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21-43 I 주일예배 I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간절한 바람이 가진 능력
어느 교수님이 쓴 칼럼을 읽다보니까, 티브이 프로그램 중에 '싱 어게인'이라는 프로가 있었나 봅니다. 이 프로는 실력은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가수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는 차원의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고 하는데요. 그 교수님의 칼럼에서 그 오디션에 참가했던 '이무진'이라는 젊은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요. 이 청년이 이제 '꿈'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라는 가사가 있다고 해요. 심사 위원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이 노래를 선곡한 이유가 뭐냐? 는 질문에 "그 노래가 딱! 자기 이야기 같아서 선곡했다."면서 이 청년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요?"는 질문을 던지면서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서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는 그 길을 갈 수 없어!"라고 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들이 이 젊은 청년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요? 이런 고민이 자신과 닮아 있어서 이 노래를 선곡하게 되었다. 교수님의 칼럼도 읽고 검색해서 청년이 나왔던 노래도 들어본 다음 그가 부른 '꿈'이라는 노랫말을 찾아보니까, 가사가 이렇습니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시절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이 가사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현실적으로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로 가면 안 되는지 늪인지에 대한 답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 곳이 없구나! 이것이 비단 청년들만의 이야기일까요? 많은 세월을 살았다는 기성세대도,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모르는 것이 인생 아닌가요?
이런 어려운 일들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심리학 용어를 들어보셨습니까?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부정적인 상황에 자꾸 노출이 되다 보니까, 노력으로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학습된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최근에 나온 신간 '잠 못 드는 당신을 위한 밤의 심리학' 심리학 교수님 몇 분이서 공저한 책의 앞부분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70%가 물이라면 이들의 정신을 구성하는 70%는 불안이다.' 이 말이 너무 와닿는 거예요. 마음이 아프고 병든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 역시 불안을 떨칠 수가 없는 이유가 여기서 기인된 것이 아닐까..?
오늘의 본문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상황을 보면,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왜 내 인생에는 이러한 고통이 찾아오는지.? 오리무중일 것 같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어린 딸이 생사를 오가는 위기에 처했음에도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온 겁니다. 그게 오늘의 본문 마가복음 5:22-23입니다.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절박한 아비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절망에 놓여 있던 불행한 회당장 야이로였지만, 우리는 본문의 야이로에게서 배울 점이 참 많은데요. 그중에서 결정적인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첫째로, 인생길 가운데 내가 풀기 어려운 그런 문제를 만나면 그때는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가야 할 때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이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아왔다. 12년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놓쳐버린 것이 그거 아닙니까? 이 의사를 만나고, 여기저기 가보면서 재산을 다 탕진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인생. 그것이 사람의 문제 아닙니까? 목사 찾아와서 어떤 문제가 해결이 되던가요?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다가 내가 풀 수 없는 어떤 문제를 만나면 그때는 주님이 부르시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바로 그거 아닙니까?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여러분 즐거울 때, 찬송을 부르라는 이 말씀이 가지는 포인트가 뭔지 아시겠지요? 그 기쁨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해드리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 마음속에 고난이 찾아올 때, 기도를 안 하는지 아세요? 워낙 자기 삶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는 훈련이 안되어 있기 때문에 고난이 오면 발만 동동 구르지 야이로처럼 주님께 찾아갈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이걸 야이로에게 배워야 합니다.
두 번째, 어려움을 당할 때 주님 앞에 나아가되, 간절함과 겸손함을 가지고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22-23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그 당시 회당장이라는 직책은 상당히 존경받는 위치였음에도 무명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 자체는 엄청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야이로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동 속에는 당연히 겸손히 포함되어 있고, 무릎을 꿇는 행동 속에는 그만큼 간절하고 절박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거 아닙니까? 이런 야이로의 태도가 주님 앞에 나올 때 중요한 게.. 시편 145:19입니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며' 또 '그들의' 뭘 듣습니까?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간절한 바람이 가진 능력'이라 잡았는데요. 여러분 왜 '간절한 바람'이 능력인지 아시겠지요? 우리 주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신다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제가 주목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혈루병을 앓던 여인을 고쳐주시면서 하던 말씀이 34절에 나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여러분, 이 말씀 옳은 건가요? 아니 진짜 그 여인의 믿음 때문에 병이 고쳐진 건가요? 아니잖아요. 여인이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인의 믿음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뭘 의미하는 겁니까? 그만큼 예수님은 믿음을 중요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정신이 본문 36절에도 나타나는데요, 35절부터 보실게요.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지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던 사건은,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시러 가시던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거든요? 지금 딸이 죽어가고 있어 긴급하게 가야 하는 상황인데 예수님은 "누가 내 옷을 만졌냐?"면서 사람을 찾고, 그런 모습 보면서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속이 타들어 갔을까요? 그러다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긴급하게 가지 않으시고 미적거리셨을까요? 제가 생각해보니까요 바로 이 한마디를 선포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렇게 믿음을 강조하시는데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볼 말씀이 있습니다. 40절인데, 38절부터 보십시오.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랬더니, 40절 '40 그들이 비웃더라..'
지금 주님은 믿음을 엄청 강조하시는데 그 선포된 주님의 말씀을 비웃어 버리는 거예요. 왜 비웃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한계를 가진 피조물의 좁은 틀로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조명하다 보니까 말이 안 되니까.. 비웃는 행동으로 도출된 거예요. 성경을 차라리 읽지 마세요. 성경을 읽지 않는 탁월한 여러분들의 식견을 놀라워합니다. 성경을 읽으시려거든 예수님의 수준에 맞추어서 읽으세요. 이 한계를 가진 인간의 좁은 시야, 머리로 놀라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비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슨 홍해가 갈라졌다는 거야?! 그런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홍해를 못 가르니까 인간인 거고, 홍해를 가르시니까 그분은 하나님이신 거예요. 그 하나님의 위치에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하는데 자기 수준에 놓고 말씀을 읽으니 "이해되면 믿겠다." 주님 오시는 게 빠르지 그 사람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제가 지난주에 칼럼을 읽다가 너무나 와닿는 한 문장이 있어서 옮겨 적고 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들어보세요. '나이 들수록 고정된 신경 회로망을 사용하여 사고(생각) 하기 때문에 한 가지 생각과 의견에 집착하게 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일까요? 보통 "나이가 들면 완고해지기 쉽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완고하다', '융통성이 없어 올곧고 고집이 세다.' 우리 애들이 저를 그렇게 보는 것 같아요. '올곧은 쪽'에 포인트가 있는 게 아니고 '융통성이 없이 고집이 세다.' 여러분 나이가 든 사람만 완고할까요? 죄성을 가진 인간 자체가 완고합니다. 젊다고 완고하지 않을까요? 애를 길러보니까 세 살 때가 제일 완고한 것 같은데요? 얼마나 융통성이 고집이 센지~ 신발을 엄마가 신겨주었는데.. 엄마가 신발을 신겨주었던 자리로 가서 신발을 벗고 자시가 다시 신더라고요. 나이 들어서 완고한 게 아니고 날 때부터 완고한데 나이가 들면 더 완고해진다니 더 심각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그 칼럼을 카피해놓고 읽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정된 신경 회로망을 사용하여 한 가지로만 사고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 가지 의견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 것은 연세 드신 어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이가 드는 것이 너무 두렵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완고한데 나이가 들면 더 완고해진다고? 그럼 너무 쓸쓸해질 것 같은데.. 은혜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무궁무진함과 넓으심을 구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에 전체 교역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목회자들이 완고해질 수 있다. 이러한 고집불통이 될 위험이 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시는데, 왜 그들이 비웃었을까요? 바로 이런 것 때문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의 불신앙이 시작이 되는데 무서운 건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39절에서 제가 뭘 발견했냐?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다음 40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주님의 말씀을 자기 수준에 놓고 비웃었던 그 사람들의 가장 치명적인 비극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달리다굼' 그 가슴 떨리는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목도할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불신앙의 악순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서도 영적으로 보면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믿음이 있는 분은, 달리다굼의 기적의 현장을 목도하는 은혜를 경험해서 점점 믿음이 좋아지고, 늘~ 믿음이 없는 불신앙의 사람은 이런 놀라운 은혜의 자리를 잃어버려서 점점 자기 세계에 빠져들어가는 거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구해야 합니다. 한계를 가진 인간의 좁은 세계를 갇히지 않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내가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한 가지 회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풍덩 빠져들기 원합니다. 그렇게 생각이 자꾸 풍성해지면 연세가 들어도 완고해질 수가 없습니다. 젊은 때는 그냥 고집불통이고 완고했던 분이라도 계속 말씀으로, 은혜에 거하면 연세가 드실수록 얼마나 융통성이 있고, 부드러워 자녀들에게 항상 안정적으로.. 생각만 해도 너무 부럽고 귀한 일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정말 말씀을 읽을 때 내 생각의 기준을 내려놓고, 내 좁은 시야로 읽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넓은 시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점검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왜 이런, 점검을 늘 해야 하냐? 히브리서 10:38 때문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태도를 기뻐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의 딸이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믿음이 여기에 있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회당장 야이로는 자기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찾는 믿음의 행동을 보여주었고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이런 믿음의 행동을 보여준 야이로에게 두 가지 선물이랄까요? 두 가지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간절한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두 가지 반응.
첫 번째가 무엇이냐? 그와 함께 동행해주십니다. 그와 함께 동행해주신 마가복음 5:23,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그랬더니 24절 a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여러분 저는요? 이 회당장 야이로의 절박함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모습이 너무너무 좋아요. 제가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로써 은혜를 구하고, 다짐하는 것이 있는데요. "하나님~ 제가 2만 명이 넘는 성도라서 일일이 먼저 찾아갈 순 없다고 해도 주님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절대 외면하지 않기 원합니다. 오늘 만날 순 없어도, 일주일 뒤, 일주일 뒤에도 어려우면 두 주 뒤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제가 어떤 경우라도, 어떤 기도 부탁과 어떤 문제로 찾아올 때 시간 없다고 거절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게 정말 제 기도제목이 소원입니다. 왜 그래야만 합니까? 주인 되시는 주님이 그러고 계시잖아요.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그리고요. 24절에 나오는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구약의 인물 중 '에녹'이 생각이 났는데요. 여러분 다 아시지만 성경에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가신 분이 딱!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엘리야고 또 한 사람은 에녹 아닙니까? 엘리야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가신 것으로 승복이 돼요. 그럴 정도로 일했잖아요? 어마어마한 선지자잖아요? 그런데 에녹은 좀 혼란스러워요. 에녹은요? 진짜 아무것도 안 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찾아보자면 창세기 5:21-23인데 한번 보세요. 어이가 없습니다.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얼마나 기록할 게 없었으면? 애 낳은 거를 쓰고 또 쓰고.. 이걸 보면서 제가 '이 분이 정말 한 게 없으시구나..' 그리고 24절에 보니까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엘리야는 어마어마한 놀라운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쓰임 받았다면 그에 비해 에녹은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동행'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히브리서 11:5를 보면, 그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왜 에녹의 동행을 기뻐하셨는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대형 교회 목사가 되고 밤낮으로 일을 하며, 엘리야처럼 불이 내리는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것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니고요.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데요. 하나님과의 동행은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저는 확신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은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기뻐하시는 거예요. 이제 백신 다 맞고 코로나가 끝나고 모든 성도들이 모여서 축제가 벌어질 날을 구상을 하고 있으면 너무 행복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어떤 행위로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이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리고 에녹을 통해서 정말 힘을 얻어서 애 하나씩 더 낳읍시다. 하나밖에 안 낳은 분은 둘, 둘 밖에 없는 집은 셋. 우리 집처럼 셋은 구워삶으면 돼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찬송가 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정말 내 삶에 지침이 되기 원하는 찬양은 2절입니다.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네' 아까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늪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다는 가사를 인용해 드렸지만.. 이거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여러분 주님과 같이 동행하는 거기가 길입니다. 그 길로 쭉~ 가면 되는 거예요. 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네.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하고 19년 동안 저같이 어리바리한 사람이 담임목사가 되었지만 분당우리교회 한 번도 혼란에 빠진 적이 없잖아요? 길 아닌 데로 갔다가 막 어려움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요? 제 실력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그분과 걸어가는 과정이 전부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 잃어버릴 염려 없습니다. (2절 함께 부르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그 상처 많은 많아, 문제로 많아 아파하는 우리들과 주님이 동행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는, 간절한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이냐? 주님은 희망을 선포하고, 새로운 출발을 허락해 주신다는 겁니다. 38-39절을 보시겠습니다.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여러분 이 말씀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주님의 표현 아닙니까? 희망을 선포하신 거예요. 41절,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여러분 41절에서 '달리다굼'이라는 선포로만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그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저는 41절의 '달리다굼'의 선포가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동일한 헬라어 단어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27절에 나오는데, 25절부터 한번 보시겠습니다.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할 때, '손을 대다'는 것은 '하토마이'라는 단어로 '닿았다. 접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단어에는 부싯돌이 부딪혀 불이 켜진다는 뜻도 가지고 있는 단어예요. 그래서 저는 '하토마이' 여러분 12년 동안 병을 고칠 수 없어서 절망하던 그 여인, 그래서 혈루병으로 오랫동안 고통하며 상한 갈대처럼 꺾인 여자예요. 마치 이 여인은 꺼져버린 등불처럼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여자인데..
그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하토마이' 부싯돌이 부딪쳐 불이 붙는 것처럼.. 꺼져가던 이 여인의 삶에 새로운 삶이, 새로운 희망이 시작된 계기가 '하토마이' 그 옷자락에 손을 대는 사건으로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이 학습된 무기력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하토마이'..
제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한신대 김재성 교수님의 글을 읽고 얼마나 제가 많이 회복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교수님의 글 제목이 '비접촉 시대에 예수님과 접촉하기'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안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이야 말로 주님과의 접촉할 기회로 받으시기 바라요. 사람과의 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고 홀로 있는 시간이 많을 때 주님과의 '하토마이' 부싯돌이 부딪쳐 불이 켜지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주님과의 접촉이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학습된 무기력. 이제는 더 이상 내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빠져 있는 현실을 탈출하시는 도구가 '하토마이'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니..
제가 언젠가 서강대 철학과 교수님인데, 최진서 교수님의 글을 우연히 읽었습니다. 이분이 교수 정년을 무려 7년이나 남겨두시고 사임했는데,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굉장히 독특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만의 고유한 생선 비린내가 사라져 사임한다." 최근에 제가 이분이 쓴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 비슷한 문장이 나오더라고요. 교수님이 자기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시장 좌판에 진열된 생선이 아니라, 요동치는 물고기로 살고 싶다.' 이 한마디에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명문대 교수로 살아가는 일이 무기력한 교수 사역하는 것을 좀 떨치고 싶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시장 좌판에 진열된 생선이 아니라, 요동치는 물고기로 살고 싶다.' 아무리 큰 파도와 큰 물고기들이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물 속이라 할지라도 나는 시장 좌판이 아니라, 물속을 휘젓고 다니는 물고기로 살고 싶다. 제가 정신이 왜 번쩍 들었는지 아십니까? 분당우리교회를 제가 개척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난 19년 동안 누가 저를 쫓아내겠냐고요? 그래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가 너무너무 좋아요. 그것이 바로 시장 좌판에 진열된 생선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자기만의 비린내를 잃어버린 거예요.
저는 오늘 여러분 모두가 다 그저 환경이 좋다고, 시장 좌판에 누워있는 생선이 아니라, 물속을 휘젓고 다니는 물고기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과의 '하토마이' 야성을 회복해야 해요. 도전해야 해요. 파도를 무서워하지 마셔야 해요.
오늘의 결론을 저는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요일 5:4, '5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엄청난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세상을 이길 수 있겠느냐? 오늘 여러분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너무너무 환경이 좋은, 그래서 아무런 위험도 없는 그곳에 물고기로 누워있지만.. 물고기가 누워 있는 그곳은 시장 좌판에 진열된 것이라면 그건 죽은 생선입니다. 아픔이 많으세요? 도전이 많습니까? 악플 많이 달립니까? 가는 데마다 안티들이 득실거립니까? 살아있어서 그런 거예요.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오늘 저는 본문 말씀 전체를 아우르면서 (반주)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 능치 못하심이 없네' 선포하며 부르기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꿈과 모든 소망도.. 그 주님 앞에 주님의 신실한 옷자락에 하토마이' 주님을 터치함으로 말미암아 부싯돌이 부딪쳐 불이 켜지듯이 내 인생이 다시 활력을 되찾기 원합니다. 하나님 그곳이 아무리 편하고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 시장 좌판에 진열된 생선으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위험하지만.. 파도가 넘실거리지만 큰~ 물고기들이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곳이지만 그러나 주님 저는 주님 은혜로 물속을 휘젓고 다니는 물고기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과의 '하토마이' 이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이 가사를 기억하면서 찬양을 부르는 동안 여러분들의 내면에 학습된 무기력이 떠나가는 신비로움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절박한 믿음을 가지고 절실한 마음으로 이 찬양 부르기 원합니다.
'찬양 -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니'
이 시간 다 같이 뜨겁게 기도하기 원하는데, 이렇게 기도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무리 시장 좌판이 매력적이고 멋져 보인다 할지라도 거기에 진열된 생선으로 살지 않기 원합니다. 아무리 도전이 많고 풍랑이 일렁거린다 할지라도 물속을 휘젓고 다니는 물고기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 그 일을 하기에 너무나 많이 지쳐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시간 '하토마이' 부싯돌이 부딪쳐 불이 켜지듯이.. 심한 절망에 놓여 있던 여인이 단번에 회복되는 은혜를 가지고 달려갔듯이..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아무도 가르쳐 주는 이 없어 혼미한 우리 젊은이들이..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이 세상 속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소리 높여 기도하기 원합니다.
축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를 통해 철저하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살아가다 위기가 올 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리면 그때가 주님을 찾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너무나 겸손히, 그것도 너무나 절박하게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사단이 얼마나 무섭게 공격을 하는지.. 의욕을 잃어버리고, 나는 이것들을 헤쳐나갈 힘이 없노라고, 그렇게 계속 유혹하는 속삭임이 있다면.. 진열된 좌판의 물고기로 살아가라는 것.. 하나님 아무리 파도가 일렁이고 위험 것들이 많다 할지라도 좌판 진열대에 누워있는 물고기로 살지 않기로 원합니다. 도전하며 살기 원합니다. 헤쳐나가며 살기 원합니다. 꺼져가는 등불 같은 내 인생을 주님 어떤 은혜로 구원해주시고 '하토마이'의 은혜를 통하여 부싯돌이 부딪혀 불이 켜지는 은혜를 설교자의 이천수 목사에게 허락해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격하여 선포되는 줄 믿사오니, 오늘 말씀 가운데 이 놀라운 주님의 능력이 모든 예배하는 성도들의 삶에 다 스며들도록 은혜 내려주시어서.. 주님 이 한 주간 회복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그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좌판대를 부러워하는 인생이 아니라, 물속을 헤집고 다니는 놀라운 상상력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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