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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이동원 목사

성탄주일예배I 누가복음 19장 1-10절 I 그가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이유 I 이동원 원로 목사 I 성탄절 설교문

by №1★↑♥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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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이유

사랑에 빠진 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고귀한 가문의 딸도 아니고, 부유하고 학식 있는 집안의 딸도 아니었습니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오두막 집에 사는 비천한 시골 처녀와 왕이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왕은 그녀를 한번 보자마자 온통 사랑에 빠졌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으로써 이 여인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신하들은 왕이 명령만 하달하시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궁으로 데려오겠다고 했지만, 왕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귀족의 직위를 하사하고, 아름답게 치장시킨 다음 왕비로 삼으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있었지만 그 안도 왕은 거절합니다. 왕이 원한 것은, 왕을 향한 자발적이고도 진실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왕은 결심합니다. 왕의 지위와 특권을 다 내려놓고, 그녀가 살고 있는 시골 마을로 내려가서 당분간 평범한 농부로 살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자기가 사는 곳, 입는 옷, 먹는 음식, 모두 그녀와 동일한 상황 속에 들어가서 그녀를 만나 그녀에게 사랑을 구애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게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를 마침내 자기의 신부로 삼고자 하는 유일한 목적을 이 왕은 마침내 실현합니다. 이 이야기는 덴마크의 유명한 실천주의 철학자 '키엘케골'이 '철학적 단편'이라는 책에서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교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자리를 내려놓고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의 교리. 인카네이션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가 사용했던 이야기입니다. 

시골 처녀를 사랑하는 왕이 그녀를 신부로 삼기 위해서 택할 수 있었던 두 가지 방법. 혹은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녀의 신분을 상승시켜 왕궁으로 데려와 그녀의 직위를 올려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왕이 시골 처녀의 삶의 상황 속으로 내려가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진실한 사랑으로 그녀를 자기의 신부로 삼고자 하는 왕이 선택한 길은, 스스로 내려가는 길이었고 그렇게 해서 마침내 그녀와의 아름다운 사랑의 연합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빌립보서 2장을 읽어보시면, 바울 사도가 비슷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설명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시면 그는 하나님과 동등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사 친히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섬기시고 사랑하셨다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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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삭개오라는 사람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주시는 이 사건의 마지막 결론이 오늘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아들이 되어 그가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과연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인자되신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 잃어버린 죄인을 구원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첫째는, 잃어버린 죄인을 구원코자 오신 것입니다. 그 샘플 케이스로 소개된 사람이 바로 삭개오였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누구입니까? 본문의 2절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눅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예수님 당시에 그가 살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들은 세리를 무척이나 혐오했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에 빌붙어서 로마 황제에게 헌납할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서 자기들과 같은 동족들을 무척이나 괴롭히고 착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삭개오는 세리들의 우두머리, 세리장이었습니다. 오늘로 치면, 국세청장 정도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동족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막강한 권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인간의 생존의지 가운데 인간을 생존케 하는 가장 강력한 의지 중 하나가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했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이 땅의 최고 지도자가 되려고 분투를 하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권력 의지가 강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삭개오는 그런 권력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고, 마침내 권력의 정상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에 도달하기 위해서 세무서장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돈을 착취해야만 했을까요? 따라서 그가 소유한 권력은 부끄러운 권력이었던 것입니다. 권력의 행사를 통해 부끄러운 부를 소유했던 그의 마음속에는 어쩐지 양심의 깊은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던 죄인이었습니다. 비록 권력의 행사를 통해 부를 행사하고, 권력도 소유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는 깊은 어둠이 그를 다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신을 우리는 맘몬의 신이라고 합니다. 혹은 황금의 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황금을 Gold라고 하지 않습니까? Gold에서 l를 빼면, God이 됩니다. 신이 됩니다. 옛날 시내산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마치 신으로 섬겼듯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도 황금을, 돈을 주식을 증권을 요즘에는 비트코인을 신처럼 섬기고 추구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 일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이름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Clean, 청결하다, 깨끗하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사람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을 때 동네 사람들은 수근 거리며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눅 19: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이름의 뜻과는 달리 소문난 죄인이었습니다. 청결이름과는 상반된 불결한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예수님이 자기의 동네를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만나고자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먼저 그의 이름을 알고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5절에 보시면,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그가 올라가 있었던 돌 무화과나무를 보시면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소유한 사회적 지위, 황금과 상관없이 내적으로 갈등하고 있었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팔레스타인에 소문나기 시작한 메시아로 알려진 예수. 그분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눅 19:3a,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 거예요. 눅 19:4a,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그분을 구체적으로 만나 자기 인생의 문제를 해결을 시도한 것입니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라,. 옛날 성경은 '뽕나무'였는데 시정되었어요. 

그는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알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먼저 아셨어요. "삭개오야"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저분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아셨을까?' 자기 이름을 부르시는 그 예수. 이쯤 되면 우리는 본문의 스토리의 시작에서 삭개오라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야기로 출발했지만, 중간쯤 오면 생각을 달리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야기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고 싶어서 그를 찾아온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결론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그렇습니다. 삭개오는 잃어버린 죄인이었어요. 부가 있었지만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이 있었지만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돌아갈 자기의 집을 알지 못하는 사람. 인생의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내가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 돌아갈 마지막 본향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 지금 죽으면 어디로 가지? 목적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모든 사람은 다 잃어버린 방황자인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1절이 어떻게 시작하나요? 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왜? 예수님이 여리고로 찾아오셨을까요? 이 한 사람, 삭개오를 만나 주시기 위해서. 그렇다면, 동일하신 예수님이 저를 만나 주시기 위해서 우리 동네를 지나가시는 주님이 아닐까요?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사람의 아들이 되어 잃어버려지고, 방황하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신 날. 이것이 바로 성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에게만 메리 크리스마스! 

 

 

 

2. 가정 변화의 희망이 되고자 오신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이유? 두 번째는 희망이 되고자 오신 것입니다. 기독교가 단순히 개인 구원의 종교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나 구원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으로 이 만남의 사건을 끝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5절을 보십시오. 눅 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시겠다는 거예요. 그 집에서 묵어 가시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본문 7절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이 이 집에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불만을 터트립니다. 눅19:7b,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그런데 바로 그 불평 때문에, 그 불평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으로 방문하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소문난 죄인의 집도 변화 될 수 있다는 샘플을 그분은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 삭개오 말고, 성경에 유명한 세리가 또 한 사람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도 세리입니다. 마태도 예수님이 자기의 제자로 삼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하셨을 대, 세리 마태는 너무 기뻤어요. 동네에서 큰 잔치를 열고, 자기 동료들, 세무 공무원들을 다 초청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네의 바리새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불만을 터트립니다. 도대체 "저 예수라는 자, 메시아로 불리는 저 자가 죄인들을 모아놓고 먹자판 잔치를 벌이냐?"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 기억하시나요? 눅 5:31-32,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겠느냐? 너희들이 정죄하고 있는 세리가 바로 의사로서, 구세주로서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느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래서 마태의 집은 예수님의 방문을 통해서 죄인, 세리 마태의 집에서 성도의 집, 예수의 집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삭개오의 집도 에수님이 방문하심으로 죄인, 세리, 삭개오의 집이 아니고 성도의 집으로 변화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이라면? 한 개인의 변화에서 복음이 주는 변화가 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들의 날마다 삶의 자리. 가정이 변화될 수 있어야 복음이 복음 아니겠습니까? 구약의 노아가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나요. 그 변화는 우선 노아의 가정에서 일어납니다.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식구들. 히브리서 11장 7절은 이 사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가 그 시대의 사람을 다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자기의 식구는 구원했잖아요? 그 집을 구원하고, 노아 한 집의 구원은 당시 세상을 향한 믿음의 증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은 의의 상속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떤가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복음을 가지고 당시 마케도니아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전도하다가 바울이 잡혀 감옥에 들어가 몹시 맞고, 쇠사슬로 묶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한 밤 중에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옥토가 흔들리면서 죄수들을 메고 있던 사슬이 풀어집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면서 ' 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틀림없구나!'라고 느꼈던 간수들이 바울과 실라를 향해서 이렇게 외치지요? 사도행전 16:30a,..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바로 이때 바울이 유명한 말씀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너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바울이 증거 했던 복음은 적어도 가정 변화의 희망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오신 이유, 우리 가정의 변화의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초대교회, 온 세상을 향해서 전파되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복음을 받아들인 집집마다 교회가 태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이런 대목을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다시 말하면, 집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처소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정의 변화, 가정 변화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성탄은,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 그가 가족 변화의 희망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만 메리 크리스마스

 

 

 

3. 인간 변화의 희망이 되고자 오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세 번째 이유, 인간 변화의 희망이 되고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뭘까요? 저는 그것이 인간의 변화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자주 후회할 때가 언제냐? 왜 이렇게 인간이 변화하지 않을까? 교회는 나오지만 변화지 않는 인간을 바라볼 때마다 목회의 절망이 생겨요. 오죽하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저를 대신해서 이런 말씀을 기록했을까요? 렘 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여기 '구스인'이 나와요. 아프리카 북부 지역의 사람들을 보통 구스인이라 불렀어요. 그들의 피부가 변할 수 있느냐? 혹은 얼룩 점이 있는 표범이 변할 수 있다면, 너희도 변할 수 있다. 그런데 변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도 변할 수 없다.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성은 인간의 악성은 그렇게도 깊은 것입니다. 변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쩌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변화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개입하셔도 불가능할까요?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가능합니다. 제가 목회에 절망하다가 가끔 변화하는 사람이 등장해요. 그래! 복음은 복음이로구나! 그래서 저는 목회를 계속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지 않아요. 자주 있으면 좋겠는데, 가끔 있다가 변화하는 사람이 여러분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능은 해요.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주님이 역사하시면 가능합니다. 그것이 복음이에요.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은? 인간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케이스였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여놓고 고백하는 8절의 말씀입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 당시에 남의 것을 도둑질 허거나, 빼앗은 사람들이 배상할 때 배상법에 따르면 원금에 1/5만 덧붙이면 돼요. 레 5:16,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이것은 거룩한 성물을 잘 못 취했을 때의 배상법입니다. 일반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 5:7,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그런데 지금 삭개오는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세무청장으로 부정한 뇌물을 그가 안 받았을까요? 그래서 부자가 되었는데 "제가 토색 하고, 도적질 한 모든 것에 대해 4갑절로 갑습니다. 1/5이 아니라 4배로 갚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얼마나 확실한 변화의 증거입니까? 복음만이 희망입니다. 복음의 주 이신 그리스도만이 인간변화의 유일한 희망이신 거예요. 그래서 삭개오는 본문 6절에서 그 예수님이 자기 집에 가신다고 하니까, 눅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그렇습니다. 그분을 영접할 것은, 급히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하고도 신속한 결단의 과제인 것입니다. 인간 변화의 과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시대 가운데 미국의 대통령들이 많이 바뀌었는데, 나이가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할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리처드 닉슨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의 재임 시절에 '워터 게이트'라는 사건이 터집니다. 그때 미국과 전 세계 언론은 미국의 법률 보좌관이었던 한 사람, 그분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그의 이름이 '찰스 콜슨'입니다. 그의 별명은, 면도날, 도끼날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사람입니다.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내 할머니의 등도 밟고 지나갈 수 있다."라고 할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변해도 변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찰스 콜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워터 게이트 사건이 번져가면서 재판을 받고, 그가 감옥으로 갑니다. 그가 감옥에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던 크리스천 친구들이 유일하게 콜슨도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성경을 전해 줍니다. 더불어 C.S 루이스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을 줍니다. 그가 감옥에서 성경과 이 책을 읽고 회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재판을 받으러 나가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감옥에서의 시간이 길어질 것을 알면서 달게 죄 값을 받겠노라고 자백하게 됩니다. 변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변화된 간증을 책으로 써냅니다. 그것이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Born Again. 백악관에서 감옥까지' 

그는 감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출소하자마자, 교도소 선교회를 만들었고 남은 여생 동안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들을 변화시기키 위한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자기 일생을 바칩니다. 그리고 미국과 전 세계에 유익한 영향을 끼칩니다. 한국에도 그의 영향으로 세워진 기관이 있어요. 인간 변화. 어렵습니다. 인간 변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가능합니다. 인간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이유.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인간의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마다 진실하게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변합니다. 이것이 인간 변화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 희망이 이 크리스마스에 다시 한번 선포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조용히 기도할 때, 여러분들의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나도 주님이 아니면 변화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속에 오셔서 나를 변화시키고, 우리 가정의 변화를 주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더불어 아직까지 교회에 나오긴 하지만 마음에 영접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내 주로 영접한 체험이 없다면 오늘 그분을 영접하고 이 변화와 구원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변화되지 못한 가족들, 아직도 변화지 못한 이웃들을 품어달라고. 그들을 만나 달라고 다 같이 "주님, 내 사랑하는 이웃들을, 가족들을 만나 주십시오." 부르짖고 함께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이 내게 오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원히 변화할 수 없었던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오셔서 주님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성탄이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충분히 변화되지 못하였사오니 우리를 온전히 변화된 자로 세워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 가족 가운데 우리 이웃 가운데, 친족 가운데 아직 변화지
못한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주님 그들을 만나 주시옵소서. 
그들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함께 기쁨의 성탄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가 아직도 우리의 희망이고, 구원이심을 선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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