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story/이찬수목사

설교문 | 희망을 이기는 절망은 없다 | 이찬수 목사 | 누가복음 24장 13-17절 I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by №1★↑♥ 2023. 4. 15.

2023-04-09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I 희망을 이기는 절망은 없다 | 이찬수 목사 | 누가복음 24장 13-17절 I 설교문 | 부활절 설교

 

희망을 이기는 절망은 없다 | 누가복음 24장 13-17절

-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

최근에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기사를 하나 읽었는데요? 아마 많은 분들이 읽고 저하고 비슷한 감동을 느꼈을 거라 생각하는데..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청년이 대학원 시험에 떨어진 겁니다. 너무나 꿈꾸던 시험에 낙방하고 나니까, 마음이 너무 힘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좌절한 이 청년이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자꾸 나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사용하시던 핸드폰 번호로 문자를 보낸 겁니다. "아빠, 저 대학원 입시에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예상한 결과이긴 해요.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내년에 다시 준비해보려고 합니다. 제 성격 아시잖아요? 꼭 합격할 겁니다. 아빠 너무 보고 싶어요. 꿈에라도 나와 주세요. 아빠가 보고 싶네요." 이런 문자 보내면서 아빠가 답을 보낼 거라고 생각하며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냥 그리움에 그렇게 보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답장이 온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아들아, 어떻게 항상 성공만 할 수 있겠니? 앞으로 나아가렴. 난 네 아들이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 아빠도 네가 보고 싶단다." 다 짐작하겠지만, 답장은 지금 그 핸드폰을 쓰고 있는 주인이 보낸 거예요. 이 사람이 보니까, 어떤 상황인지 알 거 아닙니까? 젊은 청년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서 아빠의 이름으로 답장을 보냈고요. 그 답을 받은 아들이 펑펑 울면서 다시 감사하다는 인사를 보내는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저는 이 가슴 따뜻한 내용을 읽으면서 우리 교회 성도님과 관련해서 제가 경험했던 마음이 따뜻했던 일이 떠올려지는 겁니다. 저희 교회에 함께 신앙생활하던 남자 성도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너무나 좋은 분이셨고, 아이들에게 너무나 자상하고 좋은 아버지셨어요. 그러다 보니까, 모든 가족이 너무나 슬픔에 빠져있었겠지만, 그중에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고등학교 딸아이가 그 충격이 너무 큰 거예요. 그래서 딸아이가 방황의 긴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걸 지켜보던 학교 담임선생님이 참 귀한 분이에요. 학생들도 많고 그럴 텐데.. 유난히 힘들어하는 그 아이를 지켜보시고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는 즈음에 선생님이 손 편지를 썼는데요. 그 학생의 돌아가신 아버지께 보고하는 형식의 편지를 써서 힘들어하는 제자에게 준 겁니다. 제가 읽고 힘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께 보고하는 형식으로 편지를 쓰셨는데, 너무나 감동이 되어서 카피본이 어머니가 저에게 보내주었는데요 제가 이거 보관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 딸이 얼마나 모범적인 학생인지, 얼마나 선생님께 칭찬을 많이 받는 학생인 늘어놓고, 그다음에 한번 들어보세요. "앞서 드린 내용은, 모두 진실된 마음으로 드린 사실이지만.. 빠트린 내용도 있네요. 진희(가명)는 아버지께서 떠나가신 뒤 무척 힘들어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눈물을 흘렸고, 토닥이지 못한 아픔은 숨조차도 쉴 수 없게 했었지요. 자상하고 인자하셨던 아빠 셨기에 진희는 앞으로도 평생 아버님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이고, 이따금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흘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희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그려갈 것입니다. 아버님의 사랑 덕분에 커왔고, 아버님의 사랑 때문에 더욱 슬프지만 결국 아버님의 사랑 덕분에 앞으로의 소중한 나날들을 살아갈 줄 믿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는 장차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어른이 되는데.. 진희가 바로 그 어른이고, 그런 어른이 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제가 읽는데,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어렵고 힘들다고 하지만 저는 곳곳에 이런 참 스승되시는 교사분들이 많다고 저는 믿거든요. 그래서 저는 많은 학생들 중에 갑작스레 아빠를 보내고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아버지께 편지드리는 형식이지만 이 아이를 위로하고 싶을 정도로 참 좋은 학생이었던 가봐요.

이 편지를 떠 올리면서 저는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제가 올 초에 우리 교회의 모든 교역자들에게 부탁한 게, "양 냄새나는 목자가 되자." 사실 분당우리교회 교역자들, 일이 너무 많아요. 그리고 섬겨야 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 보니까 교역자들이 과부하가 걸려있지만.. 양 냄새나는 목자. 성도들이 있는 현장으로 가고,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성도들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이게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시니까요. 진정한 양 냄새나는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시잖아요. 제가 왜 이렇게 오늘의 말씀을 이렇게 시작하느냐?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양 냄새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반응형

 

오늘 본문에 보면 방황하는 두 사람이 등장을 하는데, 누가복음 24:13-14절입니다.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지금 이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올인 한 사람 같아요. 모든 걸 그리스도께 걸었는데?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를 당하고 있는 자기 민족을 구원해 줄 영웅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힘 없이 죽으셨어요. 이게 너무 충격이 되고, 주님께 한번 모든 것을 건 입장에서 끝이다.  그래서 절망해서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입니다. 엠마오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데요. 여러분 그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발걸음이 천근만근 일거예요.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는데, 실패로 돌아가는 좌절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왜 이런 좌절이 찾아왔는가? 하는 거예요. 마가복음 16:11의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누구를 탓하겠어요? 이미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믿음이 안 가는 거예요. 믿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만든 불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좌절로 몰고 간 상황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님 입장에서는 아주 괘씸한 케이스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예수님이 꾸짖기도 하시지요. '어떻게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

저는 이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사사로운 일 하러 오신 거 아니시잖아요?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한 믿음도 없어, 낙심하여 자기 스스로의 발목을 묵고 낙심하여 좌절해 있는 이 두 사람을 주님이 만나 주세요. 그들을 주님께서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로 원하세요.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양 냄새나는 목자이시라'라고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거거든요? 15절에 보니까,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십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보를 보시면 다 이런 식이에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시잖아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무슨 일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주님을 부인해 버리잖아요.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러 가시는데 꿀밤 주러 가시는 게 아니에요. 베드로는 지금 자기가 저지른 가슴 아픈 일 때문에 마음이 무너져 있는 상황이에요. 그걸 싸 메워 주시러 가시는 거예요. 주님이 숯불을 피우고 아시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던 날, 베드로가 추워서 숯불을 째고 있었거든요. 그 환경을 만드세요. 그리고 거기에 베드로가 잡아온 고기를 구워서 먹이세요. 그리고는 유명한 말씀 하시잖아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제가 주님 사랑합니다." 또 물으세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이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 사랑합니다." 또 물으세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를 끄집어내시기 원하세요. 그리고 그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는 거예요. 이 예수님이세요. 

도마와 그 제자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다시 꿈을 심어주시고, 그래서 실패자로 초라하게 서 있던 자들을 일깨워주시는 분. 그분이 우리 주님이세요. 오늘 우리가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은, 2000년 전의 행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모인 거 아니에요. 양 냄새나는 주님이 부활하셔서 영으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활절이 다가오면 참 흥얼흥얼 거려지는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그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네' 제가 이 찬양을 흥얼거리는 포인트는 2절에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을 우리들에게 비유한 가사거든요. 2절입니다. '이 세상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새 소망 주심을 믿사옵니다.' 나그네 길 걸어가는 이 세상이 엠마오길이래요. 끝없는 슬픔이 다가오고, 끝없는 낙심이 찾아오고 베드로처럼 자기를 신뢰할 수 없어서 그렇게 용기를 다 잃어버리는 길이 엠마오로 가는 길이랍니다. 그런 엠마오길을 걸어가는 낙심된 인생길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소망으로 오신다. 이것이 부활절의 의미입니다. 오늘 여러분, 아까 중국 젊은 청년처럼 대학원에 가기를 너무너무 갈망했는데 시험에 떨어지고 나니까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너무 그리워서, 받지 못하는 거 알면서도 문자를 보내는.. 마음의 아픔이나 부담을 갖고 예배드리러 오신 분이 여기 계시잖아요? 정말 너무 내게는 소중한 아빠였고, 세상에서 자상하고 좋은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서 그 오랜 시간을 방황할 수밖에 없는 사춘기 딸. 그 마음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종종 겪는 상실감. 그 아이를 위해서 손 편지를 써 주시는 담임선생님이 너무 귀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그런 상황을 경험하기 때문 아닙니까? 이런 상황을 안 거친 분이 누가 있겠냐고요? 저는 오늘 예배드리러 나오신 이 자리에서 바로 2절 가사 그대로예요. 이 세상 사는 길이 고난의 길이고, 아픔의 길이고, 내가 원했던 일을 이룰 수 없어서 눈물을 지을 수 없어 엠마오로 걸어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예배를 통해 새 소망 주심이 우리 삶의 사건으로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낙심한 두 제자를 찾아 주시는데요. 문제는 두 제자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찾아가면 뭐 합니까? 인식을 못하는데.. 그 내용이 지금 본문 15-16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지금 그 인 줄 알아보지 못하는데 그 앞에 이유를 설명하기를 '.. 눈이 가리어져서..' 여기 나와 있는 그 말은 헬라어로 '크라테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무언가에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 그게 가리어진 상태예요.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지금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가 무언가에 강력하게 사로 잡혀 있는 선입견이 뭐예요?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믿지 못하는 거예요. 강력한 선입견이 이 두 제자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음에도 와닿지 않는 거예요.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가 마음에 담아야 하는 것이 뭐냐? 모두가 갖고 있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니까, 믿음의 진전이 없는 거예요. 여기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인간이 못해내는 것을 못 견뎌하시는 분이 계세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제가 지금 "여러분 나는 죽었다 살아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저는 미친 교주 될 거예요. 저는 죽으면 끝이고, 못 살아나요. 그래서 인간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에요. 여러분 이걸 이렇게 생각해 보시자고요. 나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신 뭐 하러 믿어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조금만 일하면 못 견디는 분이 계시는데, 그렇게 무능한 신이라면요? 교회 문 닫자고요.  시간 아깝게 왜 여기 있어요? 나 하루 종일 예배 인도하고.. 토요일에 설교 준비하고, 우리 아버지는 거기에 인생을 거시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 엠마오로 향하여 가는 두 제자를 향하여 예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찾아가셨는데 인식을 못해요. 왜? 그 두 제자를 사로잡는 강력한 선입견이 그들의 눈을 가리어 버려서. 나는 못하는 일이 많아요.  그래서 인간이고, 그래서 제게 하나님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못하는 거 하나님도 못하신다. 그거 좋으세요?  성경에 주님 하신 일을 조금만 얘기하면, 얼굴 빨개져서 대드는 분이 계세요. "이게 가능한 일이냐?!" 가능하지 않기를 그렇게 원하세요? 그럼 뭐 하러 예수 믿냐고요? 이상하게 하나님을 이렇게 작게 만들어가지고 자기 삼촌 정도 수준으로 생각하고 예수를 믿어가지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런 신에게서 뭘 기대하십니까? 적어도 여러분 제가 수 없이 간증하듯이 제 삶 속에서 저는 죽은 나사로. 내 안에서 백번 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에요. 홍해가 100만 갈라졌겠냐고요? 우리 안에 있는 강한 선입견이, 이 두 제자가 사로 잡혀 있는 강한 선입견이 17절과 같은 슬픈 결과를 가져오는 거에요. 누가복음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맨날 우울하잖아요.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춤을 추듯 기뻐하심이 매일 같이 있었냐고요?

 

 

지난 성금요 예배 때요? 저는 그때 간증을 하신 분들의 내용을 홈페이지에 올려달라고 했어요.  너무너무 제가 감동이 되니까요. 그래서 이제 성금요일 예배를 드리러 오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홈페이지에 올려도 절대로 들여다보지 않으실 분들을 위해서 제가 진액으로 설명을 해드릴게요.  

자기 개인적으로 만난 주님을 간증했던 이 분은요? 완전 초신자예요. 2021년 9월. 1년 반 전에 혈액암 4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너무 절망적인 상황이잖아요? 그때 예수 안 믿었었는데,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더래요. '지금 내 이 상황은 사람의 힘으로 나을 수 없고,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이 나를 치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데요. 이분이 변호사예요. 여러분 변호사는요? 눈으로 보이는 팩트 아니면 안 믿는 분들이에요. 더군다나 이분은 크리스천이 아니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요? 옆에 있던 어떤 지인이 분당우리교회를 가보라고 추천을 했데요. 그리고는 이때가 가을이니까요, 1년 반전에 특별새벽 부흥회 실황을 들어보라고 공유한 것 같아요. 생전에 한번 교회 안 다녀 본 분이 그거 10분을 듣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막 엄청 성우 같은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그랬는데, 그분이 그 설교를 듣고 교회로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런 간증을 하십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다 보니, 큐티,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찬송가 외에 우리들의 찬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만든 찬양집을 보신 거예요. "그때부터 성경 찬송가 예배를 위한 태블릿, 필사노트가 늘 저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일상은 늘~ 성경과 함께였습니다. 입원해서 항암 치료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병원 간호사님이 병실에서 늘 예배, 찬양 들으며, 필사하던데? 혹시 목사님이십니까? 그런 질문도 들었다고 해요. 오후에는 성경 필사하고, 찬양을 들으며 산책을 1시간 정도 하였습니다. 저녁에는 예배를 드리거나 아니면, 우리 교회에서 하는 리딩 지저스를 읽거나 다시 한번 설교 말씀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병 낫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지만, 말씀 묵상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아프기 전에 나 자신이 얼마나 교만했고, 얼마나 불순종했으며, 꽃 피우기 위해서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분이 단순히 병 고침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 2월 검사에서 완전 관의 상태이며, 면역수치 또한 정상 수준이라고 확인받았습니다. 지금은 저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다락방 안에서 공동체 생활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은혜가 제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예수 믿은 지 1년 반도 안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말씀 앞에 나아가시니까요? 이분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임하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예수 믿은 통틀어 1년 반 밖에 안되신 분이 그날 성금요일에 나오셔서 수많은 모태신앙, 목사, 전도사, 장로들 앞에서 이 분이 간증을 하셨거든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은 눈물지으며 엠마오로 향하는 길이라고 하잖아요? 왜, 여전히 그렇게 외롭게 사십니까? 어떻게 그 문제를 혼자 끙끙 짊어지고 살아가십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강한 선입견 때문에..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안돼!' 그거 아닙니까? 내가 죽음을 극복 못하는데, 신도 극복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이러한 강력한 고정관념을 한번 깨트려보세요. 나는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이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어요.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세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이렇게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리스도를 인식하지 못하던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시는데요. 그때 쓰시는 도구가 놀라운 역사가 아니라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풀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여러분, 이 시간에 주님이 임하셔도 뛰어내리고 망토 한 슈퍼맨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주님이 주신 말씀을 풀어주실 거예요. 그래서, 좋은 목사는? 성격 좋은 목사도 아니고, 모든 살림살이 따라다니면서 도와주는 분이 아니라, 말씀을 잘 대언해 주는 분이 좋은 목사예요.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리고 또 그들이 주님의 배려를 받은 것이 뭐냐? 주님이 식탁을 같이 나누세요. 친밀함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났더니 그들의 영안이 밝아져서 찾아오신 주님을 알아보기 시작하는데요. 이것이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 2가지를 가져다줍니다. 그들에게 찾아온 변화가 두 가지입니다. 

 

그 변화 첫째로, 상한 감정의 치유가 됩니다.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간다고 했었는데, 누가복음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여기 나오는 '뜨겁다'는 말은, 헬라어로 '카이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타오르는 불꽃, 어두움을 밝히는 빛' 이런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단어인데요. 그래서 이 부분을 몇 가지 의미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뜨겁지 아니하더냐'하는 이 말은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거예요. 두 제자가 고정관념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주님이 풀어주시는 말씀을 듣고서 시야가 떠진 거예요. 오늘 여러분 예수 안 믿는 사람들과 믿지만 도대체 신앙의 성장이 없는 분들의 공통점은 시야가 좁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 밖에는 못 봐요. 그래서 맨날 소탐대실하는 거 아닙니까? 예수 제대로 잘 믿으면 시야가 어디까지 떠집니까?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눈이 열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시야가 확장이 안되면 손해 보고 못 삽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인데 내가 왜 맨날 손해만 보느냐고요? 그런데 시야가 떠지면, 이 땅에서의 삶은 섬김을 훈련하는 곳이에요. 영적 성숙을 위하여 연습하는 것이 이 땅이거든요. 그래서 양보 잘합니다. 포기 잘하고요. 별로 아깝지 않아요. 왜? 시야가 떠지니까, 이게 다가 아니니까.. 

그런가 하면, 또 하나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냉랭했던 마음이 열정으로 불 타오르게 되었다.' 가슴이 뜨거워진 거예요. 예배를 드리다 보면 종종 이런 경험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뜨거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마음이 뜨거워지면? 우리 마음 안에서 비장해져요. 에너지가 넘쳐요. 제가 이 장면을 생각해 보니까? 엠마오로 가는 길의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었을 거예요. 저도 걷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공원을 걸어보면, 걸음걸이를 보면 마음 가짐을 알아요. 활발하게 움직이는 분을 보면, 둘 중 하나입니다. 비장하게 살 빼시거나, 아니면 의욕이 있는 분이세요. '나 할 일이 많아.' 저는 주로 그 편이에요. 열심히 열심히 걷고요. 터벅터벅 걷는 분을 가끔 씩 보면, 그럴 힘도 없는데 나오신 분들인 거예요. 지금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강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가 주님을 만나고 나면 마음이 뜨거워지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 더 이 부분을 해석할 수 있는데, 여기 나오는 뜨겁다는 뜻으로 번역된 '카이오'라는 단어는 '즐거움'과 결부시킬 때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요한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요한복음 5: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 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카이에요. 지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낙심하여 절망에 있다가 시야가 넓어지자 활력을 돼찾고, 마음의 뜨거움을 경험하니까, 기쁨이 회복되는 거예요. 즐거워지는 거예요. 지난주에 말씀을 나누었듯이 기쁨이 없으니까, 쾌락을 추구하는 거예요. 제가 어느 기사를 보니까, 전 세계적으로 마약 사용이 20%대로 번지고 있다고 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기쁨이 사라져 간다는 뜻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하는 가운데 의욕이 회복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활력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억지로 지는 짐이 억지로 지는 게 아니라, 기쁨의 회복으로 즐거움으로.. 그래서 저는 아브라함 헤셀의 이 말을 정말 좋아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결코 성공을 구한 적이 없다. 다만 경이로움을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다.
- 아브라함 헤셀 -

예수 잘 믿는 분 보면, 감탄사가 많아요. 경이로움이 많아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누구 집에 초대하면 감탄이 많아요. "우와~ 김치가 왜 이렇게 맛있어요?" 살짝 맛있는 데도 경이로움이 많아요. "와~ 이 집 아들 정말 잘 생겼다." 이렇게 살면 좋잖아요? 영화 한 편을 봐도 모든 영화가 다 재미있고 그렇게 살면 좋잖아요. 뭘 해도 시큰둥 한 사람 있잖아요. 우리 집 애들이 사춘기 때 좀 그랬어요. 경이로움이 회복되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낙심한 두 제자에게 찾아온 변화가 뭐냐? 해야 할 일이 있는 곳으로 돼돌아갑니다. 누가복음 24:32-33,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지금요? 가슴이 뜨거워지자마자 바로 행동으로 옮긴 거예요. 떠나왔던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밤이었거든요? 자고 내일 가자 아니에요. 당장 가야 해요. 경험해 보신 분이 있으실 거예요. 너무너무 설레는 일이 있으면, 밤을 보내는 것이 못 견디게 힘든 거예요. 두 제자가 그런 거예요. 가슴이 뜨거워지니까, 떠나왔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못 견디는 거예요.  왜 되돌아가지 않으며 안되었을까요? 사명이 생겼거든요. 지금 예루살렘에도 자기와 같은 사람이 많을 텐데.. 주님의 부활을 강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못 믿어 낙심하고, 우울 해 하고 있는 이들이 있을 텐데..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거거든요. 

여러분 부탁드립니다. 예배를요? 머리로만 드리는 분 계시잖아요? 이제 가슴으로 끌어내리셔야 해요. 무슨 설명을 해도 "아이~ 저 목사 또 이상한 소리 하네, 예수가 뭐 또 저런 일 했다고 그래?" 백 년을 다녀보세요. 변호사 초신자와 같은 역동적인 은혜를 맛볼 수 있냐? 그래서 여러분 이런 말 하잖아요. 머리에서 가슴까지 30Cm인데 세상에서 제일 먼 거리래요. 두 제자들은 이제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더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머리에 머무르는 신앙을 가슴으로 끌어내리는데 제자들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들 때는 손발고 연결시켜야 하는 거예요. 제가 요즘 자주 말하는 'Just do it'이에요. 깨달았습니까? 사명의 자리로 가셔야 해요. 

분당우리교회는 할 일이 많은 교회잖아요? 사실 일만 성도 파송운동으로 열 한 교회를 세워서 한 4억씩 후원하고 그분들을 분당우리교회로 초대하여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할 때, 사실은 제가 여러분들께 죄송했어요. 왜냐하면, 일만 성도 운동으로 모두가 지쳐 있으셨을 테니까요. 그래서 당회에서 장로님들이 이런 말씀하시는 거예요. "목사님, 다 좋은데요. 목사님 하고 목회하는 것 좀 힘듭니다. " 너무 죄송했어요. 어떡합니까? 가슴이 뜨거운데, 가슴이 뜨거우면 손발로 연결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겠냐고요? 안 쫓아낸 것만 하고도 감사하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11 교회로 가시라고 강요를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하시니까.. 가슴이 뜨거워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11 교회 중에 5 교회를 우선 일차로 선정했고요. 나머지 6 교회도 빨리 세워지기를 기도해 주시고요. 이제 오늘 수요 예배 때 5주 동안, 목사님 한 분 한 분을 초대해서 말씀을 들을 거예요. 그 설교를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올릴 거예요. 그리고 제가 이 교회들을 추천할 거예요. 수요예배에 함께 오셔서 축복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몰라요. 다섯 교회 명단 : 여정의 교회(서명수 목사), 예수다솜교회(박두진 목사), 은계나눔교회(이용호 목사), 이름없는교회(백성훈 목사), 한사람교회(서창희목사). 이 교회 주소를 홈페이지에 올려달라고 했거든요? 인근에 있는 성도님들은 이제 그 교회 가셔서 예배드리시고, 주변에 이 다섯 목사님을 요모조모 검증한 분들이니까, 자신 있게 추천하셔도 돼요.

이 다섯 교회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내려가서 충청도 지역, 강원도 지역,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또다시 수도권으로 이 일을 계속할 겁니다. 여러분 피곤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 일이 계속되기를 위하여 "하나님 내 가슴이 뜨거워지기 원합니다."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가슴이 뜨거워지니까, 그 제자들이 사명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말씀을 저는 이렇게 맺기 원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세상을 이기는 절망은 없다.' 이렇게 정하고 싶은데요.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기는 희망이에요. 이 희망을 이길 절망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표현을 좋아해요.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여기서 봄은 부활하신 예수로 얻게 되는 봄이에요. 이 봄을 이길 고난의 겨울은 없습니다. 오늘 이 부활예배와 이 말씀과 오늘 함께 드리는 이 예배가 엠마오로 향해 가던 제자들의 발걸음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다시 사명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두 제자의 발걸음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