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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이동원 목사

[이사야 4] 이사야 6:6-10, 13 I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I 이동원 목사

by №1★↑♥ 2021. 7. 29.

  인생이란 것은 무거운 것일까요? 가벼운 것일까요? 나라는 인간의 존재, 실존 그 자체도 무거운 것일까요? 가벼운 것일까요? 1980년 그런 존재론적은 문제를 던진 화제의 소설 한 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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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밀란 쿤테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라는 책은, 4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해서 얽히고 얽히는 사랑의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젊고 유능한 의사였던 토마씨는 가벼움을 동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무거운 관계의 굴레도, 이념의 속박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와 사랑의 관계에 있었던 테레사라는 여인은 무거움으로 대표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토마씨와의 만남을 운명으로 여기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중하게 여기는 테레사는 사랑의 대상을 쉽게 옮겨가는 토마씨의 가벼움을 견딜 수 없어합니다. 토마씨에게 테레사는 우연의 산물이지만, 테레사에게 토마씨는 운명이었습니다. 토마씨의 또 다른 여인 사비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정치적 사회적 구속에서 철저하게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또 하나의 가벼움의 상징이었습니다. 토마씨는 이런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상징되는 두 여인 사이에서 방황하며 자신의 자와 인생을 탐색합니다. 자유분방하고 독립적인 여인 사바나는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사랑했던 또 다른 남자 프렌치를 배신함으로 자신의 구속을 거부합니다. 저자는 아마도 인생의 실존 그 자체가 무거운 것이지만.. 어쩌면 깃털처럼 가벼운 순간순간의 자유, 허무의 몸짓으로 인생이란 이어져 가는 것이라고 증언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혹은 성경적 관점에서 인생의 가장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것이 바로 죄의 짐, 혹은 악의 짐이라고 말합니다. 죄의 악의 굴레가 인생을 무겁게 만드는 요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의 벌'이라는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합리적 무신론자로써 우리 인간 사회의 무가치한 전당포 노인쯤 살해해도 그것은 전혀 해가 없는 정당한 행위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신념을 옮겨 노파를 살해하지요. 그러나 살인하자 마자 그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믿고 실천에 옮겼지만 그러나 살인 이후 그의 마음속에 숨었던 죄의식이 살아나기 시작하더니 그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그는 마침내 창녀였던 쏘니야를 만나서 자신의 죄인 됨을 비로써 깨닫고 새로운 자유, 궁극적인 자유를 꿈꾸며 시베리아의 유형의 길로 떠납니다. 결국 자신의 존재의 무거움을 해결하는 마지막 자유를 위해서 그는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 복음이야 말로 인간 존재의 짐을 가볍게 하는 유일한 해답. 유일한 소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통해서 이렇게 구원을 받고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늘 본문은 이사야라는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으로 죄 속에 빠져 있는 실존을 발견합니다. '화로다 나로여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가 진솔하게 자신의 죄를 토해내는 그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사죄의 선언, 용서의 선언이 떨어집니다. 그게 바로 7절입니다. 천사를 통해서 전해진 메시지, 복음입니다. 복음을 헬라어로 '에반 게리온' 천사를 통해서 들려온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것이 이사야 경험한 복음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자신의 존재의 가벼움, 참된 해방을 느끼는 놀라운 순간이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과 함께 임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때 그는 다시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신 후에 이사야를 향해서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를 보내야겠느냐? 네가 방금 경험한 그 자유, 네가 방금 경험한 사죄의 은총' 그 사죄의 선언을 전해주기 위하여 누가 저 세상으로 갈 수 있겠느냐?' 이때 이사야의 유명한 대답.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주소서."라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블레싱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미루어두었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해주고, 그들이 주님 앞에 나와 용서 받고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축복의 나눔의 계절.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누가 주의 은혜를, 누가 주의 사죄를, 주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제 하나님의 그 부르심 앞에 우리의 응답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첫번째로, 가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의 이사야의 응답을 우리의 고백으로 여기며 함께 읽겠습니다. '..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에게 또다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네가 경험했던 이 소식을, 이 복음을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증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메시지를 에스겔 선지자에게도 에스겔 3장 1절에서 주신 바가 있습니다.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말하라'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먹고, 이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가서 말하라' 하나님은 이번에는 요나 선지자를 불러 동일한 명령을 하십니다. 요나서 1장 2절에 '일어나라 가라 외쳐라'  요나는 이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 않아서 도망 갔습니다. 그러나 그를 쫓아온 하나님. 마침내 하나님은 그를 스올의 깊은 곳,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두 번째 동일한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십니다. 요나서 3장 2절 '일어나라 가서 외치라' 신약성경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보내면서 말씀하십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왔다 하라' 주님은 오늘날 동일하게 저와 여러분에게 위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잘하는 사도행전 1:8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해보십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지나간 무더운 여름 단기선교로, 아웃리치로 문자 그대로 전 세계에 흩어져 땅끝까지 나아가 이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번에는 예루살렘. 사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우선순위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라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아가라.' 그렇습니다. 이 가을, 앞으로 2간 동안 우리는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나아가서 이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먼 나라에 가서 이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동일한 열정으로, 우리 가까이에 있는 우리가 항상 함께 더불어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증인의 사명입니다. 증인이 되는 것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증인은 본 대로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경험한 대로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예수, 내가 경험한 신앙, 내가 경험한 하나님, 내가 경험한 복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서 전하십시오. 때가 너무 늦기 전에 지금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의 증인 된 여러분과 저희의 사명입니다. 가서 전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으로 주간 동안 늘 해야 되지만, 특별히 이 2주간을 구별해서 우리는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복음의 빛을 이웃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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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두번째 레슨이 있습니다. 가서 전하십시오. 그러나 결과를 낙관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시면서도 '사람들의 불신앙으로, 사람들의 강퍅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복음을 거절할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거절할 때, 증인 된 이사야가 너무나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이기도 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강퍅해진 죄인들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복음을 그들이 거절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그것을 너무 놀래 하지 말고, 당연한 반응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9절 '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그 복음에 백성들이 반응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내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10절에서 이상한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10절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그것은 내게 부담거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정말 죄인들의 회심을 돌이킴을 원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역설적인 하나님의 증언인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 말씀이 신약성경, 사도행전 28:23에 인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당시의 세계의 가장 중요한 도시, 땅끝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세계의 수도 로마에 가서 드디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게 됩니다. 그 때에 사도행전 28장 24절을 보면, 로마 사람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의 반응입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또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절의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에 대해서 그것이 바로 내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했던 그 말씀의 성취다라고 하십니다. 25-26절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27절에서는 이 말씀을 이사야의 본문을 사도행전의 저자는 약간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27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줄까 함이라' 여기서는 이사야의 말씀에 언급된 '내가 걱정이다.'라는 말을 뺏습니다. 대신에 '내가 고쳐 주리라. 내가 용서하마, 내가 새롭게 하마' 그러나 그들 중에 거절할지라도 실망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는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말씀의 역설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사도행전 28장 28절의 긍정의 선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심을 읽게 됩니다.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이것을 들으리라' 실상은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을 너무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거든.. 들어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보아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이 복음을 외면하거든 개념치 말아라. 그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할 것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러나 다 그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기대해야 할 마지막 소망의 응답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런 메시지인 것입니다. '전도할 때, 결과를 결코 낙관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오늘의 본문이 증언하는 결론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세번째 레슨이 뭐냐? 남은 자의 응답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6장 13절의 약속입니다. '그 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나무를 찍어도 그루터기가 남아요.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납니다.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가 전도하면 복음을 외면하고 복음을 거절하는 것 같아도.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그루터기 같은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기 까지.. 우리는 전도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지요? 적어도 십 분의 일. 저는 이 말씀을 아주 쉽게 적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도를 강조하는 이 계절에 열 사람을 만나 전도합니다. 그랬더니 9사람이 거절해요. 괜찮은 거예요. 그렇습니다. 비록 9 사람이 거절하고 한 사람만 영접해도 할렐루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을 주님 앞으로 한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몇 사람 만나셔야 할까요? 10 사람 만나셔야 합니다. 그 생명의 구원을 위해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우리 곁에 성경의 복음을 그대로 해석하고 믿지 않는 이단으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만나기도 합니다. 그중에 제일 극성스럽게 전도하는 이들 이 여호와의 증인이지요. 나는 여호와의 증인을 스쳐가든, 한 번쯤 만나본 일이 있다? 대부분 만났잖아요? 그렇죠.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도할 때에 비록 그들은 우리처럼 성경적 복음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열심히 전도하는데.. 그들은 어떻게 전도하느냐? 그들은 전도할 때에 천대 일의 가능성을 안고 전도한다고 합니다. 천명 만나면 한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이 된다. 천명 만나면 한 사람을 여호와의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도 열심히 집 문을 두드리고, 책자를 전하면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못된 복음을 가지고도 비록 999명이 이 복음을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그중에 한 명을 그들 안으로 인도하기 위한 여호와의 증인의 열정. 우리는 그보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거 아닙니까? 도전을 좀 받을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의 성경은 천대 일이라 말하지 않고 십대 일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열 사람이라도 만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가을 소중한 영혼 한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나는 2주간 동안 몇 사람을 만나야 할까요? 엄청난 전도의 에너지와 노력을 다하고도 아주 적은 소수의 열매 밖에 거두지 못한 성경적 인물 한 사람을 생각해봅니다. 노아.

  노아는 방주를 만들면서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에 보면 '의를 전파하는 노아'라고 합니다. 방주를 만들면서 노아는 전도했을 것입니다. "이 방주로 들어와야 살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의 홍수가 내릴 것이고 이 방주가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이 방주로 오십시오. 초대했을 것입니다." 몇 사람이 응답했나요? 자기 식구들 말고는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벧전 3:20 '..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겨우 여덟 명뿐이라' 그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전했음에도 부룩하고 그 초청에 응답하고 들어온 사람은 겨우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실패일까요? 성경은 노아의 노력이 실패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그 여덟 명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노아는 적어도 자기의 소중한 가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히브리서 11장 7절의 증언을 통해 읽어보십시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견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미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적어도 자기 집을 구원했어요. 여러분 내 집이, 내 사랑하는 식굳르이 구원에 동참하고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결코 실패가 아니지요. 또 그 가족을 통해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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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 가을 몇명의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의의 상속자의 반열에 우리 가족이 서기 위해서.. 아직도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한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 우리의 이웃들을 주님 앞으로 초대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그들의 평생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유를 얻는 그 놀라운 순간. 그 축복을 나누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그래서 이 아침도 우리에게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부름을 받아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성령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우리 중에 어떤 분이 이렇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제가 가서 전하겠습니다. 듣던지 아니 듣던지, 거절하든지, 안 하든지 가서 이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전하기만 하면 여러분들은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성령이 나머지 일을 하실 것입니다. 남은 자들이 올 것입니다. 그루터기가 생명의 싹을 키울 것입니다. 이 놀라운 블레싱을 키우는 계절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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