가지 질문을 해 오셨습니다. 첫째, 기독교가 무기력한 종교가 아닌데,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나가서 일하거나 싸울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적극적이고 믿음 있는 행위가 아닐까요? 두 번째, 또한, 가만히 있어야 할 때는 언제이고, 나가서 일해야 할 때는 언제인지 정확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는 것이라면 왜 그 쉬운 것을 사람들이 못하는 걸까요? 

저는 그런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잘하지 않는 편이지만.. 너무 오해가 많을 것 같아서 답장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뢰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는 것이 신뢰입니다. 그냥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지요. 순종은, 우리가 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에 대하여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우리가 신뢰가 쉽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왜냐하면, 신뢰 속에는 나의 죽음이 반드시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는 것으로 끝나면 그건 약한 것이고, 소극적인 거잖아요. 그러기에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신뢰가 형성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뢰의 요소가 두 가지예요. 하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는 자기 포기가 들어가야 해요. 동시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만 신뢰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잠잠히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신뢰이기 때문에 신뢰는 엄청나게 어려운 거지요. 그렇다면 이 신뢰와 순종의 관계는 어떠한가?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뢰하는 시간을 주십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뢰를 충분하게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따라 행하면 행하면 순종하게 되고, 그 순종에 따라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가 나타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홍해 앞에 도착을 합니다. 앞으로 가려니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바로가 보낸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거나 다시 잡아가겠다고 달려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가 된 것입니다. 그걸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서 불평하며 원망을 합니다.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서 죽이려고 여기로 인도해 왔냐."라고 원망하고, 여기서 죽느니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소란을 피웁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신뢰하던 모세는 이렇게 말하죠.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자,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을 내리시니다. "지팡이를 들어 바다를 치라." 모세는 그 말에 순종하여 바다를 칩니다. 그러자 갑자가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서 홍해가 둘로 갈라지기 시작하고, 물속에 있는 길이 육지처럼 펼쳐집니다. "이제 그 백성으로 건너게 하라." 말씀에 백성들은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게 되죵. 이것이 순종입니다. 신뢰해야 할 시간에 충분히 신뢰하고 나면, 순종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신뢰 속에는 나의 죽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또한 자기를 다 내려놓았기 때문에 내 욕심 때문에 들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정확하게 들려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음성에 전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으로, 신뢰밖에 할 수 없는 영역으로 우리를 밀어냅니다. 그리고 그 신뢰를 통하여 육신적인 우리를 죽이고 다시 영적으로 깨어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새 길을 열어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신뢰와 순종에 대하여 알아야 할 공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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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에 내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살펴보았죠? 앗수르가 첫 번째 침공했을 때 히스기야는 그 군대의 규모를 보고 너무 놀라서 바로 항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공을 갖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적들이 물러갔습니다. 근데 이번에는 두 번째 앗수르가 침략해 옵니다. 그걸 보면서 분명하게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 우리 남유다는 절대로 저 강대국 앗수르와 싸워 이길 수 없다. 철저한 무기력을 확인합니다. 두번째, 아무리 우리가 구원병을 청했지만, 애굽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왜? 이미 길이 막혔기 때문에 외부의 도움은 있을 수 없다. 마지막, 앗수르 자체를 절대로 신뢰할 수 없다. 그들은 다시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선 다시 치러 왔기 때문에..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나를 봐도 이웃을 봐도 적들을 봐도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이 절박한 상황에 놓여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앞도 막히고 뒤도 막혔습니다. 이제는 믿을 것이 하나님 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히스기야는 어디로 갔죠? 37장 1절입니다. '히스기야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여호와의 전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모를 때.. 그때 가야 할 곳이 한 곳 있다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집, 성전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전은, 문제가 해결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전은 문제 자체가 사리는 곳이지요. 그래서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는 반드시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히스기야는 성전에 가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그는 깨닫습니다.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이 뭐냐? 이 비참한 사건이 왜 발생했느냐는 거죠.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3절입니다.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슴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여러분 여기서 책벌이라는 말이 나오죠? 책벌이라는 말은, 잘못에 대한 징계로 주어지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앗수르의 침공은 유다가 이제 망하기 직전에 이르게 된 이 비극이 왜 일어났느냐?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죄 때문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했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끌어들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을 의지한 결과죠. 그래서 그 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올라갔던 겁니다. 거기서 기도하며 자기 죄를 깨닫게 되죠. 분별력이 생긴 겁니다. 

나의 죄를 깨닫고 나니, 적들의 죄가 뭔지도 깨닫게 됩니다. 4절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앗수르의 죄는 뭐냐? 그들이 너무 교만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막대기로 사용하시고자 일시적으로 힘을 주셨는데, 이 막대기들이 너무 교만해져서 자기들에게 힘을 주신 하나님을 모욕하고, 능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양쪽의 죄를 정확하게 우리가 이해를 해야겠죠?

유다의 잘못은 뭐냐? 이 막대기를 들고 있는 하나님을 무서워해야 되는데,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그 막대기 자체를 두려워해서 벌벌 떠는 것. 그게 유다의 죄이고, 앗수르의 죄는 막대기 주제에 그들에게 힘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가 강하여서 그런 것처럼 교만하여 하나님을 모욕한 거예요. 문제가 두 가지이기 때문에 해결책도 두 가지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두 번째로는 앗수르의 교만을 심판해 달라고 히스기야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이곳에서부터 구원해 달라는 기도가 20절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만국이 주 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니라' 죄에서 용서하시고, 적들의 죄를 심판하옵소서. 여러분 이제 37장 전체가 히스기야의 기도 내용인데 이 기도내용을 보면 아주 독특합니다. 제일 중요한 말, 이기게 해달라는 말이 없습니다. 지금 나라가 전쟁을 맞아서 망하게 되었는데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할게 뭘까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서든 살아남아야 하는 거 아니까요? 근데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적들의 교만을 심판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서든 살아남는 것이 지금까지의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믿고 신뢰하고 의지했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적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달려드는 것. 앗수르와 하나님을 비교하면 하나님에게 앗수르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 막대기가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것이 너무 분한데 그것이 또 우리의 죄 때문에 왔다는 것을 알고 히스기야는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야!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정도 하나님이 아니야!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는 거죠. 그래서 3절 끝에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이게 그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저들 앞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해주고 싶은데 우리도 이 하나님을 지금까지 의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이 말을 할 수 없는 우리의 안타까움 그것이 너무나 눈물이 난다는 거죠.

우리는 이 히스기야의 기도에서, 기도에 대한 중요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란, 내가 만난 어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 문제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결되는 것을 원하고,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러한 기도는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기도가 있습니다. 내가 만난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을 더 크게 바라보고 이 문제보다 하나님이 더 크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성전에 와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보다 문제를 더 크게 생각하고 이 문제에 마음을 다 빼앗겼고, 이 문제를 하나님 보다 크게 여겨 하나님 바라보지 않고 두려워하여 걱정한 것에 대해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풍선 불어 보셨지요? 풍선은 아주 작아요. 여기에 바람을 많이 불어넣으면 불어넣을수록 커지게 되죠. 세상의 문제가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문제가 없죠. 근데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 문제를 자꾸 바라보고 걱정하기 시작하면 그 문제 바람이 들어가서 이렇게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으로 내 마음을 채우면 그 풍선에서 바람이 다 빠져나가서 원래의 크기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집에 와서 해야 할 일이고, 그 신뢰가 바로 되면 온전한 기도가 이루어지는 거죠. 신뢰함 속에서 나오는 기도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반응이 어떤지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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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사람을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여러분 21절을 잘 보시면 '네가 내게 기도하였도다' 감탄사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어떤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지요?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기의 마음을 다 내려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이렇게 기뻐하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29절입니다.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네가 너무 교만했는데, 내가 네 코를 갈고리로 꿰어서 왔던 길로 도로 돌아가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엄청난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저 세계 최강의 군대가 어떻게 스스로 물러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가능한 이유가 등장합니다. 32절,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뭐가 이룬다? 여호와의 열심. 여호와의 열심이 그 일을 약속대로 성취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열심이 있다는 사실 기억하시겠어요? 믿으시나요? 나는 나에 대하여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열심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의 열심을 거부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열심보다 월등한 겁니다. 우리 자녀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열심이 작동되어야지 내 열심이 너무 끓어올라서 하나님의 열심을 미뤄내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열심이 작동될 수 있는가? 신뢰와 순종입니다. 뭐라고요? 신뢰와 순종. 잠잠히 있어야 할 때가 있고, 하나님이 하라시는 것을 기쁨으로 감당할 때. 즉, 나의 열심에 조절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의 열심이 작동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열심이 어떻게 작동되었는가?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등장합니다. 36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만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앗수르에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셔서 십팔만 오천명을 하룻밤에 전염병으로 진멸시킵니다. 앗수르의 대군이 하룻밤에 무너졌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37절, '이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기겁을 하고 철수를 합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갑니다. 38절입니다.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철수해서 자기가 섬기던 신을 신전에서 제사드릴 때, 자기 아들들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산헤립의 거창했던 꿈이 너무도 비참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완전히 해결이 됩니다. 여호와의 열심. 

 

이번 주중에 한 성도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분이 이런저런 얘기를 쭉 하더니만 마지막에 이러는 거예요. "목사님 제가 어릴 때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어려워서 참 힘든 인생을 보냈는데, 결혼해서 자식을 키우는데 왜 이렇게 자식과의 관계가 어려운지.. 왜 내 인생은 이렇게 팍팍한지..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렇게 힘든 인생을 주셨는지. 그것만 생각만 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고 너무 낙심이 됩니다." 제가 가만히 그분을 바라봤어요.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 "그런데 목사님 제가 꼭 여쭙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목사님께서도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을 지나오셨는 줄 아는데 어떻게 다 극복하시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우뚝 서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대답을 했지요. "저 우뚝 선거 없어요. 지금도 헤맵니다. 그런데 저에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저는 말이죠, 내 책임이 아닌 것 내가 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떤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서 힘들게 자라나고, 어떤 사건을 만나서 큰 고생을 한 것.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의 영역이니까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자꾸 묻기 시작하면 대답도 없고 그 문제에 빨려 들어갈 뿐입니다. 해결책이 없고, 인생만 피곤해질 뿐입니다. 내 책임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하기보다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리고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문제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인생의 문제는 간단해지는 겁니다. 왜 나에게 이런 역경과 고난을 많이 주셨는가? 그건 언젠가 하나님께서 오해를 풀어 주시고 내게 더 많은 위로를 주시겠지요. 그러므로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자꾸 묻는 게 아닙니다. 신뢰함으로 맡기고, 오늘 내게 주어진 일만 잘 감당하면 생각보다 삶은 단순해지는 겁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슴이 "아, 목사님 알겠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필요 없는 문제에 너무 에너지를 많이 썼네요.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고 내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만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좋은 점수를 맞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분을 보낸 다음에 저는 혼자서 기도를 했지요. "하나님, 그분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분이 되게 하소서. 자기가 할 수 없는 것, 자기 책임이 아닌 것에 대하여 왜 자꾸 그러냐고 질문하지 않고 하나님께 다 맡기게 해 주시고 이제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환경을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오늘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럴 때에 하나님이 문제에 개입하사 풀어가시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달라."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많은 고민들이 왜 생기는지 아세요? 해석할 수 없는 내 인생을 해석하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대답 없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선한 뜻에 다 위탁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나는 응답할까만 생각하면.. 인생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뢰와 순종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일반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뢰와 순종이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다른 종교는 내가 신을 이용해 먹으면 그만입니다. 싹싹 빌기도 하고, 재물도 많이 드리면서 달래서 이용하면 그만이지요. 그들은 우상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저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고, 지혜로우신 분이고, 의로우신 분이고 그러므로 그분의 우리를 인도하시는 과정 속에서 이해 못 할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는 뭐 하라? 신뢰하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명령하실 때 기쁨으로 순종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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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다른 곳으로 가서 헤매지 말고 성전으로 나오게 하옵소서. 여기서 세상의 찌든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문제에 눌려 있던 마음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히스기야는 인생의 막다른 길에 섰을 때 좌절하고, 낙심하고,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심으로 그는 하나님의 집, 성전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 찼던 마음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으로 그 마음을 채우면서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이기고 지는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의지했던 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자신들의 잘못을 통곡하며 
적들의 교만을 하나님이 심판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뢰했던 자가 드리는 온전한 기도 
그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완벽하게 해결해 주시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전으로 나아가며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 앞에 잠잠히 신뢰하며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히스기야는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런 일이 왜 생겼는지, 자신과 적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성전으로 나가 기도하게 하소서
내 영역이 아닌 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하며 내게 명령하신 것에 대하여는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바라기는 수서교회의 성전에 히스기야의 기도가 차고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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