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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이찬수목사

설교문 I 행복을 위한 거룩한 선 긋기 | 이찬수 목사 | 디모데후서 2장 20-22절 I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by №1★↑♥ 2023. 5. 26.

2023-04-23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I 행복을 위한 거룩한 선 긋기 | 이찬수 목사 | 디모데후서 2장 20-22절 I 이찬수 목사 설교문 I 이찬수 목사 주일 설교문

디모데후서 2장 20-22절 | 행복을 위한 거룩한 선 긋기

-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

최근에 기독교 신문의 칼럼을 읽었는데, 칼럼의 시작이 이렇습니다. 

 

만만한 게 기독교다. 대중의 집단 광기와 분노의 배설창구가 된 듯하다. 목사의 딸이 마약 중독자로 등장하는 더 글로리와 수리남, 지금 우리 학교는, 지옥, 오징어 게임 등 요즘 넷플릭스에 등장하는 자극적인 드라마의 패턴은 과장하면, 기승전 기독교이다.

 

사실, 저도 그걸 우려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인기를 끈 드라마에 마약중독자가 나와요. 그런데 뜬금없이 마약중독자를 담임목사 딸로 설정을 해놓고 계속 예배드리는 장면과 조롱하는 내용들이 교차되다가 제가 제일 당황스럽고 화가 났던 장면이 위에서 한참 예배를 드리는데, 그 딸이 교회 지하에서 마약을 하는 거예요. 그 장면이 제 눈에는 굉장히 저질스러웠어요. 굳이 이렇게까지 설정하지 않고, 단순히 마약중독자로 해도 드르마 전개에 전혀 지장이 없을 텐데.. 왜 하필 교회에서 그걸 찍어서 예배드리는 모습과 담임 목사 딸과 교차하여 드러내는가?

그런가 하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면서 그중에 허구를 하나 넣어 놨는데, 아주 악한 범죄자가 그 지역의 목사로 나와요. 목사가 돈에 눈이 멀어서 마약을 팔고, 성도들을 감금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모습이 묘사가 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면서 뜬금없이 거기에 목사를 넣어놨느냐? 이런 것들이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나기도 하는데요. 아시다시피 작가, 감독이야 시청률이 중요하니까 교회가 예배하는 시간에 목사 딸을 마약에 취해 힘들어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 관객들이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만드는 거거든요? 이런 것들이 목회자인 저로써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데요. 그 칼럼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교회가 동네 북이 된 것 같아요. 왜 이렇게 됐느냐? 제가 이 칼럼을 읽으면서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문이 떠올랐는데요. 요한복음 17:4'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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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요한복음이 뭘 강조하시는지 아시겠죠? 요한복음이 나오자마자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세요.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이 자꾸 어둠의 세상을 지적하시니까요. 그것 때문에 영접을 하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배척하고 미워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주님이 제자들에 대하여도 세상이 너희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는데요. 제가 이렇게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고, 드라마에서 조롱하는 게 바로 우리가 빛의 역할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설교하면 양심불량이에요. 오늘 교회가 조롱당하고, 성도들이 또 목사가 조롱당하는 것은? 우리가 빛의 역할을 잘해서 어두움이 화가 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야기하잖아요? "너희는 빛이라고 하면서, 우리랑 뭐가 다르냐? 교회가 더 밝으냐? 내가 보니까 교회가 더 어두운 것 같다." 비아냥 거리는 일들이 많고요. 그런 인식들이 작가나 감독들로 하여금 교회를 마음껏 비웃고 조롱하는 소재로 쓰는 결과를 가져온 게 아닌가 하는 부분이 마음이 아픈 거예요. 이런 현실이 참 고민이 되는데 어떻게 하느냐? 오늘 예배 끝나고 피켓을 준비했으니까 방송국을 점령하러 갑시다. 이런 거 용납하지 않겠다고 데모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다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반응하고 물리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고 잘 분석해야 해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가슴 아픈 일들을 피할 수 있느냐? 저는 목회자니까, 뭐가 잘 못 되었나?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나라는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발견한 말씀이 오늘의 본문이에요. 

디모데후서 2:20-21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학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지금 여러분 이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포인트를 아시겠지요?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것과 세상이 추구하는 게 완전히 다르다는 거예요. 이 세상은 성공을 추구해요. 이 세상은 인기를 추구하고, 이 세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을 추구하는데 우리 하나님은 그런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크고 작은 것에 관심이 없으시고, 깨끗한 그릇인가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거예요. 

우리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무슨 뜻으로 사용되는 건가 사전을 찾아보니 '무슨 수단이나 방법이나 상관없이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거예요. 비슷한 속담으로 '꿩 잡는 것이 매다'는 말도 사전을 찾아보니 두 가지 풀이 중 하나가 '방법이 어떻든 간에 목적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말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속담들인데요. 예수 믿는 우리는 이런 가치관의 영향을 더 받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가치는 서울을 못 가더라도, 꿩을 못 잡는 한이 있더라도 나쁜 방법으로 하면 안 돼. 이게 깨끗한 그릇이거든요. 그러면 여러분 스스로 양심에 손을 얹고 한번 물어보세요.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가치관의 영향을 더 받고 사십니까? 이 세상의 가치의 영향을 더 받고 사십니까?" "큰 그릇만 되면 되지, 말이 많아! 가게 내가 돈 벌려고 하는 건데 무슨 양심을 따져! 불량식품이면 좀 어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가치관에 영향을 더 받습니까? 세상의 영향을 더 받습니까?

여러분이 입장 곤란해하시는 것 같아서 저부터 고백할게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시계를 22년 전으로 돼 돌려서 다시 교회를 개척하는 시점에서 저어게 이렇게 물으시는 거예요. "이 목사, 네가 개척하게 될 텐데 둘 중 하나 택해라. 꿩 잡는 게 매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들 끌어 모으는 데 온 관심을 기울이고 그래서 단번에 10만 명이 되는 교회가 되는 길이 하나 있고, 그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 10년이 지나도 성도가 15명 정도 모이는 반 지하에서 독립도 안 되는 길이 하나 있다면 어느 길 택할래?" 그러면, 놀라실 거예요. 그렇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1번 선택할 거예요. 제가 긴 세월을 곰팡이 냄새 맡아 가면서 하느니.. 악한 일은 하지 않으니까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구슬려서 10만 명 모이는 길로.. 내 본능은 반드시 그걸 택할 거예요. 놀라신 거예요? 깨끗함이 중요하지만, 그 본능이 제 안에 꿈틀거려요. 지금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싸우는 거예요. 목회가 심방 많이 가서 허리 아픈 게 뭐가 힘듭니까? 목회해보니까, 이 본능과 싸우는 게 힘든 거예요. 제 안에 꿈틀거리는 생각은 이 세상의 가치관이에요. 거기서 자유롭지 않아요. 제가 이것을 용감하게 고백할 수 있는 건.. 사도 바울 때문입니다. 그 대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게 다른 말로 하면, '난 구제불능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안돼!" 저와 여러분이 오늘의 말씀 앞에 적당히.. 그러면 안 들은 것과 같아요. 정확하게 자기를 직시해야 해요. 저부터가 저 스스로를 고발하고 까발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거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 중에서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젖어 살기 때문에 오늘 교회가 악인의 상징으로.. 영화 같은 데 보면 위선자를 고발하는 설정으로 '가정예배 드리는 거 나와요.' 그리고 지 하고 싶은 악한 일 하는 걸로 묘사되는 건 우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미가 6:6-7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물량 공세하는 거예요. 하나님도 이거 보고 봐주시지 않겠어? 심지어는 '...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큰 그릇이에요. 이런 사람을 향해서 하난미이 뭐라고 교정해 주시냐? 8절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내가 다 보여졌잖아, 너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옳은 생각이 아니라고.. 그 얘기거든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본문으로 말하면 큰 그릇을 드리겠습니다. 큰 그릇을 드리면, 하나님도 이거 안 받고는 안될걸요? 이렇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신앙생활하는 그에게 "나는 네가 그런 걸로 혼란을 겪기보다, 난 네가 깨끗한 그릇이었으면 좋겠다." 

교회가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목사 딸이 마약 중독자로 등장을 하고, 목사가 교회를 하면서 교회나 팔고 성도들의 노동력이나 착취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건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에요. 관객들이 바본가요? 그 영화는 현실성이 하나도 없어서 재미 하나도 없더라.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마약을 파느냐? 고 그러면 이런 내용이 안 그려질 텐데.. 계속 이러한 소재들로 그려지는 것은 그만큼 공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거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는 다 과장이지요. 악한 목사들이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미지화되는 것이 뭘 의미하느냐? 

그래서 우리도 자꾸 큰 교회가 성공한 교회가, 큰 교회 목사가 대단한 목사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현실..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언론에 인터뷰 안 하는 것이 그러한 이유예요. 이번에 제가 자청해서 인터뷰 좀 해달라고 한 일이 2주 전에 있었어요. 담당하는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목사님이 전화를 다 주시네요." 우리가 추구하는 꿈 넘어 꿈 다섯 교회를 좀 알리는 것과 같은 일 아니고서는 인터뷰하지 않아요. 자꾸 큰 교회 목사가 나오고 하는 게 큰 그릇이 좋은 것처럼 비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요? 헌금 많이 성도가 VIP 대접을 받고, 교회를 떠나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저질이 될까 봐 두려워요. 그래서 저는 22년 목회하는 동안 성도님들 헌금 생활 뒤져본 적이 없어요. 우리 장로님들이 헌금 생활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해요. 볼까 하다가도 안 봤어요. 이거 자꾸 보다 보면 그다음에 장로님 뽑을 때 헌금 많이 하는 순서대로 흔들릴까 봐 그런 거예요. 교회가 자꾸 그런 걸로 자꾸 사람을 판단하기 시작하고 교회가 바깥의 세상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지를 따라 직분을 주기 시작하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흐를 수 있는 거예요. 교회가 기준을 한번 정하면 엄청 시끄럽잖아요? 다른 뜻 없습니다. 룰을 공평하게 잡으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이 되도록 적어도 애는 써야 하지 않을까요? 이게 깨끗한 그릇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진짜 자기를 한번 돌아보기를 원해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게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속은 세상 가치관으로 꽉 차 있으면서, 그 성전 한 복판에서.. 홀리 보이스라고 하잖아요? 저도 할 수 있어요. 그런 어떤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정형화된 목소리.. 성경 들고 다니는 거 좋은 것이지만.. 보이기 위해서 하니까 문제인 거예요. 

오늘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오늘의 삶을 한번 돌아보자고요.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빌미를 누가 제공하고 있는지..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성품과 특징에 따라 그분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잖아요. 예를 들면,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 '승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샬롬', '평강의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의 특징에 따라 그분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불러드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구약 성경에 모든 하나님의 성품을 다 모아놓아서 한 마디로 정리하라고 한다면, 딱 하나예요.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거룩이시고요, 더 중요하신 것은? 그분이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백성들도 거룩하시기를 원하세요. 그게 예레미야 11:45이에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뭐가 거룩인가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게 거룩 아닙니까? 우리가 10-20년 뒤 우리부터가 불씨가 되어서 영화감독이 교회를 조롱하면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게 날에 대한 꿈이라도 꿔보자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큰 교회 작은 교회 이런 얘기 말고, 거룩한 교회에 대한 소망을 품기 원해요. 세상과는 달라.. 분당 우리교회 성도들은 다르던데요? 가끔씩, 한 10년에 한 번씩 듣습니다. 그러면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와요. 이 이상 기쁜 게 있습니까? 

신약으로 와서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을 추구하지 않고는 철야기도 10시간 기도해도 주를 보지 못한데요. 무서운 말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뜨겁게 사모하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 추구하던 내 걸음을 옮기는 거예요. 서울에 못 가더라도, 꿈을 못 잡더라도, 나는 잘못된 방법 쓰지 않을 거야.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결국은 꿈을 못 잡은 게 엄청 자랑이 되어야 해요. "우리 아들이 커닝해서 대학교 가는 것보다 못 간 게 난 더 자랑스러워." 이런 간증 안 되겠습니까? 간증이 무슨 공부도 못하는 애가 기도해서 좋은 대학 갔다는 것만 있습니까? 뭘 지금 제가 강조하시는지 아시죠?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에요. 행복은, 주님 나라 가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행복은,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거거요. 이 땅에서는 거룩을 추구하는 거예요. 사명을 추구하는 거예요. 

 

 

 

 

 

 

 

최근에 저는 Fellebration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사실은 아세아연합신학교에서 가르치시는 이한영 교수님이 만드신 단어예요. 유례가 재미있어요. 이분의 딸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이에요. 성적표를 받아왔는데, F를 받아왔어요. 그랬더니 너무 충격이었어요. 엄마 사모님이 예배를 드리시는 데 교수님이 보니까, 엄청 울고 계시더래요.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여보, 왜 이렇게 많이 울었어?" 그랬더니, 사모님이 귀하세요. "우리가 그동안 딸을 속였잖아. 너는 하나님의 딸이라고, 너는 존재가 너무 귀하기 때문에 성적은 중요하지 않다고 그랬는데.. 딸이 F를 받고 오니까, 사실이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괴로워서 예배 시간에 엉엉 울었어." 교수님이 집에 갔더니, 애가 울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싫다는 애를 데리고 식당에 데리고 갔어요. 식당에 앉은 다음에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가, 너 여기 왜 데리고 왔는지 아니? 'Fellebrate' 하러 왔어.", " 그게 뭔데요?" "네가 C학점을 받았으면, Cellebrate 했을 텐데.. F 학점을 받았기 때문에 Fellebrate 하는 거야." 이 교수님도 참 귀하세요. "내가 너한테, 회개할 게 하나 있다. 우리가 그동안 네가 정직이 중요하지, 성적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던 게 거짓말이었어, 미안해. 내가 사과할 게. 네가 Fellebrate 하러 왔어." 그렇게 말씀하시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F를 받았니?" 이게 부모의 한계지요. 그랬더니, 딸이 말하기를.. 커닝 페이퍼가 돌았는데, 자기에게까지 커닝 페이퍼가 오길래, 커닝페이퍼 던지고 백지를 내서 F를 받았다."라고 하더래요.

이런 일이 있고, 1년이 지났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학 입시에서 에세이가 중요한데, 에세이 제목이 Fellebrate에요. 에세이는 창의적인 게 중요한데, Fellebrate이 뭐지? 그러고 읽었겠지요? 1년 전 이야기를 쓰면서, 마지막 부분에 '이 세상을 정직하게 살 때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수학을 못하지만 저를 뽑아 주신다면 열심히 공부해서 Fellebrate 해 주는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딸아이가 점수가 좀 미달이었는데요. 창의적이고, 정직한 에세이로 인해 대학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분당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잖아요. F를 받아와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커닝하지 않고 불이익을 당한 딸이 너무 자랑스러워." 하나님의 가치관을 따르고 아니겠습니 끼? 

지금 분당우리교회가 박물관과 같은 교회가 되는 걸 막아야 한다. 현상 유지적 교회가 되는 걸 막아야 한다. 그래서 이 본문을 가지고, 일곱 번째 박물관 교회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뭐냐? 거룩의 회복이에요. 이걸 저는 세상과의 차별화라 생각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카도쉬'인데, 이 단어는 어원적으로 '구별됨'을 의미해요. 여러분 아시잖아요? '성도'도, '구별됨'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제목을 행복을 위한 거룩한 선 긋기로 지어보았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100%로 무공해로 살 수 없다 할지라도 자꾸 선을 그어야 해요. 서울 못 가도, 꿩 못 잡아도, A 못 받아도 하나님의 정직, 하나님의 거룩을 위해 몸부림치기 원해. 우리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오늘 두 가지 추구해야 할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교회는 '함께' 거룩을 추구하는 공동체

첫 번째, 교회는 함께 거룩을 추구하는 공동체입니다. 딤후 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청년의 정욕으로 상징되는 이 악한 세상의 가치관과 싸워야 하는데, 혼자는 역부족이에요. 그러기에 함께 싸워야 해요. 다락방이 중요하고, 대학생들 대학부 가셔야 해요. 청년? 청년부 가셔야 해요. 함께 싸우지 않고는 청년의 정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설교를 어제 정리하고 있는데 교구 목사님께 메일이 왔습니다. 일만 성도 파송 이후로 초신자들이 많아서 애를 쓰고 계시다. 신앙성장을 위해서 애를 쓰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락방도 그런가 봐요. 예수 처음 믿는 초신자분이 계시는데 이분이 아직 하나님이 안 믿어진데요. 그런데 올해 들어서 다락방에 가야겠다. 그런데 완전 초신자에게 다락방에서 기도를 시켰나 봐요. 거기서 이렇게 기도하셨데요.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아직도 잘 안 믿어집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이 참 좋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마음을 열고 공감받는 이곳이 정말 좋습니다. 여기 있는 다른 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계시니까, 이분들 하나님이 잘 지켜주세요." 그렇게 초신자가 울면서 기도하시니 모두가 다 울었다고 합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고, 용기를 얻고, 힘을 얻고, 처음 나온 초신자의 기도를 통해서도 위로해 주는 일이 다락방에서 일어나는데요. 저는요? 다락방 안에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위하여 저는 다락방이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거룩을 추구하는 공동체. 거짓말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모이고..

'초신자가 와보니 기가 막혀요. 거짓말 입에 달고 사는구먼?' 그렇게 느껴졌으면, 이분이 울면서 기도했겠냐고요? 다락방은, 교회는요?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분하는 데가 아니고요.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데가 아니고 거룩을 추구하는 곳이에요. 초신자라도 하나님이 잘 안 믿어져도 거룩을 추구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거룩한 하나님을 추구해 보세요. 

 

2. 교회는 '거룩의 출처가 하나님'이심을 아는 공동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게 하나 더 있어요. 교회는요? 거룩의 출처가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 공동체예요. 요즘은 출처가 중요하잖아요? 저도 설교하면서, 출처를 밝히잖아요? 거룩도 마찬가지예요. 출처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세요.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우리말로의 번역이 약간 아쉬워요. 능동태잖아요? 거룩하고인데, 헬라어로 보면 수동태예요. 그래서 원어에 가깝게 번역을 해보자면, '거룩하게 하고'에요.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거예요. 출처가 하나님이세요. 아까 제가 고백했잖아요? 지금도 저보고 선택하라고 하면.. 10만 명 모이는 거 택하지.. 거룩, 거룩, 거룩 20년, 30년 사는 거.. 제 본능은 후자를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절 너무 고상하게 보지 마세요. 저 저질이에요. 그러나 싸우는 거지요. 끝까지 싸우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믿는 거 하나 있거든요. 거룩의 출처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분이 주시는 거기 때문에 더 의지하는 거지요. 더 매달리는 거지요. 이걸 잘한 게 사도 바울이에요.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기 정체성이 너무 분명해요. 자기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래요. 자기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그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래요. 바울은 이걸 고백하는 거예요. 저의 부끄러움을 여러분들에게 고백하는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요. 여기 질그릇이 아닌 사람 있습니까? 내가 질그릇임을 인정할 때, 보배되신 그분을 인정하게 의지하게 되거든요.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는, 거룩의 출처를 정확하게 인정하는 정확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정확한 신앙 공동체여야 합니다. 여러분, 질그릇인 거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라도 여러분이 저의 좋은 점을 보신다면, 그건 저가 아니라 제 안에 계신 보배 때문이세요.

 

결론을 이 찬양으로 맺기 원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왜 의지할 수 없습니까? 출처가 저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는 게 뭐냐?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거룩의 출처 되신, 능력의 출처 되신 주님.. '..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우리 가사를 묵상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내가 거룩을 쟁취하려고 내 본능과 싸워야겠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이 찬양 함께 불러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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