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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이동원 목사

이동원 목사 설교 I 야고보서 1장 1-4절 I 야고보가 전한 복음

by №1★↑♥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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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가 전한 복음

- 이동원 목사 -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야고보가 전한 복음'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야고보가 전한 복음적 삶'이 좀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를 통해서 야고보는 복음 자체를 설명하기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영어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두 손을 쫙 펴고 묻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이걸 영어로 뭐라고 해요?" 아이들이 대답하기를 "finger요" 선생님이 다시 손을 웅크리고 묻습니다. "이건 또 뭐라고 해요?" 아이들이 대답하기를 "안 핀거요." 그랬다고 해요. 아이들이 참 지혜롭습니다. 아이들의 탁월한 영리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였고, 유치원 교사였던 '로버트 폴 검'이라는 분이 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가운데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있지요.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지혜는 대학원이라는 높은 산 꼭대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치원. 아이들의 모레 성 속에 있다. 

 

인생의 실패라는 것은, 거창한 진리나 지혜를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우는 단순한 진리. 그 진리를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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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인생의 성숙이라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출발하면서 최초의 교육 과정에서 배웠던 단순한 삶의 기본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결국 우리의 미성숙이고,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본에 행하는 것이 성숙이 아닐까요?

오늘 야고보서라는 편지의 독자는 1장 1절의 서신이 열리면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보낸다고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초대교회는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련을 만나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의 기사는 처음 교회가 핍박을 받아 흩어지는 모습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도행전 8: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들이 박해가 오자 흩어졌습니다. 거기다가 그들이 소중히 여겼던 지도자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후에 주의 백성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더 먼 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지명들은 팔레스타인 지경 바깥 더 먼 곳들입니다. '베니게' '페니키아'로 일종의 레바논 지역이에요. '구브로' '사이프러스 섬'입니다. '안디옥',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더 먼 지역으로 그들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대목에 주기록된 말씀에 주목하세요. 그들이 흩어졌지만 말씀이 이방인에게까지 가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 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울이나 그 밖의 사람들이 흩어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아직은 유대인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었지만, 그러나 아직은 예수를  따라 사는 삶이 무엇인가? 그 삶의 기본을 정립하지 못한 미성숙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초는 배웠지만 성숙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믿음 이후에 성숙은 도대체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일으키셔서 바로 야고보 서신을 쓰게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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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신서를 연구할 때마다 맨 먼저 등장하는 문제가 무엇이냐? 야고보가 누구냐?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한국 이름 중에 이 씨나, 김 씨만큼이나 흔한 이름입니다. 12제자 중에도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런가 하면,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가 아닌 유다가 한 사람이 또 있었지요? 그의 유다의 아버지가 야고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학자들은, '야고보'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였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그것은 이 편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유대 사정에 아주 정통하고 예수님 가까이 있었던 사람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편지를 보면, '흩어진 열 두 제자들에게 쓴다.' 유대인이 쓴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유대인의 회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회당 생활에 익숙했던 사람. 그리고 우리가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복음서의 어떤 부분과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냐? '산상수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어떤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야고보서를 보면, 기도에 대한 교훈 그리고 경건의 실천에 대한 강조가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조건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7장 3절 이하 5절을 보면, 예수님의 친 형제들도 예수님이 한창 활동할 때에 예수님이 메시아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아나 요셉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탄생할 때 천사를 통해서 낳으실 그분이 '예수', '구원자'라는 계시를 받았거든요. 그러나 예수의 동생들은 그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정말 예수님이라면 왜 여기만 있습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당신 자신을 멋지게 한번 증명해 보십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랬던 형제들.. 그중에 야고보가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부활 이후의 사건 때문이라 확신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 동생 야고보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이 부활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났어요.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끝난 줄 알았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신을 만나 주셨을 때의 야고보가 받았을 충격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 그분은 정말 메시아였구나!' 그다음부터 그는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를 신실하게 증거 하는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자만심을 가지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도 일치감치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신뢰하지 못한 것을 늘 죄송스럽게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절. 편지의 서두에서 자기의 정체를 밝히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라고 합니다. "나는 그분을 따르는 종에 불과하다고.. 나는 그분에 메여 그분을 증언하는 부르심을 받은 종이라."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초대교회의 신자들에게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됩니다. 초대교회가 신앙적인 박해를 받아 흩어지기 시작했을 때 아직도 신앙이 어린 신자들. 그들의 신앙을 붙잡아 주고, 그들의 믿음의 진정한 성숙을 촉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바로 야고보를 통해서 그들에게 이 편지, 메시지를 주시게 된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을 촉구하실 필요를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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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야고보서 전체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하나 있어요. 그 단어는 바로 '온전함'입니다. 여기서의 '온전함'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라리 '성숙함'이 본 의미에 가까운 뜻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진정한 성숙을 촉구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복음 그 자체를 설명하기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복음적인 삶.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이 편지가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기대했던 믿음의 성숙. 믿음의 온전함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야고보는 두 가지 초점에서 야고보서를 기록합니다. 

 1. 우리의 믿음은 시련으로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우리의 믿음은 시련으로 온전케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시련을 통해 믿음은 비로써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여러 가지 시험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 '여러 가지'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원문에 의하면 '여러 가지 색깔'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색깔, 형형색색의 시험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어떤 시험을 경험하고, 만날 때 나만 이런 시험, 나만 이런 고통, 아픔을 경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의 종류가 다를 뿐입니다. 시험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저 사람은 또 다른 시험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만이 경험하고 있는 어려운 시험이 있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통과하고 있는 시험이 있을 뿐.. 누구든 시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어떻게 시험을 기쁘게 여길 수 있나요? 정서적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의지적으로라도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온전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성숙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이 '시험'이라는 단어는 원래 헬라어 '페이라스모스'입니다. 두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어요. 하나는, '시련 혹은 연단(trial or test)' 또 다른 의미는, '유혹(temptation)' 야고보서의 서론에서는 '시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단, 믿음의 핍박을 받아 흩어지고 있는 성도들 그들에게 야고보는 펜을 들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시련이라, 우리의 믿음을 test 하는 것이라. 그리고 이것을 잘 견디면 우리는 성숙할 수 있다." 야고보서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믿음의 시련'이라고 했잖아요? 이것은 믿음을 연단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학교를 다니게 되면, 학생으로서 시험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시험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이라는 통과 의례를 거치지 않고 아무도 학교를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학교 다닐 때 나는 시험이 다가오기만 하면, 가슴이 설레면서 그 시험이 너무너무 기다려졌다. 손 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지요? 그게 정상입니다. 또 하나 질문 드릴게요. 그렇다면, 아무도 좋아할 수 없는 시험. 이것은 우리의 교육제도 안에서 영원히 제거되어야 마땅하다. 손 들어 보세요. 그것이 뭘 뜻할까요? 아무도 시험을 좋아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시험을 치르고 나면 내가 어떤 과목에 있어서 뒤 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어요. 그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 전체적으로 성적이 업그레이드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장이고 향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 속에 시험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 '온전'이라는 단어가 두 번씩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야고보서를 읽는 열쇠이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단어가 바로 '온전함'이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텔레이오스'라는 단어로, 완전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숙한다.'에요. 다시 말해 이런 시험을 허용하시는 이유, 시험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성숙시켜 가는 것입니다. 지금 신앙의 박해를 경험하고 흩어져 가는 성도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테스트입니다. 믿음의 시련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온전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이 올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다른 것 아니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야고보서 5장 7-12절에서 그래서 바로 이 문제를 다시 다룹니다. 시련의 과제를.. 거기서 일관성 있게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인내입니다. 참으라는 것입니다. '길이 참으라' 다시 말하면, 그 현실에서 도피하지 말고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생이 시험을 치르면서 시험지를 앞에 놓고 이렇게 기도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 시험 안 치르게 도와주세요." 말이 안 되는 기도지요. 시험지가 앞에 있으면 무슨 기도를 해야 할까요? "시험 잘 치르게 해 주세요." 그 시험은 비껴갈 수 없어요. 그 현장에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사건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과 아랍이 많은 전쟁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중동전쟁이 일어났을 때 실제 일화라고 합니다. 밤 사이에 중동 전쟁이 발발해서 교수님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기 클래스 안에 이스라엘 학생이 있고, 아랍 학생도 있었거든요. 그 이튿날 클래스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학생 여러분,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두 학생은 몰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중동 지역에서 오신 학생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저는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공부에 열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 여러분들의 조국에 기여하고, 여러분들이 사는 세상이 평화롭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잘 견디고 수업에 열중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렇게 부탁을 했어요. 그 이튿날 두 학생이 다 결석을 했습니다. 묻습니다. "두 학생이 어디 갔느냐? 내가 그렇게 수업 잘하라고 부탁했는데.." 친구들이 대답합니다. "이스라엘 학생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국으로 갔고, 아랍 학생은 징집영장 나올까 봐 어디론가 잠적했습니다." 여러분 이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피하면 승리할 수 없어요.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시험을 피하는 것은 결코 승리가 아닙니다. 시험은 고통이지만, 시험은 어려운 것이지만 견디며 그 자리에서 적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서 성숙한 자로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말하는, 야고보가 기대하는 믿음의 성숙입니다. 왜? 고통이, 시련이 인생에 다가오는가? 이것을 통해서 그 현장을 통해 성장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참고 견디며 주의 도우심을 힘 입고 성숙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잘 견딥시다." 해 보세요.

 

 

 

 

 

 

 

야고보서를 기록한 또 하나의 목적이 있어요. 그것은 믿음을 단련시켜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또 하나는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기 위함입니다. 

 2.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야고보서 1장에서 '온전하다'는 단어를 몇 차례 만났습니다. 우리는 2장에서 다시 '온전하다'는 단어를 또 만나게 됩니다. 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우리의 믿음은 무엇으로 온전하게 된다고요? 행함을 통해서..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고보서를 피상적으로 읽고 있으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말씀과 매우 역행하는 교훈을 주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어요. 여러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보면 '우리의 행함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다만, 믿음으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 오게 되면 좀 달라지요. '행함으로 의롭다'는 표현이 문자적으로 나와요.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후대의 개신교 학자들. 특별히 루터의 전통을 이어받은 후학들까지도 이런 "루터의 결론은 너무 성급했다. 루터가 너무 이신득의에 매달린 나머지 야고보서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사실 야고보서와 로마서는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배경에서부터 기록되고 있는 거예요. 야고보가 강조하고 있는 행함은 구원 조건으로써의 행함이 아니에요. 구원의 결과로써의 행함이에요. 우리가 정말 예수 믿고, 정말 구원받았다면 행함의 열매가 있느냐? 열매를 강조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조심스럽게 그 맥락을 야고보서에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런데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것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어요. 이 드리는 행위, 행함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 사건이 창세기에 어디에 기록되어 있냐? 창세기 22장. 그런데 창세기 22장에 이르기 전에 15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는 아직 이삭이 태어나기 전이에요. 아브라함은 후손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나이가 100살에 가까웠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약속대로 아들을 줄 것이다. 전능한 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설득을 들으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부활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아들을 받게 되지요. 이 사건 속에서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이 나와요. 이렇게 믿음으로 일단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이 시간이 지나간 후 그의 믿음을 시험하세요.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제단에 묶지요. 이 사건을 통해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이 이 사건을 통해서 그의 믿음을 증명한 사건이에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고, 말뿐인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이 사실을 야고보서 2:26이 어떻게 말하고 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었어요. 그는 행함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임을 증명한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교회의 역사 전승을 읽어보면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야고보처럼 놀라운 삶의 변화를 가져온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경건 생활에 철두철미 했습니다. 그는 깊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주어진 별명이 낙타의 무릎을 가진 사람. 또 하나, 야고보는 경건한 실천에 힘썼습니다. 얼마나 이웃들을 돌아보고 약자들을 돌아보았는지 그에게 또 다른 별명이 주어집니다. '의인 야고보', '성자 야고보'. 그는 의인으로 많은 사람에게 불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유달리 야고보서에서 보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불쌍한 이웃들에 대한 배려와 돌봄을 경건의 실천으로 야고보가 강조합니다.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죄를 안 짓는 것. 그것만이 경건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 이것이 경건이라는 거예요. 야고보서 5장 1-6절을 보면 가난한 자를 착취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의인을 죽이는 행위라고 부자들이 부를 올바로 사용할 것에 대한 실랄한 경고가 나옵니다. 야고보서 5: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래서 약한 자를 돌볼 줄 알아야 한다고.. 여러분의 신앙의 경건은 주일날 예배 드리러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끝나고 밖에 나갔을 때 내 주변에 연약한 자들이 있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해야 할 장소는 예배 당 안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한 복판에서 힘들고 연약한 이웃, 고아와 과부와 장애인과 가난한 이웃들을 내가 어떻게 돌보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쓰고, 애쓰고 있느냐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시험받고 있는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몸 짓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비로소 성숙하는 것이라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이라고.. 그런데 우리는 설교만 듣고 삶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서를 쓴 것입니다. 이 메시지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많은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성경공부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행함으로 증명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천당에 도착했는데, 제일 먼저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럴 줄 기대는 했겠지만, 천국에 가서 막상 예수님을 만나니까 너무 당황을 해서 첫마디를 어떻게 뗄 줄 몰라서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해요. "예수님,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그랬다는 거예요. 에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나요? 그런데 그 말씀에 합당한 삶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어떤 교회에 새로 목사님이 부임했는데, 주일날 첫 설교에 교인들이 너무 많이 은혜를 받았어요. "정말 우리 목사님 잘 오셨구나!" 그런데 그다음 주에 똑같은 설교를 하시는 거예요. 세 번째 주일에 똑같은 설교를 또 하시니까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용기 사람이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어쩌자고 세 번씩이나 똑같은 설교를 하십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렇게 질문하시더래요. "제가 설교를 하는 목적이 뭘까요?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는 목적이 뭘까요? 그래도 살기 위함이 아닐까요? 그런데 세 번씩 설교했지만 아직 제가 한 설교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실천되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모습에 실천되기 시작할 때 제가 새로운 설교를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가 기록된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전한 복음이며, 야고보가 기대했던 복음적 삶에 대한 기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정말 온전해지려면..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의 삶에 한 복판에 두시는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그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려는 그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신다. 우리가 성숙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신다. 그런 성숙의 애씀이 우리의 장에 정말 나타나고 있나요? 저는 지금이야 말로 제2, 제3의 야고보가 필요한 순간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그대로 순종하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주 앞에 펼쳐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야고보가 기대했던 이 복음적 삶에 대한 기대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임을 일깨우는 이 날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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