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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이동원 목사

이동원 목사 I 갈라디아서 5장 1, 13절 I 하나님의 선물(15) - 자유

by №1★↑♥ 2024. 2. 26.

이동원 목사 설교, 이동원 목사 설교문, 이동원 목사 갈라디아 설교, 갈라디아서 5장 1, 13절,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선물 - 자유, 2014년 3월 2일 경기대주일예배

하나님의 선물(15) - 자유

- 이동원 목사 -

3.1절 기념주일입니다.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 일어섰던 주일입니다. 저는 자유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경구 하나가 있습니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미국이 아직도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영국은 계속 미국을 설득합니다. 그들이 독립보다 영국의 식민지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 그들의 미래의 발전에 유익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발전에 좋다고 설득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대륙 사람들의 권리는 계속 제한합니다. 군대가 파견되고, 인지세를 포함한 각종 세금이 계속 부과되자 1775년 3월 '버지니아 식민지 회의'에서 젊은 변호사 출신 '패트릭 헨리'가 세기의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 연설의 내용을 요지만 짤막하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유인이 되느냐? 노예가 되느냐?'라는 중대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지나간 10년간 청원도, 호소도, 항의도, 중대의 요청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호소는 무시당했고, 평화에 대한 꿈은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우리 중에는 '우리는 약하기에 감히 영국과 맞설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모든 능력을 사용하면 우리는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평화를 빙자합니다. 
그러나 평화가 달콤하다고 이를 쇠사슬과 노예의 대가로 지불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이 어떤 길을 택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자유 아니면, 죽음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세기의 연설이었습니다. '패트릭 헨리'가 유명한 연설을 한 지 135년이 지나가고 우리가 살 고 있는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침략의 야욕을 갖고 이 땅을 정복하기 시작한 일본의 세력들.. 소위 '내선일체'라는 화두를 이 땅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일본과 조선의 하나'를 외쳤습니다. 조선이야 말로 일본의 통치 아래에 있는 것이 조선의 발전에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홍보하면서 마침내 1910년 8월 한일 합방이 일어납니다. 이 땅의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일제의 이 땅을 향한 식민수탈 통치가 본격화되자,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을 위시한 전국 9개 지역에서 일제히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3.1 만세 사건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유명한 독립선언서의 첫머리를 조금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조선이 독립국인 것과 조선이 자유국임을 선언한다. 이것을 모든 나라에 알려 모두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을 또한 자손만대에 알려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리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당하여 유사이레 여러 천년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압을 당한 지 10년을 지나자 아! 우리의 생존권이 박탈됨이 얼마이며? 정신의 발전의 지장을 입은 일이 얼마이며? 겨레의 존엄성이 훼손된 지 얼마인가? 새 하늘, 새 땅이 눈앞에 전개되도다. 힘의 시대는 물러가고 도의의 세대가 오는 도다.
공약 3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명쾌하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가 공명정대하게 하라."

저는 3.1 운동 사건과 유명한 독립 선언문 하나로 진실로 우리 민족이 세기의 역사 속에 진실로 자유의 가치를 누릴만한 민족임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찍이 자유의 가치를 알았던 위대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더욱 우리의 마음을 자랑스럽게 하는 것 중 하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 가운데 절반인 16명. 그리고 실제로 3.1 운동을 전개했던 민족 대부분 48인 가운데 24명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숫자가 매우 적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민족을 새롭게 세우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참여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자유의 가치'를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보다 일찍 깨우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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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라 불리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가, 예수님이 자유를 위해 오셨고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물로 받은 자유. 문제는 이 자유에 진정한 의미가 뭘까요?

 

1. 진정한 자유는 종의 멍에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첫째, 이 진정한 자유는 종의 멍에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방금 읽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자유를 주셨으니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이 말씀은, 큰 맥락에서 보자면 정치적 멍에나 경제적인 멍에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멍에에서도 해방이 돼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일어설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북한 땅을 생각하면 이 자유는 우리에게 절실하기도 합니다. 북한의 현실이 어떻습니까? 북녘의 백성들은 우리가 실제 시대에 눌려 있던 것 못지않게 더 심각하게 정치적인 자유를 제한당하고, 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경제적 수탈을 당하면서.. 대부분의 국민들을 심각한 고통과 압제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자유가 진실로 필요한 땅.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영화를 본 탈북민들은 "정치적, 종교적 억압의 고통과 상황은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라고 증언한다고 해요. 그러나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증언하는 자유는 이보다 더 훨씬 더 깊은 심층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자유는 구체적으로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여기에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죄의 종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참된 자유,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 아니, 죄로부터 용서받은 자유입니다. 이 죄 사함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그 자유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8:32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사람들은 죄에 대해 끌려다니는 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아도 하게 되고, 해야 할 줄 알면서 끌려다니는 죄의 포로가 된 우리들의 모습. 그리고 심각한 길드 콤플렉스와 죄책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 요한복음 8장 36절이 해답입니다. 복음입니다.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이 자유케 할 때, 우리가 참으로 자유하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십자가에 갈리신 이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형벌과 징계를 대신 받으시고 찔리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구주로 받아 들 일 때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합니다. 우리는 그 피로 죄의 씻김을 받고,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 자유인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바울 사도 로마서 8장 1절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러분 정죄라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얼마나 억누르고 있습니까? 여러분 심각한 죄 책감에 시달려 보셨습니까?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정죄는 더욱 무겁고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다시는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용서하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종 된 멍에로부터의 자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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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정한 자유는 육체의 욕구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이 가르치고 있는 자유는 두 번째로, 육체의 욕구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얻은 이 자유를 지켜 살기 위해서는? 방금 우리가 묵상했던 갈라디아서 5장 1절과 함께 13절의 말씀을 항상 같이 읽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너희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얻었다. 그래서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자유를 주셨다로 끝나지 않고, 13절에서 첨부하는 말씀이 왜 필요할까? 자유가 방종이 되는 순간 우리는 자유를 다시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방종이 되는 것을 오늘의 말씀은, '육체의 기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얻은 자유를 다시 육체가 원하는 대로 '육체의 소욕,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다 보면..' 어느 한순간 우리는 우리가 얻었던 자유를 잃어버리고, 다시 죄의 종 된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화 '신이 보낸 사람'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인 '철호(김인권)'는 예수 믿는 신앙,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일급 정치인이 되어 아내와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서 참담한 고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이 모진 고문 속에도 자신이 믿는 예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영화 속의 진실은 한국교회의 진실입니다. 여자들이 훨씬 신앙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주인공은 살기 위해서 아내가 죽어가는 광경을 보면서도 자신은 신앙을 버리겠다고 풀려납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자유를 얻었을까요? 정말 그가 자유하게 되었을까요? 아내는 죽었지만, 자유인으로 죽은 것입니다. 남편 철호는 겉으로 보았을 때 자유를 얻은 것으로 보이지만,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의 의식 세계는, 심각한 죄책감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흔히 자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편견이 있다면, 그것은 육체의 감정을 따라 마음대로 사는 것. 그것이 자유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의 편함과 감정에 사치를 따르다 보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다시 죄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 다시 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얻은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저항 시인이었던 윤동주를 붙들고 있었던 고뇌 역시 이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의 유명한 시구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도 괴로워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당당함. 

소치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너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김연아의 마지막 인터뷰를 들으면서 속상했던 제 마음의 생각들이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연아가 자유인으로구나!' 뭐라고 했습니까? "저는 할 것 다하고, 보여드릴 것 다 보여드렸습니다. 그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최선을 다 했다는 거예요.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거예요. 당당한 고백 아닙니까? 자유인의 고백 아닐까요? 저는 스케이팅에 대한 지식도 없고, 전문가도 아닌지라 진상을 잘 모르지만, 만일 그때 심사위원들에게 부정이 있었다면 그날밤 이후로 자유하지 못한 것은 심사위원들이었을 것입니다. 연아는 편안히 잤을 거예요. 

부끄러울 것이 없는 당당함이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 그래서 그 자유를 위해서,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육체의 기회를 극복하라!'라고 죄에서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 그것은 바로 육체의 욕구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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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정한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 세 번째로 무엇일까요? 진정한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자유의 역설을 마지막으로 전달합니다. 역설이란? 모순되어 보이지만 진리인 것입니다. 13절의 마지막 부분, 갈라디아서 5:13,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지금까지는 자유를 주셨다고 합니다.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계속 말씀하시기를.. '사랑으로 종노릇 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자유를 얻었으니,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던 바울이 이제는 종노릇 하라는 것입니다. 모순이잖아요? 그런데 그 앞의 단어가 중요합니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종 노릇 하라.' 그것은 종노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자유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종노릇 하라.'는 말을 바꿀까요? '사랑으로 섬기라.'

오늘 본문이 포함된 갈라디아서 전체는 복음을 듣고, 자유를 얻었던 갈라디아 성도들이 예수 믿고 난 후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참된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그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쓰인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 유형의 섬김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에 의한 섬김. 하나는 사랑에 의한 섬김. 율법에 의해서 강제된 섬김은 결국 인간을 다시 노예화하는 것이지만.. 사랑에 의한 자발적 섬김은, 오히려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도자 '무디'의 전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세계적인 바이블 콘퍼런스가 열렸습니다. 그때 영국 귀족들이 이 대회에 참석하겠다고 통보를 했다고 합니다. 무디의 참모들은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귀족들을 어떻게 예우할 것인가? 당시만 해도 영국 귀족들을 대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하는 종들이 따라 일일이 거들어야 했습니다. 하루 밤을 자고 나면 구두를 닦아서 깨끗하게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 우리가 오늘 귀족들에 대한 예우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론이 나기를.. '여기는 영국이 아니다. 시대는 달라졌다. 그런 대우를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복음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무디에게 결정된 바를 무디 목사님에게 이야기하면서 "목사님 생각은 어떠세요?"라고 여쭙자, 무디 목사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기도해 봐야겠지요." 다음 날 아침 10 사람 가까운 귀족들이 도착해서 숙소에서 잠을 나와보니까, 열사람의 구두가 깨끗이 닦여 있었습니다. 누가 했을까요? 무디가 한 것입니다. 무디가 그들의 구두를 다 깨끗이 닦아 놓았습니다. 

이게 자유인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종이 된 섬김. 그것이 예수님이 모범이 아닌가요? 제자들의 발을 닦으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종노릇. 그것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수년 전까지 봉사하시다가 미국으로 가신, 현신애 권사님이라는 분이 계세요. 그분의 남편은 포항공대에서 부총장을 지내신 이정묵 교수라는 분입니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다 정리하시고 미국으로 갑자기 떠나셨는데.. 저희 교회에 포항에서 은퇴하시고 등록하신 다음에 인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평소에도 얼굴을 좀 알거든요. 그런데 현신애 권사님을 본 순간 현신애 권사님의 아버님이 생각이 번뜩 났어요. 제 청년 시절에 한 에피소드가 생각이 났어요. 수원 YFC에서 청소년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일을 했는데, 회관이 없어서 수원의 돌집교회라는 곳에 잠시 빌려서 모인 적이 있습니다. 그 모임에 갔는데, 어느 날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학생들이 신발 벗고 들어가면 그 신발을 하나하나 장에 정리를 하시는 거예요. 이 교회에 관리인은 고상한 분이로구나! 어떻게 저렇게 정성스럽게 미소를 띠면서 일을 잘하실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교회 장로님이셨어요.'현신균' 장로님. 이 분은 세계적인 학자십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산림운동을 벌이셨어요. 푸른 숲이 많은 남한 땅이 조성된 데에 많은 기여를 하신 분이에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장로님 어째서 그런 일을 하십니까?"라고 물으니, 답하시기를.. "교회 나와서 봉사를 해야 하는데 보니까 어지럽게 널러져 있는 신발이 보여서, '하나님 일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제가 책임 지고 정리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 이후부터 시작해서 신발 정리를 시작하셨다는 거예요." 자유인입니다. 그분의 자녀들이 훌륭한 인생을 사시더라고요. 현신애 권사님이 남편이 떠나가신 후 재산을 정리하면서 여기서 번 돈 가져갈 필요가 있을까? 찾아왔어요. 본인 사시던 수지의 아파트를 내놓으시면서 "선교사님의 숙소로 써달라."라고 내놓으셨서요.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아무것도 메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분들..

이런 자유의 빚지고 자유의 은혜를 입은 저와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는 3.1절 행사를 보면서 '신이 보낸 사람'의 영화 마지막 장면이 계속해서 떠오르더라고요. 주인공 철호가 다시 붙잡혀 총살당하던 그 장면. 마지막 총알을 받기 전에 아내의 환상이 나타나서 이 사람을 안고, 복음 성가를 들려주지요.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철호야 넌 날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고백, "오~ 주님 주님만이 아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돌아가신 은혜로 그 사랑받고,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는 그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우리도 섬겨야 합니다. 아무리 미워도 북한 땅을 섬겨야 합니다. 어떻게 섬길까 고민해야 합니다. 일본도 섬겨야 합니다. 얄밉더라도 우리가 보복의 칼을 빼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먼저 복음을 받은 민족으로써 복음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자로써 복음에 차단된 자들에게 어떻게 이 사랑을 줄 것인가?를 오히려 고민할 때 우리는 진정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자유에 빚진 자로 자유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3.1절에 십자가의 은혜, 자유의 은혜가 우리 삶을 바꾸는 놀라운 모습으로 우리의 인생 속에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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