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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이동원 목사

[이사야2] 이사야 2:1-5 I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I 이동원 목사

by №1★↑♥ 2021. 7. 12.

[주일 설교] 이사야 2:1-5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이동원 목사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한 중요한 특성을 말할 때, 기독교 신앙을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의 반대가 있다면, 순환론적 신앙이 있습니다. 순환론적 신앙을 대표하는 종교는 힌두교, 불교. 이 둘 종교의 세계관과 시간관이 순환론적이기 때문입니다.  순환론적이라는 것은? 순환된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사람이 짐승이 되고, 짐승이 사람이 되는.. 이런 순환적 시간관 혹은 세계관 속에서는 긴장이 없습니다. 다시 돌아오니까.. 사회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성경의 시간관은 순환이 아니라, 직선입니다. 종말론적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이 분명히 존재하고, 이러한 시간관에 입각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가리켜 우리는 처음이요 마지막이 되시고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에 대해서 태초를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을 상상합니다. 예컨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의 첫 구절은 얼마나 장엄하고 서사적인 표현인지요? 창세기 1장 1절을 묵상하다가 감동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처음이 아닌 마지막을 생각할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생각을 합니다. 이런 종말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 집단을 형성하는 종말론적이고, 광신적인 이단이 그동안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적 선지자였던 이사야는 오늘의 본문에서 종말론적인 비전을 펼치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파괴적인 종말론과 전혀 다른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절이 시작되는 처음을 주목해 보십시오. '말일에..' 이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in the last day..'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과 대조적인 구절은 창세기 1:1에 '태초에..' in the beginning..'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말일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사건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파괴적이 아닙니다. 비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메시아가 다시 오시고 그분을 통해 펼쳐질 영광스러운 비전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여기 세 가지 중요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1. 메시아가 다시 오시면 열방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산에 올라 여호와의 전에서 예배한다는 예언.
  2. 시온의 산에서 태초에 만유를 창조하시던 그 말씀을 시온의 산에서 받고 그 말씀대로 행하게 되리라는 예언.
  3. 모든 전쟁이 끝나고 인류는 평화의 세상을 누리게 되리라는 예언

 

  이것이 진정한 성경적 종말론입니다.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비전이 아닙니까? 여기에 파괴적인 예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종말론 가르친다고 세상 망한다고 선전하는 그런 가짜 종말론. 그런데 가지 마세요. 성경적 종말론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종말의 비전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거예요. 이런 종말을 성경적 종말론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럼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오늘 본문의 결론이 5절입니다. 

  5절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여기서 또 한 번 하나님이 구원의 백성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적 종말의 비전을 바라보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종말론적 삶으로의 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비전을 가진 성도들의 종말론적인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 만민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왜 이사야 선지자들은 3절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통적 유대인들은 소위 말해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던 산을 가리킬 거예요. 이 산은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데리고 올라가 제단에 눕혔던 모리야 산과 동일합니다.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눕혀 놓던 그때부터 (우리는 모리야 산이라 부르지만..) 여호와의 산으로 불렸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2:14 '아브라함이 그 땅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또 그 산에다가 나중에 성전을 지었기 때문에 '성전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에 가면, 세 개의 산이 있는데 세 개의 산의 위치만 파악하면 지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한 복판에 있는 산이 성전산. 남쪽으로 작은 언덕이 있는데 그게 시온산이에요. 그리고 제일 높은 산이 바로 감람산입니다. '여호와의 손에 오르자'는 초대는 바로 이 산에 있는 여호와의 전으로 가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자는 초대입니다.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특권입니다. 여러분 짐승은 예배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있다면 역사의 마지막 날, 말일에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났던 인간들이 다 모여 와 이 산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2절에 나타난 예언입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반역하고 떠나며, 흩어져 갔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으로 몰려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엄함이 실현되는 그날. 천하 만국의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지막 예언의 성취. 그걸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 요한계시록 7:9-10이고, 그 구절에 근거해서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에게 있도다 하니'

  오늘 이사야의 예언이 바로 그 종말의 예언이었다면, 오늘부터 연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종말 준비입니다. 그것은 열방에 모든 이웃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훈련인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 교회는 한국어로만 드리는 예배 말고도 영어예배가 있어요. 중국어 예배, 일본어 예배, 동남아시아 여러 예배가 드려집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예배에도 참여하셨으면 좋겠어요. 아니, 여름철 단기선교, 아웃리치에 참여하는 성도님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한국어가 아닌 여러 나라 열방의 언어로 예배하는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배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아, 하나님은 한국인만의 하나님이 아니구나! 하나님은 중국인의 하나님도 되시고, 태국인의 하나님, 베트남인의 하나님, 미얀마인의 하나님, 만국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 아닐까요?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비전. 이것이 종말에 하나님의 비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종말론적인 비전을 믿는 자들이라면 지금부터 할 일이 무엇일까요? 차별 없이 모든 민족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연습. 혹, 그들이 하나님을 알아야 예배하니까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 하는 해외선교. 이게 바로 종말의 준비입니다. 종말의 준비는 라면사 들고 기도원에 가서 밤새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해외선교, 이웃들과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 예배하는 것이 종말의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도 서서히 다인종, 다문화사회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이 땅의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의 숫자가 17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2025년에는 이 땅에 체류하는 외국인이 500만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우리 땅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수가 500만이라는 것은? 이 땅의 20%, 10명 중 2명이 외국인과 더불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선교의 황금기가 이 땅에 도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말과 습관이 다른 외국인, 이웃들을 만나면 따뜻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나누는 일. 그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의 준비라는 삶의 준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종말론적인 삶, 어떤 삶입니까? 만민의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삶. 또 하나의 종말론적 삶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랐을 때 일어날 종말론적인 삶을 본문은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3절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여기서 율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문으로 보면, 율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가 없습니다. 영어로 The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하는 '율법'으로써의 계명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써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라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날 하나님의 산 시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행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종말론적 비전 중 하나인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어요. 우리는 말씀을 받아, 그 말씀 가운데 행하며, 그 말씀이 세상을 통치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때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만 말씀을 받고, 부분적으로만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만 온 인류가 말씀의 빛 가운데서 행하게 되리라. 이것이 마지막 비전인 것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모든 인류의 빛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 5절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빛에 행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냐?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 가운데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실현되는 거룩한 비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 종말을 믿고 사모하는 자들이라면? 오늘도 지금부터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은 단순한 지적인 정보나, 단순한 만족을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니에요. 우리는 교회 나올 때마다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을 실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사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설교 자주 듣고 말씀을 듣기에, 말씀처럼 행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듣고도 말씀대로 전혀 살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가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마다, 크리스천 방송마다 설교가 넘쳐흐르는데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 무엇 때문일까요? 말씀을 듣는데서 끝나기 때문입니다. 진지하게 듣지도 않아요. 말씀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창조자이신, 심판자이신 말씀을 듣고 계신가요? 그리고 듣고는 끝나버리는 거예요. 하다 못해 한국교회 안에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천국에 도착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만나자마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얼결에 한다는 소리가 "예수님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습니다." 그것이 내 삶을 만들지 못해요. 들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 실랄한 경고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삶의 비전. 말씀에 붙들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이게 종말론적인 삶의 준비라는 것. 말씀의 준비란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종말론적인 삶의 비전은 하나님의 평화를 구현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종말의 여호와의 산에 올라 그때에 보게 될 또 하나의 비전 4절입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그날 역사의 주권자이신 창조자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최종적인 비전. 그것은 평화의 비전이에요. 인류가 오랫동안 그렇게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평화가 말일에 마지막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의 뜻을 아세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는 본래 '이르'(도시)라는 '살렘'(평화)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이르살렘. 그러면 평화의 도시. 그런데 이 세상 모든 도시들 가운데 가장 평화롭지 못한 도시가 어디인지 아세요? 예루살렘이에요. 역사를 통해 가장 많은 분쟁을 겪고 있는 도시. 지금도 예루살렘은 동서로 나누어서 팔레스타인과 사이에서 지금도 이 순간도 분쟁을 겪고 있어요.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면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가 아니라, 평화를 기다리는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예언합니다. '말일에, 마지막에..' 거기서부터, 예루살렘으로부터 진정한 평화가 실현된다고. 그리고 평화는 온 세상 가운데 실현될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인류의 궁극적인 평화는 어떤 특별한 기구의 전쟁 조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통해 그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비전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사람은 어떠해야 할까요? 그 평화를 믿는 자들이라면 평화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여러분과 제가 믿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빌 4:9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평화의 하나님이세요. 

 

  이사야를 계속 읽어나가면 이사야 9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메시아를 가리켜서 그분은 '평강의 왕'이라 합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은 원수 된 것을 폐하시고 하나가 되게 하신다.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그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그 예수를 따르는 자라면 어떻게 할까요? 산상수훈 팔복 가운데 하나가 마 5:9의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 영어로는 피스메이커. 반대가 뭐죠? 트러블 메이커. 가는 데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이 있지요. 옆에 사람에게 '피스 메이커인가요? 트러블 메이커인가요?' 하나님이 평화의 하나님. 그 아들이 평화의 왕자. 저와 여러분들이 그분들을 따른다면 평화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기뻐하십니다. 아니, 도저히 평화하기 어려운 이웃들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평화할 때 그 순간마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비전 실현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이 땅은 지구 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남북한의 대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땅의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수년 전 저는 북녘땅에 NGO 단체와 함께 북한을 돕기 위한 노력으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한 북한 관리가 악수를 청하면서 "이제 선생님들은 우리의 동지요, 친구입니다."라고 하길래 제가 "아닌데요?" 그랬어요. 그건 희망사항일 뿐, "아직도 남북의 대치는 계속되고 있고, 엄연히 긴장관계 속에 있는 원수 아닙니까?" 얼굴이 빨개져요. 그러자 "왜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여기에 오셨습니까?" "저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고요.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읽는 책이 있는데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왔어요." 가만히 있어요. 아마 지금도 생각을 계속할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그것 때문에 사는 거예요. 증오를 평화로 만들며 살아가는 것. 그렇습니다. 그 평화가 실현되도록 우리는 여호와의 산에 올라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옳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아직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입니다. 내가 적은 노력이라도 불완전한 노력이지만.. 평화의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녀로 평화의 주님의 제자로써 평화를 만들 때 그분이 기뻐하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저와 여러분들이 쓰임 받는 복된 인생으로 이 한 주간도 피스메이커의 삶을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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