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이사야 40:1-11 I 마른 풀 같고 시든 꽃 같은 우리를 I 분당우리교회 I 이찬수 목사
마른풀 같고 시든 꽃 같은 우리를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방탄소년단이라는 그룹이 세계적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얼마나 놀랄 일들이 많은지.. UN 총회에서 연설을 하고 , 타임스의 표지를 장식하고, 미국과 유럽을 돌면서 투어 공연을 하고 있는데.. 지난주 월요일에 뉴스를 보니까 놀랍다는 말로도 설명이 안될 정도더라고요. 뉴욕의 장소 대여는 미국의 가수도 빌려주지 않을 정도로 톱 가수만 설 수 있는 장소에서 4만 명이 모였는데.. 정말 제가 놀랐던 것이 미국의 젊은 사람들이 앞에서 보려고 일주일부터 주차장에 텐트를 치고 지내는 모습을 비추어주는 데 거대한 텐트촌이 형성되었더라고요. 어떻게 우리나라 가수에 열광을 하는가? 그 뉴스를 보고 흥미가 생겨서 검색을 해봤습니다. 방탄소년단의 열기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가? 궁금했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기는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들으며 엄청난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뉴스에서도 미국의 10대 청소년이 인터뷰를 하는데 마찬가지더라고요. 미국의 젊은 엄마가 방탄소년단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가 회자가 되고 있는데요. 그 내용을 다룬 기사의 제목이 이렇습니다.
'감사합니다. 방탄소년단 음악이 선물한 위로.. 자폐증 아들을 눈 엄마의 고백' 그 내용을 보니까, 자폐증 아들이 방탄소년단의 노래로 말미암아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을 받고, 많은 부분에서 좋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고마워서 감사의 편지를 보낸 것이 기사로 난 것을 봤습니다. 세상에 미국 사람들이 떼창을 하는 일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어떤 위로가 가사에 담겨 있길래 이렇게까지 열광을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다가 불쑥 든 생각이 '나도 저 위로 좀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유튜브에 가서 '위로를 받고 싶을 때 들으면 좋은 곳'이라고 분류되어 있어서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내가 들어와서 "뭐 하세요?"라고 해서 "나 위로받고 싶어서 듣는다"라고 하니까 자리를 비켜주더라고요. 그렇게 나도 위로를 받고 싶어서 들었는데 위로는커녕 오히려 마음의 상처가 커졌습니다. 우선 위로받고 싶은데 가사가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와요. 분명히 한국말로 부르는데 뭔 뜻인지 알아야 위로를 받지요. 위로받으려 했다가 '야, 나도 이제 완전히 구세대구나!' 마음이 힘들고 우울하고 부작용이 커서 그 이상 방탄소년단 노래 안 듣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인간의 위로라는 것은 세대의 간격이 있고, 문화의 간격이 있고, 민족과 국가마다 그 위로가 다 다르다는 한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0대, 20대도 위로가 필요하지만 진짜 위로가 필요한 이들은 기성세대입니다.
예전에 제가 어디선가 글을 보고 인용하려고 옮겨놨는데 못찾아서 제대로 기억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글을 쓰신 분의 친구 중에 어떤 분이 있냐? 자동차를 너무 좋아해서 틈만 나면 자동차를 돌보고, 차를 몰고 어디론가 가는 그런 분이라고 해요. 예전에 아는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 하시더라고요. 그분도 예배도 마치고 나서 마음이 허해지면 과속으로 달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친구분이 그런가 봐요. 계속 차 몰고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하루는 물었데요. "자네는 차를 왜 이렇게 좋아할 수 있어?" 그 대답이 저를 정말 슬프게 했습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생애에서 왼쪽으로 가고 싶을 때,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을 때 오른쪽으로 가듯이.. 내가 조정하는 대로 움직여지는 것은 자동차 밖에 없어. 내가 조정하는 대로 움직여지는 것은 자동차 밖에 없어서 그렇게 자동차를 좋아한다." 참 슬픈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고보면, 세대를 불문하고 우리는 모두 위로가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잇는 것 같습니다. 오늘 새 생명축제라고 교회 다니지 않으시는 이웃들을 여기에 초청하고, 마당에 여러 가지를 준비하면서 마음의 소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딱 하나예요. 위로를 받기 원하는,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이 사람에게 위로를 받으려다가 더 허무해지고 더 공허해지고 이런 아픔을 겪는 것이 이 땅이기 때문에 제대로 위로받기를 원하신다면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오늘 좀 소개해드리려고 그렇게 여러분을 초청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 보니 지난주에 이런 성경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마음의 소원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오늘 여기로 초청받아 오시는 많은 분들이 이론이 아니고, 논리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는데 이유를 불문하고 하나님이 진짜 내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이구나! 뭔지는 모르지만 위로가 되네? 내 안에 일하시는 성령님께서 오늘 초청받아 오신 모든 분들과 성도님들에게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을 겅험하도록 도와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인데요. 오늘의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헨델의 메시아 아시죠? 헨델의 메시아가 메시아 되신 일대기를 놀라운 음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까? 기악으로 반주가 나오고 사람의 목소리로 가장 먼저 나오는 멘트가, 가사가 바로 오늘의 1절입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뭘 의미할까요? 지금 메시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소개할 것도 많고, 의미를 부여하여 노래할 것도 많은데 그 모든 의미부여의 첫 관문이 위로자 되시는 주님이라는 거예요. 그러고 보면 우리 하나님의 많은 속성 중에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이세요. 고린도후서 1:3-4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계속 제가 강조하고 또 강조하지만 저는 여기 초청되어 오신 이웃분들과 성도님들이 능히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그런 예배가 되기를 경험합니다. 사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마태복음 11:28에 잘 나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금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네 인생은 지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상태에요.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익숙해서 '어! 난 안 지쳤는데?'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누구나 예외 없습니다. 설교하는 제 자신의 상태가 지쳐 있는 상태예요.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찾아보니까, weary라는 단어를 쓰고 있더라고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식하시느냐? 무거운 짐으로 허덕이다가 지쳐 있는 상태, 피곤한 상태예요. 이런 자들을 주님이 초청하시는 거예요. 왜? 쉬게 해 주시려고..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는데 그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가슴이 조금 설레고 그냥 울컥하는 차원의 위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위로는 이런 노래 한 곡 듣고 마음 푸는 차원의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편 23:1-3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언발에 오줌 누이는 위로가 아닙니다. 잠깐 따뜻해졌다가 원래로 돌아가거나, 더 고통이 심한 차원의 위로가 아니고요. 하나님의 위로는 소생시키시는 위로예요. 회복시키시는 위로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는 엉뚱한 길로 헤매는 우리가 제대로 된 바른 길을 찾도록 하시는 차원의 위로에요. 그렇기 때문에 자꾸 감동만 받으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정말 위로를 받으셨다면 자꾸 곁길로 가는 내 인생이 교정함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낙심해있는 상태인데, 소생케 되는 은혜를 맛보기 원합니다. 오늘 이런 위로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렇게 피곤하고 지쳐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데 어떤 사람은 그 위로를 경험하는데, 어떤 사람은 경험하지 못하느냐? 이 문제를 제가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위로를 원하십니까? 두 가지 전제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첫째 나 스스로가 유한한 인생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흐름이 중요한데 어디로 흘러가는지 유심히 보십시오. 1절에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렇게 선포했는데 그 말씀이 6절에 가서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육체는 풀과 같고 꽃과 같다고 할 때 풀과 꽃의 어떠한 부분을 강조하는 표현인지 아십니까?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6절 끝 부분부터 8절. '6..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 뭐예요? 우리 육체가 풀 같고 꽃 같데요. 그만큼 육체는 시들기 쉽고 그만큼 초라해지기 쉽고, 그만큼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차원의 풀이요 꽃이에요.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싶습니까? 내가 이런 마르기 쉬운 풀 같고, 꽃 같은 존재를 인식하는 것. 이게 첫 번째 존재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는 이런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야고보서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 개니라' 이걸 인식하지 못하면 위로 없다. 아침에 해뜨기 전에 평택쯤 가다 보면 종종 안개가 자욱해질 때가 있어요. 진짜 허무합니다. 10-20분 해 뜨면 다 없어져요. 그게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 개니라. 제가 그런 안개를 볼 때마다 마음으로 자각하는 것이 이 말씀이에요. 교회 좀 커졌다고 사람 좀 많이 모인다고 제 안에 얼마나 많은 죄성으로 인한 유치한 교만이 꿈틀거리겠습니까? 조금 화려한 안개나, 조금 부실한 안개나 다 같이 없어질 건데.. 시편 39: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뭐 좀 갖춘 거 있다고 허세 부릴 필요 없어요. 한 뼘 주제에 뭐.. 또 사업이 잘 안된다고 해서 너무 기죽을 필요도 없고 다 거기서 거기, 한 뼘 안이라는 거예요. 대상 29:5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그래서 시들어버리기 쉬운 풀과 같고 시둘어버리고 쉬운 꽃과 같은 존재임을 선포하라는 것이에요. 그걸 자꾸 되뇌는 거예요.
여러분, 왜 이렇게 성경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집요하게 강조하는지 아시겠죠? 하나님이 우리의 약점을 후벼 파서 우리를 열등감의 구덩이에 집어넣으시려는 것이 아니에요. 내 연약함을 내 힘으로.. 프로야구가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야구가 9회까지인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무쇠팔이라 해도 1회부터 9회까지 다 던지는 투수들은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가장 먼저 던진 투수가 5-6회까지 잘 던져도 자기가 승리를 위해서 마무리 짓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승리를 위해서는 자기 뒤에 이어서 나오는 구원투수들이 잘 던져야 승리투수가 되는 거거든요. 그게 인간이라는 걸 야구 볼 때마다 느껴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한계를 연약한 인생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련한 자로 인정하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시편 103:13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논리를 한번 보세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불쌍히 여기시느냐? 하나님이 저 인간이 한낱 티끌임을 아시기 때문에 불쌍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불쌍하고 그 사실을 내가 인정할 때에야만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누릴 수 있다는 거예요. 교만이 왜 위험합니까? 여러분 저는요? 대인 관계나, 대신 관계(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난 긍휼이라고 생각해요. 가정이 회복되기를 원하세요? 부부 사이의 긍휼을 구하세요. 신혼 때 왜 그렇게 싸우는지 아세요? 상대방에게 긍휼을 주지 못해서 그래요. 서로에 대한 기대감, 지키지도 못할 기대감만 잔뜩 심어놓고선 결혼하고 보니까 공주는커녕 완전히 무수리 취급을 하고 있으니까 열 받아서 싸우는 거 아니냐고요? 우리가 가정도 초반에 좀 싸웠지만 진짜 우리 부부는 싸우지 않아요. 갈수록 저희 부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뭐가 달라졌는지 아세요? 이제 그렇게 호리호리하고 이뻤던 집사람이 머리는 하얘지고, 중년의 피할 수 없는 복부비만 이런 거 저는 하나님이 증인인데 그런 거 하나도 보기가 싫지 않아요. 진짜 제가 마음이 쓰이지 않아요. 하나만 마음이 쓰입니다. '요즘 건강이 안 좋은데?' 부부가 상대방이 평화로워지기를 바라는 것보다 좀 더 빠른 것은 상대방이 불쌍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으로 그에 대하여 긍휼 해지면, 그 약점이 안쓰러운 거예요. 가정 회복을 위해서 아내에 대하여, 남편에 대하여, 아버지에 대하여, 내 자녀들에 대하여 품고 싶으시다면 긍휼함의 원조되시는 하나님의 긍휼히 공급이 되어야 내 아내와 남편과 이웃에게 긍휼의 성품을 보여주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반복합니다. 인생에게 가장 나쁜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긍휼을 스스로 차단시키는 짓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긴 한데 교회를 처음에 개척할 때 막내가 세살인가 그랬고요. 저는 애가 늦어서 큰애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그런데 2-3년이 지나니까 이해가 안될 정도로 교회가 불같이 일어나더라고요. 제가 그 때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유치한데 세 아이를 앉혀 놓고 종종 연설을 했습니다. "지금 분당우리교회 사람들이 많이 모여오는데 아빠가 설교도 잘하고, 목회도 잘 해서 그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시는 은혜야. 은혜" 네살, 다섯살 먹은 애들한테 이런 이야기 하는게 이해가 되세요? 사실은 얘들들으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고 그냥 앉혀 놓고 이 이야기를 함으로 날 자각시킨 거예요. 내 귀에도 들리니까. 니가 잘나고, 니가 똑똑하고, 니가 설교 잘해서 부흥했다고 생각했다면 그 시로 하나님의 긍휼이 끊어지면 저같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수치당하고 쫓겨나는 것 밖에 더 있겠어요? 그래서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여러 번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요.
상대방에게 전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사실을 독백 하고 되뇜으로 여전히 누가 뭐라고 해도 어마어마한 큰 교회 목사라고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여전히 저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예요. 여전히 저는 시들어 버리기 쉬운 풀이고 지기 쉬운 꽃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아버지가 자녀를 불쌍히 여김 같이 저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수치의 자리에 빠지는 일은 내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 하심으로 막아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히브리서 4:16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고요.
두 번째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이 그렇게 연약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자각을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흐름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죠? 1절에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렇게 시작한 말씀이 6절에서 '너희 모든 육체는 풀이요 너희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 너희들의 한계를 기억하라는 것으로 연결이 되고, 그 말씀이 또 어디로 연결이 되는지 아십니까? 9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흐름을 아시겠어요? 하나님의 위로를 누리기 위해서는 '나는 풀과 같고 꽃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내 연약함과 한계의 자리에서 여기에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구절을 보면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는데요?
여러분이 젊을 때 아무것도 아닌데 대단히 허세를 부리고, 교만이 행했다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을 안단 말이에요. '사실은 나가 보잘 것 없는 인생인걸, 안개와 같은 인생인걸 내가 쓸데없이 교만했구나' 그 사실을 깨달으면 그 순간에 여러분들은 두 갈래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한 길은 내 버려 두면 가는 길 우울해요, 초라해요, 한심해요. 나이가 들면서 왜 이렇게 불면증이 많을까요? 자기를 자각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뭐 대단한 줄 알았는데.. 잘 난 맛에 살았는데.. 어느 날 이 허상이 다 벗겨지고 나니까 너무 초라한거에요. 우울한거에요. 여러분 10대보 50대 60대가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여? 내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 때, 내 버려두면 자동적으로 열리는 길이 하나 있는가 하면..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좋은 기회가 온 거예요. 이 두 갈래 중에 어느 길로 가고 계시나요?
천재 수학자라고도 알려진 파스칼이 팡세라는 책을 통해 주옥같은 명언을 남긴 사람 아닙니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런데 여러분 팡세를 보면 '사람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자신의 비참함을 모르면 교만해진다. 그러나 자신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면 절망하게 된다.' 제가 이 글을 보면서 목사인 제가 절망하면 이건 범죄예요. 여기 중직자인 여러분이 절망하면 그건 범죄에요. 왜? 뭘 전제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아닙니까? 새 내 머리 위에 날아다니는 것은 저도 어떻게 못합니다. 정직하게 고백하면 절망이 호흡처럼 다가와요. 없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물밀듯이 밀려와요.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두려움도 같이 커집니다.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여러분 새가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은 어떻게 못하지만 그 새가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틀고 앉는 것 내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저녁에 두렵고 저녁에 울음이 찾아와도 아침에 주시는 새로운 은혜로 날마다 회복이 되고, 치유가 되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아침을 맞이하는 이찬수 목사인 거 믿어주시기 바라니다. 왜 어제 두려웠던 것이 아침에 없어질까요? '자신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면 절망하게 되는데, 나 자신을 알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알면 절망이 없다' 소리 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저는 1절에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렇게 시작한 오늘의 말씀의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11절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노래를 들으면 울적한 기분이 사라지는 차원의 위로가 아니라, 관계 맺음이에요.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날마다 엉뚱한 길로 가고, 대형교회, 소형교회, 장로 목사 권사 구분 있습니까? 내 버려두면 엉뚱한 길로 가고, 내 버려두면 부끄러운 길로 가버리고, 내 버려두면 엉뚱한 일 행하는 우리를 양과 같이 여기시고 목자 되어주시고, 내가 똥오줌 못 가리는 어린아이구나! 가 네 아버지 되어 줄게.. 이게 우리 하나님 아닙니까? 관계 맺음으로 다가오는 그분의 위로하심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저는 11절 말씀도 너무 좋고요. 요한계시록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요즘에 저는 십계명을 혼자 공부하고 있는데 얼마나 내가 요새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새삼 깨닫는 것도, 알게 되는 것도 많은데요.. 전에 말씀드렸지요? 출애굽기 20장이 십계명을 기록하고 있는데 제 1계명이 3절에 나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그 바로 앞에 십계명의 전제 1-2절입니다.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일계명 받아 적어봐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란 말이야. 뭐가 느껴지세요? 관계로 다가가시는 거예요. 그 제가 1 계명을 공부하다가 너무나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마라' 이것이 너무 감동인 거예요. 우리와 관계 맺어 주시돼 그 정도로 의미를 부여해주신다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심지어 출애굽기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 임이니라' 이게 눈물 나는 은혜예요.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시는 분..
제가 이번 여름에 '장혜리'라는 가수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이분은 80년대 말에 여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가수였는데, 갑자기 사라진 케이스라 하더라고요. 이분이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주옥같은 히트곡을 만든 분인데 간증을 우연히 듣고 관심을 갖게 된 거예요. 세상에 지난주에 모든 것을 다 가졌음에도 꿈 하나 때문에 번뇌하였던 느부갓네살과 같이 인기를 누리던 여 가수가 우울증이 온 거예요. 우울증이 점점 심해지니까, 자살 충동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이게 심해지니까 어느 날 결단을 하기로 했데요. 간증의 요지가 그렇습니다. 높은 고층 아파트에 사는데 혼자서 창문을 열고 발 하나 디디면 끝 아닙니까? 자기는 우울증으로 통제가 안되어 뛰어내리려 할 때 (자기표현에 의하면 그래요) "하나님이 개입을 하시더래요. 하나님이 그것을 막아주시고 간섭해주셔서 못 죽었데요." 이 분의 말이 거짓이 아닌 게요. 삶이 증명을 해요. 그러고 나서 이분이 뭐하는지 아세요? 교도소를 찾아가고, 양로원을 찾아다니는 복음성가 가수가 되었다. 세상에 그렇게 수 천명 앞에서 노래 부르면 어마어마한 것을 부르던 엄청난 가수가, 양로원에 몇 분이 계실까요? 그런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간증을 하시는데.. 거짓말 아닙니다. 평화. 인간적인 박수를 받을 때는 볼 수 없었던 그 얼굴에 말로 다할 수 없는 평안이 꽉 차 있어서 제가 이분 꼭 한번 만나보았으면 좋겠어요.
그날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너와 관계 맺고 싶다. 내가 너의 목자가 되기 원한다. 오늘 이 예배 가운데 '장혜리'라는 여 가수분이 경험했던 그 하나님을 여러분도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결론을 이 찬양으로 맺기 원합니다. 이 찬양의 가사를 조용히 들어보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라요.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기도 멘트
두 가지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논리, 이론 그렇게 하는 신앙생활 아니에요. 이건 사건이에요. 인격과 인격의 만남입니다. 하나님 그동안 안개 같은 나 자신인 거 모르고 뭐 좀 잘 되는 거 하나 그거 붙잡고는 거품 속에 빠져서 엄청난 존재처럼 인식했어도 우리 인생은 시들어가는 풀과 같은 존재고 꺾여가는 꽃과 존재와 같다는 것을 인식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런 우리를 아비가 자녀를 인식함과 같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은혜, 긍휼함이 내게 미쳐지기 원합니다.
또 한 가지 기도가 있다면 여기 초청되어 오신 분들, 그 귀한 영혼 성령님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길이 보이는 사건을 경험케 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린 십 대 청소년에서부터 70-80대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움직여지는 것은 자동차 밖에 없어서 운전하면서 위로를 받는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으며 사실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기에 위로가 필요한데 그저 잠깐 가슴을 뜨겁게 하는 노래 한마디로 그런 위로 차원이 아니라 소생시켜 주시는 위로, 선한 길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잡아주시는 주님의 위로, 십자가를 통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하여 그 목숨을 내어 주기를 원하노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귀하고 복된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초청받아 오신 모든 분들에게 그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 알 수 없고, 느낀다 할지라도 가슴에 그것이 스며들도록 성령님 일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다함없는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위로 교통 충만하심의 역사가 오늘 주신 말씀 마음에 담고 진정한 위로자 되시는 주님 바라보며
그분 앞에 겸손히 안개 같은 우리의 인생을 시인하며 말라 가는 풀과 같은 존재, 시들어가는 꽃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렇게 기뻐 예배하기를 원하는 모든 주의 자녀들 머리 위에 지금까지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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