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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마가복음5:35-43] 응답이 지체 될 때 I 수영로교회 I 이규현 목사

by №1★↑♥ 2021. 7. 3.

[마가복음 5:35-43] 

응답이 지체될 때

수영로교회 이규현 목사

  지난 시간에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로부터 21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로 중간에 끊겨버렸지요. 야이로가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부탁하러 엎드렸고, 예수님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가던 중에 혈루증 여인의 치유 사건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서 생가보다 거기서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야이로는 마음이 굉장히 급했을 텐데 야이로는 뭔가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에게 집중을 하셨고, 진도가 잘 나지 않았어요.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야이로의 집에서 누군가 와서 소식을 전합니다. 35절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딸이 죽었다는 거예요. 분위기가 급 반전되는 것입니다. 두 사건이 교차되는데, 한 사건은 12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야이로의 딸은 죽게 됩니다. 한 사람에게는 기쁨이, 한 사람에게는 절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희비곡선이 극명하게 교차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12년 동안 병을 앓아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야이로의 딸은 12살입니다. 의미가 있지요. 12지파, 12제자. 뭔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이 "더 이상 예수님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상황 끝났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들지요. 혈루증 여인만 끼어들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시간을 그렇게 끌지 않았다면.. 딸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의 삶에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을 때.. 내가 예측한 데로 모든 게 돌아가지 않을 때 그때에 우리가 기도하지요. 다급해서.. 사실 기도할 때 보면, 다급할 때 기도하더라고요. 다급하지 않을 때는 기도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졸고 있을 때가 많아요. 

  야이로가 보았을 때, 예수님의 행보는 매우 느렸습니다. 혈루증 여인으로 인해서 계속 지체될 때 야이로는 얼마나 애간장이 녹았을까요? 얼마나 가슴 졸였을까요? 그 바로 옆에서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을까요?  중환자를 태운 엠뷸런스가 병원을 향해 가다가 막힐 때 가족들은 가슴이 타지요. 그런데 이미 너무 늦어버렸고, 그 사이에 딸은 죽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야이로에게 최대의 위기가 왔지요.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상황입니다. 야이로가 처음 예수를 찾을 때만 해도 소망을 가졌어요. 믿음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지금 기로에 선거예요. 죽었다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이제 그만두고, 돌아가자"는 거예요. 아마 이때 야이로가 굉장히 많이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때 예수님이 입을 여십니다.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속에는 처음 나를 믿고 그 믿음으로 나를 찾아왔다면, 그 믿음을 계속 붙들고 있어. 그 믿음을 포기하지 마. 이 말은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인가? 아니면 믿을 것인가?  공존할 수는 없어요. 두려움의 세계와 믿음의 세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만약에 믿음을 분명히 가진다면, 두려움은 떠나갈 것이고, 두려움에 집중하면 거기에는 믿음이 존재할 수 없어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혈루증 여인으로 인해서 시간이 지체되기는 했지만 예수님과 함께 오는 과정 중에 이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낳았던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은 야이로입니다. 야이로는 기적의 현장을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이 야이로에게 이 기적의 현장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기대하는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적을 일으키시어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믿음은 보이는 상황보다 그리스도를 계속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성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야이로의 이야기 안에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를 삽입해 놓아서, 샌드위치. 야이로의 이야기로 시작된 본문이 혈루증 여인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었어요. 이야기의 출발 선상에서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호전되는 것이 아니라, 악화되어 가고 있는..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습니다. 영화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최악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특별히 007가 그렇습니다. 주인공이 거의 죽을 것 같아요. 도무지 길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유능한 감독일수록 최악의 상황을 잘 연출함으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상황입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 주님의 매우 드린 행보. 그리고 마침내 피하고 싶었던 일이 터지고 맙니다. 살려달라고 체면 불고하고 예수 앞에 나와 엎드렸는데.. 우리 아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급하게 찾았는데, 그렇게 느림보 걸음으로 이동하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겨우겨우 예수님의 집에 도착하자 통곡의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12년 동안 길러온 딸이 죽었어요. 한 가정에 자녀의 존재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12살의 딸입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그 아이를 길러왔던 부모의 애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그런데 그 아이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인생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경험이고, 최고의 고통입니다. 그, 순간 주님은 소수만 따르도록 하였어요. 37절에 보니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기적은 쇼가 아니기 때문에 특별한 장면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됩니다. 주님은 아이의 죽음 앞으로 다가가시지요. 그리고 39절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무슨 말입니까? 죽으면 죽은 것인지 잔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코마 상태가 아닙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말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40절에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죽은 자는 죽은 자인데 잔다고 하니까..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의 세계에서만 받아들이려 하고, 자신의 경험의 세계 바깥에 있는 것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비웃는 소리를 들으셨지만 당신은 당신이 하실 일을 하십니다. 비웃는 일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비웃는 자들이 조금 있으면 비웃는 상황으로 바뀔 수밖에..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런다 해도 너무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저 주어진 길을 가시면 됩니다. 드디어 방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41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달리다굼은 아람어로 '소녀야 일어나라' 달리 표현하면, '일어나라 어린양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선포되자 42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비웃던 사람들도 크게 놀랐어요.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잔다는 말씀은 사실이었습니다. 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병이 낫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그동안 마가복음을 다루면서 바로 앞부분에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보셨어요.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통치자.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모든 질병을 지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악한 영들까지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 이제는 뭐예요?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것? 사망의 권세까지 다스리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죽음의 문제까지 다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의 범죄 이후 사망의 권세가 가장 강력한 권세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모두가 그 앞에는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힘이 있고, 잘 나고, 돈이 있고 폼 잡잖아요. 얼마 못 간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해요. 초라해져요. 여러분 인간이 범죄 한 이후에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온 땅을 지배하고 있어요.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은 지나가는 해프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상징성이 있고,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고 재창조의 사건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래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날 일종의 예고편과 같습니다. 죽음으로 인한 절망과 애곡이 가득한 세상에서 생명의 기쁨으로 노래할 날이 이제 올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주는 전주곡과 같은 사건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에서 예언되었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예언과 사건과 같습니다. 사도 요한은 21장 22장에서 더 이상 눈물도 없고, 애통함도 없고, 고통도 없고, 더 이상 죽음이 없는 나라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시지요. 혈루증 여인으로 시간이 지체되고 지체되는 순간에 절망이 깊어졌고, 아이가 죽음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거기에는 주님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놀라운 영광스러운 세계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로 뒤덮인 세상에 부활의 서광이 비춰지는 영광스러운 사건을 준비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의 공포 속에 있습니다. 공포가 미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음 때문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멀리 있지 않고, 매우 가까이에서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것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죽음에 대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냥 죽음이에요. 끝입니다. 지옥이에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일어난 확실한 변화는, 죽음에 대한 답이 주어졌어요. 사복음서 안에서는 이 사건 외에도 죽었다 살아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사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나는 역사. 지금 코로나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 줄 최고의 희소식은 백신 계발입니다. 접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백신은 코로나라고 하는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일 뿐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질 죽음 자체를 몰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 인류를 구원해줄 유일한 백신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처럼 복음이 절실할 때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1:25-26에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야이로의 딸이 죽은 시점에서는 비극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늦게 오신 것은 너무나도 야속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 가정에 불어닥친 죽음의 사건은 뛰어넘기 힘든 거대한 절망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납니다.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보여주시고 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환희의 자리로, 축제의 자리로 바꾸어 놓으시는..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는 불필요하게 끼어든 사건이 아닙니다. 이 죽음으로 가득한 세상 가운데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놀라운 메시지가 숨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데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일을 하실 때 늦지도 빠르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괜히 꾸물꾸물하셔서 어린 딸을 죽게 하신.. 그런 무능한 과실치사를 하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의미 없이 행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늦으면 늦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더듬어 가면, 항상 극적인 반전이 있어요. 오늘 이 사건은 어떤 면에서 늦어지고, 급기야 딸이 죽는 일은 오늘의 이야기에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순간이지요.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준비하고 계셨어요. 지금은 우리는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빨리 손을 써주시기를,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 속에서는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움직여가고 있음을 우리는 신뢰해야 합니다. 상황은 악화될수록 기적은 더 빛이 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리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어요. 전혀 다른 레벨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본래 죽음은 끝입니다. 죽기 전에는 별일을 다해볼 수도 있습니다. 암이 말기 중에 말기라 해도 소망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다릅니다. 죽고 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장례식 말고는..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죽음까지 내모셨습니다. 끔찍한 경험이지요. 그러나 절망의 최고 지점에서 최고의 영광의 자리로 바꾸어 내시는 하나님. 병든 상태에서 낫게 하신 것보다 죽음 다음에 일으키시는 일이 훨씬 더 극적이지요. 죽음이 부활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의 기초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최악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최악의 상태인 십자가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거예요. 맞바로 부활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간격이 있어요. 예수님은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 속에 들어가셨어요. 그것은 가장 절망적인 상태를 알리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빠지면 사람들은 대개 혼란스럽습니다. 혼돈, 절망, 깊은 좌절을 맛봅니다. 이때 중요합니다. 이때 어떻게 반응하느냐? 의 관건입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다 실패해버렸습니다. 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쉽게 "끝났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카이로스. 하나님의 때가 오기 직전이 가장 힘들 때입니다. 부활의 아침이 오기 전, 무덤의 깊은데로 들어가 절망을 맛볼 때가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에요. 절망과 소망이 사이의 간격을 무엇으로 메꿀 수 있을까? 기다림이에요. 기다리는 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바로 앞에 닥친 상황 너머를 보지 못합니다. 한 치 앞도 예측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에 들고, 고통하고, 절망해요. 그럼에도 우리는 빨리 결론을 내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때가 차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에.. 빠른 해결이 전부가 아닙니다. 빠르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메시지는 빠를수록 좋다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빠른 것이 좋다고 믿고 살면, 고혈압, 스트레스, 공황장애에 시달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빠른 게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때와 시기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우리 딸이 죽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그 순간을 이기지 못하고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전도사 1장 3절을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하셨어요. 때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적당한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때로 어떤 사람은 미쳐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시간을 조정할 수 없습니다. 시간의 통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기 때문에 그분에게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우리는 어려운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막연한 기다림은 아니에요.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 돌아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요즘 더욱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되지요. 세상 나라가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가? 우리는 꿈꾸는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지연되고 내가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돌아갈 때가 많습니다. 어떤 날에는 남편이 죽도록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기도했는데 오히려 더 악화되고 이상한 모습으로 흘러갈 때가 있어요. 자녀들에 대한 바람이 있는데 오히려 더 이상한 상태로 나아갈 때 힘들지요. 상황이 나아지기보다 더 나빠져 갈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현실이 힘든 건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가 시간을 조정할 수 없어요. 남편을 당장 변화시킬 능력이 당장 없어요. 사춘기 아이가 빗나갈 때, 어느 한순간 성숙한 어른으로 만들어낼 재간이 우리에게는 없어요. 코로나 상황도 우리가 어떻게 조절이 안돼요.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가장 완전하신 분이시고. 카이로스 결정적인 시간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십자가 보일 때는 아무것도 없고 다 끝난 것 같지만.. 하나님은 부활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처럼..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시간에 순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느리고 빠르고는 우리가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좌절하고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붙잡고 있는 주님을 놓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나 힘들면 힘들고, 흔들려요. 그러나 그 고비를 넘어가야 합니다. 출산의 순간이 가장 힘들 때예요. 죽을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완성의 날이 더 가까워질수록 더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그때에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카이로스의 순간이 반드시 오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믿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는 자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다리는 동안에 하나님은 우리를 더 깊어지게 하세요. 기다리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그 시간을 통하여 우리를 단단하게 하시고, 어떤 일들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믿음의 경지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지체되는 시간,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결코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혈루증 여인으로 인하여 늦어지고, 미루어지고, 지체되는 것. 그래서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고 어떻게 되면 미칠 것 같은 그 상황.. 그래서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지만.. 아니에요.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에서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의 부활을 준비해놓고 계셨던 것처럼 기다림은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지체되는 것은 응답이 지체되는 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가 오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상태로 바꾸어놓으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기다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시는 그래서 반드시 승리의 그날, 영광의 그날, 부활의 소망을 경험하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고 또 기다리고 기다려 가장 영광스러운 반전의 역사를 결국은 경험해 내는 주의 신실한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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