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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이찬수목사

설교문 I 우리가 꿈꾸는 아둘람 공동체(1) I 사무엘상 22장 1-2절 I 이찬수 목사 I 2017년 2월 16일 I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by №1★↑♥ 2023. 12. 25.

2017년 2월 1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 이찬수 목사 설교문, 사무엘상 22장 1-절, 우리가 꿈꾸는 아둘람 공동체(1), 공동체 설교

우리가 꿈꾸는 아둘람 공동체(1)

-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 우려되는 점이 울분과 분노를 가진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점차 뚜렷해지면서 마음에 상실감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거기서 오는 상실감이 울분과 분노로 변하여 묻지 마 범죄로 까지 이어지고 있어 사회적 문제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곤 합니다. 

사회가 이런 식의 울분이 쌓여 갈 때, 사회는 울분을 해소해 줄 해독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회가 그러한 기능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픈 현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아둘람 공동체를 자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둘람 공동체를 보면 그런 대안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아둘람 공동체의 구성원을 보면 상처가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1-2절입니다. 삼상 22:1-2,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왜 그 불편한 동굴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까? 그리고 다 하나 같이 상처받은 자.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 이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거예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나? 배경이 이렇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계속되는 사울왕의 살해 위협에 견딜 수가 없어서 적진인 블레셋 가드 땅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거기서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마지막으로 도망친 곳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둘람 동굴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데, 400여 명이 모였어요. 그 사람들의 면면을 보니 '환란 당하고, 울분이 많고,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더라는 거예요. 사실 그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잘 산다면 그 불편한 동굴로 모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동굴이라는 환경 자체도 열악하기 그지없는데 상처받은 사람들이 눈만 뜨면 부대끼는 거예요. 제가 목회를 해보니까 이 상처가 굉장히 위험합니다. 내가 상처받은 게 치유가 안 되면, 그것이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독이 되더라고요. 여러분 이거 아셔야 해요. '나 상처가 많아, 나 억울해!'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기 쉬운 사람이 되었다는 걸 인식하셔야 해요. 그러니까, 그 동굴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자료에 보니까, 그 처럼 상처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아둘람 공동체에서 훗날 다윗이 다스리는 통일 이스라엘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거기서 배출되었다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상처가 많고,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아둘람 공동체가 그런 능력의 공동체로 탈 바꿈 될 수 있었나? 제가 이런 관점에서 아둘람공동체의 비결이 무엇인가 보니까 치유의 공동체였다는 거예요. 아둘람 공동체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치유가 일어나고, 꿈이 회복이 되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회복되는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그것을 생각하니까 제가 부러운 거예요. 

교회와 아둘람 공동체의 공통점이 뭐냐?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거예요. 교회에도 아픈 사람들이 많고, 상처가 많아요. 여러분들이 저에게 그런 아픔을 눈물로 호소하고 계시거든요? 이게 공통점이라면 불행하게도 아둘람 공동체와의 현실의 교회의 차이점이 뭐냐? 아둘람공동체와 같은 치유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이긴 많이 모이는데 치유가 안 일어나니까 교회가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그러면, 왜 치유가 잘 안 되느냐? 제가 이것을 생각하다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의 세속화의 증거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가 세속화되면 영적인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치유의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세속화를 왜 두려워해야 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세속화되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교회가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치유의 공동체가 되기를 꿈꾸며 기도해야 합니다. 치유의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 교회 안에서 변질된 모습은 없나? 세속화된 부분이 넘쳐나고 있지는 않나?를 돌아보며 자기반성과 자기 점검이 필요해요. 

저는 사무엘상 19장에 나와 있는 에피소드 하나가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삼상 19: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이게 무슨 내용이냐? 사악한 사울 왕이 사람을 보내서 다윗을 잡아오라고 해서 전령들이 라마나욧이라는 곳으로 다윗을 잡으러 갔는데 그곳에서 20절의 말씀 그대로예요.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 안에 있으면서 그동안 사울에 영향력 아래에 있던 그들이 성령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거예요. 그렇게 된 계기가 뭐냐 하니까,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사울의 영향력 아래에서 하나님의 영향력으로 바뀌어졌다는 거예요. 저는 이것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요즘에 제가 교회를 방문하다 보면 교회의 입구마다 '신천지와 이단 종파의 출입을 금합니다. 출입 시 법적 조치하겠습니다.' 성도들이 오죽 이단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 그런 극단적인 문구를 써 놨을까요? 그걸 보면서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슬픈 거예요. 만약에 교회가 오늘 방금의 말씀과 같이 라마나욧 공동체와 같아서 그들이 잘못된 신앙과 지령을 가지고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할지라도 이 교회 안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예배의 영광을 누리고 그 심령이 변화가 되어서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구나!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데.. 그게 안 일어나고 자꾸 이단의 영향을 받으니까, '출입금지!', '법적조치!' 그 사람들은 누가 구원하나요? 

그래서 이단, 삼단 욕할 거 하나도 없어요. 오늘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그 공동체에 발걸음을 해도 매력이라곤 하나도 없고 오히려 거꾸로 이단의 영향을 받고 있는 현실을 가슴 아파해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신천지를 환영합니다.'라고 하고 싶지만 저도 자신이 없어요. 넘어가면 어떡해요? 이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사무엘이 이끌던 라마나욧 공동체가 너무 부러워요. 제가 보니까, 이 라마나욧 공동체의 아름다운 영적 파워를 경험하고 누렸던 것이 훗날 오늘 본문과 같은 아둘람 공동체를 세워가는데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이게 우리가 꿈꾸는 10년 프로젝트예요. 우리 모두가 라마나욧 공동체와 같아서 여기서 치유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고,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많이 맛본 여러분들이 교회 곳곳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이 교회에서 누렸던 기쁨을 전해주길 바라요.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꿈꾸는 것은 교회를 해체하자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제대로 해보자는 갈망이에요. 우리가 제대로 된 교회가 되지 않고는 누구를 섬기고, 누구를 돌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제대로 된 교회가 되지 않고서는 누구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 안에서도 문제 일으키다가 남의 교회 가서도 문제 일으키는 성도가 되시려면 어떻게 되려고 하려고요. 그러니까, 이 안에서 문제 일으키시는 분은 절대로 다른 교회 가시면 안 됩니다. 남의 교회 힘들게 하지 마시고, 내가 치유를 경험하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해야 해요. 내 상처가 완전히 복음의 능력으로 녹아진 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이웃 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분당우리교회는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교회일 뿐 아니라, 그 상처가 치유되는 기름 부으심이 있는 교회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결단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거예요. 우리가 정말 영적 치유와 회복을 원한다면 무엇을 결단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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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에요.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이라는 완벽한 환경 속에서도 유혹에 넘어졌고, 예수님은 광야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을 이겨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열악한 광야에서도 말씀의 영향을 받으셨기 때문에, 말씀으로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었다. 그런 걸 보면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영향력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의 상황도 마찬 가지예요. 사울 왕의 악한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던 신하들, 다윗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아둘람 공동체. 그런데 여러분 사울의 신하들의 환경을 보면 대박 아닙니까? 궁궐에서 호위호식했으니까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곳에서 지내던 사울이 패망의 수치의 길로 넘어졌고 그렇게 열악한 환경인 동굴에서 아둘람 공동체에서 지내던 사람들은 나중에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요직으로의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거예요. 결국은요? 환경이 아니고, 누구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달린 거예요. 

사실 생각해 보면, 다윗만큼 상처가 많고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또 있겠어요? 저는 간혹 이런 생각을 해봐요. 다윗이 그때에 골리앗에게 덤빌 때 물맷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골리앗한테 엄청 털리고, 자근 자근 짓밟혀서 전치 50주 혼수상태로 병상에 누웠다가 기적같이 살아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때부터 다윗은 죽을 때까지 인생이 피지 않았을까요? 다윗이 나를 위해서 이런 희생을 당했다고 고마운 사람이 어딨냐?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때 다윗이 잘못한 거라고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긴 죄 밖에 없잖아요. 골리앗을 물리치고 사울왕과 나라를 구한 죄 밖에 없잖아요? 그것 때문에 이렇게 살해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다윗이에요. 이게 얼마나 모순이에요? 이런 모순이 실존하고 있다는 거예요. 회사 살리려고 애썼다가 상처받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세상은요? 이 못된 사울 왕이 버티고 있는 것과 같아요. 교회는 안 그런 줄 아세요?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 어리바리한 신학교 신입생으로 들어갔더니 선배들이 기숙사에서 처세술을 가르쳐주고 있더라고요. 교회에서 생존하는 법. 그중 하나가 기억에 남는 굉장히 중요한 처세술인데? 교육 전도사들이 간혹 새벽기도나 수요예배를 맡을 때의 지침. 1. 설교를 죽 쒀서 안된다. 더 중요한 것, 설교를 잘해서는 안된다. 설교를 죽으면 성도들이 미워하고, 설교를 지나치게 잘하면 담임 목사가 미워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 풍토에 담임 목사에 찍혔다고 하면 살아날 방법이 없으니까 설교를 너무 잘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기가 막힌 이야기 아닙니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 지침이라고 선배가 말해주는 거 아니냐고요. 교회가 이 정도면? 이 악한 세상에서는 얼마나 불의한 일이 많은지 몰라요. 정의가 다 죽고 골리앗에게 짓밟히면 박수받고, 격려받고.. 오히려 나라를 구하고 골리앗을 이기면 그것 때문에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거예요. 오죽하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리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런 악한 세상에서, 불의한 세상에서 상처를 피할 길이 없어요. 설교를 못해도 상처받고, 잘해도 상처받는 게 현실이에요. 저는 우리 교회 모든 교역자들이 이 충고를 받아서 설교를 너무 잘하려고 애쓰는 그런 교역자가 아무도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다윗은 그런 불의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느 날 제가 성경을 묵상하다가 시편 62편에서 깨달음이 있었는데 5절 말씀입니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다윗이 지금 이런 고백을 하는 배경이 어떠냐? 절망적이에요. 이 시편 62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로 인해 왕권을 빼앗은 후에 쓴 시라는 거예요. 세상에 자기 아들에게 쿠데타를 당해서 왕권을 빼앗긴 비참한 상황이에요. 그런 상황 속에서 다윗이 뭐라고 노래합니까? '나의 영혼 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다윗이 그런 절망 구덩이 속에서도 일어날 용기가 생기고 회복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은, 악한 사울이 변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 못된 아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본 것이에요. 하나님이 내게 소망이 되신 다는 거예요. 실제로 그것이 다윗을 회복하게 하는 능력이 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눈물로 부르던 찬송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요즘처럼 뭐 밥 굶지 않고, 아무리 추워도 히터가 팡팡 들어오는 집에서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 틀면 시원해지는 그런 방에서 앉아서 이런 시를 만들면 문학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이 찬양은? 찌그러지는 단칸방에서 자식들이 저녁에 엄마 배고파하면, "일찍 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불렀던 노래 아닙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뭐라고요?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게 상관이 없고, 그런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곳이 하나님 나라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 어르신들이었어요. 그 고백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뭔가? 환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환경 바라보고 거기서 일희일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위로하심.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거기에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고백하신 거예요. 오늘 이런 의미에서 저는 분당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놀라운 다윗처럼, 윗대 어른처럼 환경에 영향을 받아 허덕이는 인생이 아니라,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의 주 관심사가 '보다 근원적인 문제'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 관심사를 바꾸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의 주 관심사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몰두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발견한 것이 뭐냐? 다윗도 한 성질 하거든요. 얼마나 울분이 많았는지 골리앗을 향해 쏟아 놓던 다윗이 억울하게 아둘람 동굴에 갇히다시피 했는데 그곳에서는 다윗의 울분이 느껴지지 않아요. 다윗의 울분을 느껴보시겠어요? 삼상 17: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의 울분이 느껴지세요? "니 까짓게 뭔데 우리 하나님을 조롱하느냐?!"는 거예요. 울분이 막 느껴져요. 그 감정은 굉장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그렇게 온순하던 여학생이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분노를 가지고 결집되니까 그 겁 많은 여학생이 옥상에 올라가더니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여 투신할 만큼의 에너지가 폭발하더라고요. 이 울분의 감정이란 이렇게 무서운 거예요. 경험도 없는 어린 다윗. 정규 군사 훈련도 받지 않은 다윗이 골리앗에게 대들었다가는 맞아 죽을 것이 뻔해 보이는 상황에도 견딜 수 없는 울분이 에너지가 되어서 골리앗을 향하게 되는 거예요. 그 울분이 다윗에게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인생의 고비를 넘기고 동굴에 갇히듯 숨어 있는 다윗에게서 골리앗을 향한 울분이 느껴지지 않아요. 어찌 된 영문일까요? 사람은요? 자기의 주 관심사가 있는 곳에 상처가 있고, 그곳에서 울분이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저는 외적인 것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사람이에요. 누가 못으로 제 차를 긁어놓아도 아무렇지 않아요. 고치지도 않아요. 제가 한국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차를 장만했을 때 얼마나 귀하게 여겼겠어요? 프라이드라는 엄청난 차를 몰고 다닐 때는 3층 빌라에서 사는데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차 누가 가져가지 않나? 그래서 자다가도 일어나서 창 너머로 확인하고 그랬었어요. 그 프라이드를 뽑아서 보름인가 만에 앞을 들이받아서 다 찌그러졌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10년 가까이 타고 남 줄 때까지 안 고쳤어요. 그러고 타고 다녔어요. 나중에는 녹이 슬어 보기 흉해서 사람들이 고리차고 해도 별로 관심이 없어요. 차만 나가면 되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누가 차를 들이받거나 못으로 긁어도 상처받지 않아요. 저를 괴롭히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충고하는데 차 긁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어요. 마음이 있는 그곳에 상처도 있는 거예요. 

외모도 마찬 가지예요. 저는 못 생겼다는 말에 상처가 없었어요. 너무 일찍 포기를 해서 그런지 몰라도.. 외모에 마음이 안 담겨 있으니까 상처가 없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못 생겼다는 말에 자살을 한다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이 머무는 그곳에 상처도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서는 울분이 폭발하고 견딜 수 없는 마음의 분노가 있었는데 자기가 불이익당하는 것, 자기가 억울함 당하는 것에는 상처가 안 보여요.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요? 온통 우리의 관심이 뭘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우리 애 무슨 대학 보낼까? 에만 몰두해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저는 지난 주중에 목사님, 전도사님 700여 명 모여 있는 어느 단체에 설교하러 갔습니다. 돌아오면서 "내가 너무 심했다." 싶을 정도로 심한 말을 많이 했어요. 마음의 울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목사님들 지금 밥이 넘어가십니까? 목사님들 지금 잠이 오십니까? 지금 목사님들 삼삼오오 농담할 때입니까?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주범이 우리라는데!" 그런 울분을 쏟아놓고 왔어요. 왜 그랬을까요? 

칼린 지브란이 쓴 '예언자'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을 다 인정하지 않지만, 그 책을 펼쳤을 때 나오는 문구 하나가 제 마음을 후벼 팠어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화살을 꽂고 태어났나 보다 빼려고 해도 아프고 가만히 두어도 아프다" 이 글을 보고 제가 트위터에 이런 글을 썼어요. "이 시대에 목회자로 살아가는 저의 아픔을 이것보다 잘 표현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로 서 있는 것 자체가 아파요. 사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아프지 않았어요. 저는 사춘기 때 명랑소년이었어요. 잘 까불고 잘 웃기고, 친구 많고, 인기 많고 그런 분위기 메이커였어요. 잘 놀았어요. 친구 좋아하고.. 그런데 여러분 제가요 목사를 안수를 받는 그때부터 내 가슴에 화살이 하나 꽂혀 있어요. 어떤 면에서 마음이 행복하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복음으로 행복이 분명 내 안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화살이 꽂혀 있는 것처럼 불편해요. 이게 아파서 빼려고 해도 아프고, 그냥 둬도 아파요. 개척 초기에 30명 모일 때도 아팠고, 지금 2만 명 모이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지금도 아파요. 제가요 작은 교회를 할 때는 아프다가 큰 교회를 하면서 아프지 않다면 저는 삯꾼이에요. 

저는 제 운명을 압니다. 죽을 때까지 아플 것 같아요. 하나님 나라 가야 이 아픔이 안 아프지 않을까요? 그런데 지난여름에 책을 읽다가 이런 저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는 문장을 발견했어요. 오스왈드 챔버스라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책을 쓴 분이 이런 말을 했더라고요. "아픈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것에 감사하라." 제가 그 대목을 읽는데 눈물이 핑돌더라고요. 저의 이 아픔이 이 땅의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이 땅의 교회가 회복되는 일에 쓰일 수만 있다면 저의 아픔을 사용해 주시기를... 제가 이 아픔을 피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복 받아 보자. 예수 믿고 돈 많이 벌어보자. 예수 믿고 성공해 보자."라는 이런 데다 마음을 쏟으면 상처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것, 보다 더 본질적인 것. 하나님의 영광, 그의 나라, 공동체를 향한 가슴 아픔 것으로 우리의 관심이 옮겨질 때에 사울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저는 7월 1일 설교 이후 인터넷이 들끓을 때 혼미해졌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우리교회의 일이 바깥에 들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데.." 제가 너무 혼미해져서 거제도로 내려갔어요. 머리 좀 식히려고 혼자 내려갔는데 둘째 날 아침에 장사도에서 관광객을 따라 호수를 돌다고 두 군데에 제 눈이 꽂혔어요. 세상에 그 쪼그마한 섬에 학교가 있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다른 관광객들 다 가고 그 학교를 다시 들어가 봤어요. 교실 딱 하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장사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까 거기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이 1900년대 초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전 주민이 제일 많이 살았던 때가 14 가구. 80명. 하나씩 하나씩 뭍으로 가고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학생이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68년에 분교 형태로 개교를 해서 91년까지 45명의 학생을 배출했다고 해요. 그랬다면 일 년에 몇 명 배출했을까요? 그런데 제 마음을 뜨겁게 한 것이 거기에 육미조 선생님이라는 분이 장사도 분교로 전근을 오셔서 그 분교에서 얼마나 아이들에게 헌신을 했던지 거기에 공덕비가 세워져 있더라고요.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냐? 이분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아동 문학가!" 이게 얼마나 마음이 벅찬지, 마음이 너무 뜨거워졌어요. 그리곤 맨 마지막 코스에서 제 걸음을 멈추게 한 곳이 있는데 교회가 있더라고요. 지금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팻말과 교회 사진이 하나 있더라고요. 얼마나 교회가 쪼그만 한지 제 눈에 두세 평 정도 되었을까요? 거기에 성도가 몇이나 되었을까요? 제가 발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 다 가는데도 발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이런 곳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전 주민 다해서 80명인 그곳에서 누군가는 그곳에서 청춘을 바치고, 누군가는 거기서 인생을 걸어서 아이를 교육하고, 누군가는 거기서 말씀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고 오늘 우리가 복음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니까 발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거기에 한참 앉아 있었어요. 거기서 울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밝히 보이는 거예요. 뜻하지 않게 세상에서 들춰진 것은? 다른 게 아니고 7월 1일에 제가 선포했던 하나님 앞에서의 선포가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쐐기를 박아 주시는구나! 더 이상 내가 물러서지 못하도록 하시는구나!라고 깨달았어요.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누가 무슨 칭찬을 해도, 누가 무슨 욕을 해도 상처가 되지 않더라고요. 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났거든요. 

2박 3일 생각하고 내려갔는데 바로 짐 챙겨서 올라왔어요. 왠 줄 아세요?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이유를 알게 되니까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더라고요. 우리 가요? 누가 내 욕하나? 누가 날 오해하나? 이런 일에 몰두할 때 상처를 피할 길이 없어요. 눈을 더 높은 곳으로 돌리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하나님 뜻을 생각한다면 사람이 내게 상처 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거예요.

 

오늘 말씀을 저는 이렇게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상처를 피할 길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세상의 영향력 아래에서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시고, 너무나 사소한 내 관심사가 이 사소한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이 땅에서의 교회의 회복. 이런 본질적인 것으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질 때 사울이 주는 상처는 피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이 땅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지침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랜만에 이 찬양 부를 때, 복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기 원합니다. '수많은 무리 줄지어 그분을 보기 위해 따르네..' 2절에 보니까,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나의 소망이 끊어질 때 어떻게 하라고요? 삶의 주관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이 찬양을 부를 때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 찬양 : 수 많은 무리 줄 지어 + 예수의 이름으로 후렴 ]

"2절을 부르기 전에 자기를 생각해 보고, 자기를 돌아보세요. 왜 맨날 아파야 해요? 왜 만날 상처받아야 해요? 왜 그까짓 사왕의 공격 앞에 날마다 후 달리며 살아야 하나요? 우리의 관심사가 거기만 머물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누가 나 욕하나 이런 거 뒤지라고 저 목사 세운 거 아니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더 큰 거 바라보고, 하나님의 크시 은혜를 사모하시면서 2절의 가사 그대로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나의 소망이 끊어질 때 다윗처럼 우뚝 서서 삶의 주관자 되시는 그분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찬양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찬양가운데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함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불의한 세상에서 상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날마다 나를 괴롭히는 사울왕이 날마다 내 주위에서 어른 거리고 있는데 오늘 주신 말씀이 내게 능력이 되시고, 오늘 주신 말씀이 내 삶의 지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수가 날 향해와도 쓰러지지 않겠노라는 선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선포되도록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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