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story/이찬수목사

이찬수 목사 설교문 I 다니엘 1장 1-7절 I 악한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 I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by №1★↑♥ 2024. 2. 4.

이찬수 목사 설교문, 다니엘 1장 1-7절, 악한 세상에서 믿는 자로 선다는 것,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다니엘 1장 이찬수 목사 설교

악한 세상에서 믿는 자로 선다는 것

-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

 

이번 여름에 다니엘에 대해서 묵상하면, 새롭게 깨달은 말씀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가슴 벅찬 깨달음의 시간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사실, 이 하나님은 어린 청소년의 나이로 감당하기 힘든 너무 벅찬 가슴 아픈 일들을 겪었던 인물 아닙니까? 조국은 망해버렸고, 어린 나이에 원수의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고, 감당하기 힘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버린 다니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결코 흔들림이 없는 중심을 가지고 난간을 잘 헤쳐나갔던 인물이 다니엘이라 할 수 있어요. 

그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갔던 악한 나라 바벨론의 환경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모습과 너무 많이 닮아 있다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이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흔들림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를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여러 책들을 접하면서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라는 제목이 함축적으로 너무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아예 이번 특새의 주제를 이 책에서 뽑아 왔어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는지 몰라요. 그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COUPANG

www.coupang.com

 

지금 우리는 망가질대로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시대의 도덕은 겉잡을 수 없는 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예전에는 창피해서 쉬쉬하던 일을 요즘은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닌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다니엘서에서 우리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하는 핵심은, 
지독히 불경건한 문화 한 복판에서 다니엘이 어떤 삶의 본을 보여주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교훈이다.

 

너무 동의가 되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창피해서 말할 수 조차 없던 일들을 요즘은 연예인들이 떠벌리고 다니는 시대를 살았던 다니엘이 어떻게 그 시대를 잘 살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굉장히 많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응형

 

 

그래서 첫 시간으로 다니엘 1장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니엘 1: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여기 보니까, 다니엘서는 굉장히 민족적인 위기와 비극으로 시작되는 말씀이에요. 특히, 앞부분에 나오는 이 말씀.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가 의미가 있는 말씀이에요. 유다 왕 여호야김이 누구냐? 종교개혁을 일으킨 요시야 왕의 아들이에요. 요시야 왕은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인정해 주시는지, 열왕기하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하나님께 이런 평을 들을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왕입니까? 특히 요시야 왕은, 말씀을 소중히 대했던 왕으로 유명해요. 열왕기하 22장에 보면, 요시야 왕이 대제사장 힐기야를 통해서 율법책이 발견되는 데, 그것을 들려줍니다. 그랬더니 율법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 왕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새번역입니다. 열왕기하 22:11, 왕이 그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는, 애통해하여 자기의 옷을 찢었다 

저나 여러분이 말씀 앞에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 혼탁한 세상을 살다보면 넘어지고, 자빠지고, 죄짓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들려지는 말씀 앞에 반응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우리가 아름다운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훌륭한 아버지를 둔 자가 여호야 김 왕인데, 불행하게도 이 아들 여호야 김은 완전히 다른 인생입니다. 예레미야 3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여 주시는데 그 말씀을 받는 여호야김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예레미야 36:23,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이어지는 24절을 보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예레미야 36:24,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한 마디로,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여호야 김 왕은 말씀의 영향을 전혀 받지 못하는 그런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강대국 애굽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기를 원했던 왕이 여호야 김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상황에 더 많이 휘둘리던 인물이었다. 이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분명히 교회를 다니는데,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고 다니면서도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기보다 상황, 유력한 사람. 오늘 예수 믿는 우리들 진짜 자중지란 해야 합니다. 허구한 날 보이는 매체, 어떤 글, 어떤 사상, 어떤 이념. 이미 그렇게 확고해진 세상의 것들로 세상이 고정되어 버리고 결정된 자기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들여서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냐고요? 말씀이 내게 어떤 상황보다 중요한 영향력이라고 한다면, 어제까지 옳다고 믿었다고 해도 오늘의 말씀 앞에 오늘 내가 교정되어지고, 옷을 찢고 늘 새롭게 새롭게 변화되어야 하는데 참 이게 가슴 아픈 현실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다니엘 1:1에 '유다 왕 여호야 김이 다스린지 3년이 되던 해에..'로 시작하는 것은? 왜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악한 바벨론에 나라를 빼앗기는 그런 수모를 겪게 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 아닌가요?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겉으로는 택한 백성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지만, 사실은 말씀의 영향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든 그런 태도가 나라가 망해버리는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표현이 바로 1절의 앞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다니엘서를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매일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나는 누구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되뇔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엇의 영향력을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말씀이 선포될 때에 요시야처럼, 자기 옷을 찢으며 애통해하는 반응을 보이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여호야 김 처럼 면도카롤 말씀을 찢어가지고 화롯불에 던져 버리는 모습입니까? 오늘 이 시대는 설교의 홍수예요. 들려지는 말씀 가운데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1절이 주는 메시지가 계속 되뇌어 지기를 바랍니다. 

 

 

​ ​

 

 

다니엘은 어떻게 적국인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도 흔들림 없는 견고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다니엘 1장을 살펴보니까, 다니엘이 가졌던 두 가지 태도. 악한 세상을 향한 다니엘이 가졌던 반응 가운데서 우리가 습득해야 할 두 가지 모습이 있다는 거예요.

 

1.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지키기

첫번째가 뭐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지키기예요. 내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런 맥락으로 본문을 보니까,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왔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은, 목표가 딱! 하나예요. 바벨론 문화로 세뇌시키기. 겉 보기에 바벨론의 포로 정책이 세 가지었는데? 하나는, 유능한 포로들을 잡아서 바벨론의 문화와 언어를 가르치는 거였고, 두 번째는 포로들에게 과분한 대우입니다.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제공하는 유화정책을 썼습니다. 다니엘 1:4-5, 4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와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5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굉장한 유화 정책이에요. 학문을 가르치고, 왕의 음식을 먹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한 의도가 뭐냐가 세 번째 정책에서 나타납니다. 이름을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일본도 우리에게 그랬듯이, 이름을 바꾸게 하는 거예요. 다니엘 1:7. 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인데, 바벨론이 바꾸길 원하는 벨드사살은, '벨이여 나의 생명을 보호하소서.'인데, 여기 나오는 '벨'은 바벨론의 주신 '마르둑' 신을 의미한다는 거예요. 다니엘의 세 친구 이름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냐'는, '여호와가 은혜를 베푼다.'는 뜻인데, 바벨론이 고치라고 한 '사드락'은, '아쿠의 명령'. 여기의 '아쿠'는 달의 신을 가리킨데요. 그런가 하면,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인가?' 그들이 요구하는 이름은, '메삭'으로, '누가 아쿠의 신인가?'  마지막으로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신다.'인데, '아벳느고'는, '느보 혹은 느고의 종'이라는 뜻으로 '느보'는 '마르둑' 신의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바벨론이 바꾸기를 원하는 이름의 공통점이 뭐예요? 바벨론이 섬기는 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거예요. 원하는 대로 고급학문을 가르쳐주고, 원하는 대로 왕의 음식을 제공할 테니 마음껏 누리라는 거예요. 멋대로 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저는 이 바벨론의 정책이 너무 두려워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과 어른들에게서 보여지는 무서운 세상의 메시지가 딱! 그와 같거든요. 매력적인 타이타닉 영화. 전 세계 사람들이 열광하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첫눈에 반한 두 남녀가 마차 안에서 성관계를 갖는데 습기가 꽉 껴 있는 유리로 손이 내려오는 그 장면이 오래 잊히지 않는 거예요. 큰일 났다. 청소년들이 그런 영화를 보고, 그런 노래를 접하면서 너무너무 매력적인 데 은근하게 스며 놓는 메시지가 뭐예요? '사랑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그날 그 자리에서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관계를 가지라.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못 느끼겠느냐?' 우리나라 영화 어떤 영화라도 한 편만 보세요. 욕이 계속 반복됨으로 저에게도 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 같은.. 세상이 노리는 이 시대의 악한 영이 원하는 목표가 뭔지 아시겠어요? 다 누리라는 거예요. 왕의 음식을 먹으라! 왕의 포도주를 마시라. 대신 이름만 바꾸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만 네가 포기하라! 이게 세상 아닙니까? 마치 창세기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게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이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이렇게 문화를 세뇌시키기를 원하는 바벨론의 정책에 대하여 다니엘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아십니까? 두 가지로 대응하는데요, 첫째로 이름 바꾸기에 대한 단호한 거절이에요. 환관장의 요구에 대하여 다니엘의 단호한 거절을 보세요. 다니엘 7:15, 나 다니엘이 중심에 근심하며 내 머릿속의 환상이 나를 번민하게 한 지라; 다니엘 8:1, 나 다니엘에게 처음에 나타난 환상 후 벨사살 왕 제 삼 년에 다시 한 환상이 나타나니라; 다니엘 8:15, 나 다니엘이 이 환상을 보고 그 뜻을 알고자 할 때에 사람 모양 같은 것이 내 앞에 섰고

여러분 지금 이름 바꾸라는 요구에 대하여, 결의 찬 다니엘의 대응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다니엘의 두 번째 대응이 무엇이냐? 다니엘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포로로 잡혀 온 주제에 왕이 자기가 먹는 음식으로 베푸는데, 그것을 거절하는 거예요. 그리고 더 무례한 게 뭔가요? 다니엘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왕의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는 무례함 아닙니까? 그런데, 다니엘이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까, 두 가지로 해석하는 것을 봤어요. 첫째로, 그 당시에 왕의 포도주와 음식은 먼저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이기 때문에 그거를 먹으면 자신이 더럽혀진다고 해석하는 게 하나고요. 두 번째, 다니엘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하는 행위 속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최고의 자리에 두겠다는 결단이 포함되어 있다는 거예요. 무슨 말씀인가 하니, 다니엘의 입장에서 왕이 준 음식을 먹는다는 건? 바벨론 왕을 하나님 버금가는 그 이상의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왕의 음식을 먹는 것은, 타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뭐가 옳은지 다니엘만 알고 누가 알겠어요? 여기에서 뭘 알아야 하는지 아세요? 세상이 준다고 넙죽넙죽 받아먹었다간 큰일 납니다. 너무나 곤욕을 치르고 있는 정치가, 경제인들, 심지어는 목사 다 이거 아니에요. 준다고 넙죽넙죽 받다가 탈 나서 문제 생기는 거 아니에요. 긴장하셔야 해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가 되고 나니까 공짜로 준다는 게 엄청 많아요. 오라는 데도 많고, 선물 주겠다는 데도 많고 그거 준다고 넙죽넙죽 받아먹다간 내 인생 끝난다는 걸 다니엘을 통해서 자각해야 한다는 거예요.

20-30년 살고 나니까 마누라는 여자스럽지도 않고, 자다가 머리 도장 찍힌 잠 옷 바람으로 나오고 그러는 데 비해 회사에서 제공하는 이방 여자의 모습은 너무 매력적이고, 이런 여자들과 연애 한번 해보고 싶다고 넙죽넙죽 넘어가다간 나중에 다 망하는 거예요.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려는 것 딱 하나예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그게 뭐가 중요하냐 엿 팔아먹고, 왕의 음식과 왕이 포도주로 즐기고 누리고 살거라. 다니엘은 이걸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거예요.

 

 

 

​ ​

 

 

그런가 하면, 다니엘이 두 번째로 어떻게 그렇게 혼란 세상 속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었느냐? 그의 두 번째 대응은? 

2. '하나님의 주권' 인정하기

적국에서도, '하나님의 주권' 인정하기예요. 이게 뭐냐? 겉으로 보기에는 정복자 느부갓네살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현실이에요. 그런데 다니엘서를 보면 슬쩍슬쩍 끼워 넣는 메시지가 있는데 그게 뭐냐? 다니엘 1:1-2, 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상을 에워쌌더니 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겉으로 보기에는 바벨론의 강력한 권력자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파워로 자기 조국을 망하게 만들었고, 자기를 포로로 끌고 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다니엘은 하나님의 주권.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 하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8-9절입니다. 다니엘 1:8-9,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 좋은 환관장을 만나서 호의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환관장의 마음을 흔들어 주셨다는 것이에요. 그런가 하면 17절도 마찬가지예요. 다니엘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겉으로 보기에는 왕이 주는 고기를 거절하고, 채소 먹어서.. 역시 두뇌회전에는 채소가 역시 최고야! 세상은 그렇게 분석을 할 거예요. 그런데 다니엘이 여기서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학문과 환상과 꿈을 깨닫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이나 건강이나 뭐라도 누군가에 자랑을 할 때에는 반드시 그 자랑의 배후에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제가 설교 중에 분당우리교회를 자랑하고, 제가 뭘 했다고 자랑하고 선포할 때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메시지 이면에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고백이 없다면 그건 설교도 아니에요. 저는 여러분이 내면에서 다니엘처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많이 드러낼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이게 다니엘이에요. 저는 1장을 보면서, 장마철에 온 세상이 먹구름으로 흑암이 진동을 하는데.. 저기 구름 너머로 한 줄기의 빛의 신비로움을 경험할 때가 있잖아요? 그때 전율을 느껴요. 아무리 세상이 흑암으로 덮여 있다 할지라도,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할지라도 태양이 사라져 버린 것 아니라, 저 먹구름 너머에 장렬하는 태양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눈으로 보기에 적국 바벨론의 포악한 권력자가 다스리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에게는 하나님의 주권. 오늘도 하난임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오늘도 하나님은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 이런 생각을 가진 다니엘이니까, 포로로 끌려갔다고 해서 위축되겠어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인생은 해석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다니엘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인생을 해석할 수만 있다면, 제일 좋은 게 뭔지 아세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제가 20대 초반에 쓰레기통 뒤지고, 변기청소하고, 세탁소에서 일했던 것들이 은혜받기 전에는 다 수치였어요. 제가 미국 가서 영어도 잘 못하는 것이 너무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는데, 세상에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은혜를 받고 나니까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그 이십 대 때 쓰레기 뒤지고 하지 않았다면 제가 이 자리에서 목사하고 있었겠어요? 영어를 잘했으면, 뭐 하러 한국 왔겠어요? 미국에서 살지.. 내가 가진 모든 약점, 내가 가진 모든 연약함을 재료로 쓰셔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인생은 해석이에요. 

 

강영우 박사님은 중학교 재학 중에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을 맞아 실명을 하게 돼요. 여러분 날 때부터 보이지 않는 분도 고통이 크겠지만, 멀쩡히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실명한 입장이니까 얼마나 절망적이었겠어요? 그런데 어릴 때 강영우 박사가 믿음이 좋아서 실명하는 과정에서 2년을 하나님께 기도했데요. "하나님 눈 좀 고쳐주세요." 하나님 고쳐주시지 않았어요. 안 고쳐주실 정도가 아니라, 약간 남아 있던 시력마저 꺼 버렸데요.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하나님 원망하고, 하나님 불신하고 자기 인생을 비관하는 쪽으로 갔을 텐데 이 어린 강영우 학생은 그러지 않았어요. 오늘 본문으로 말하면, 다니엘이 가졌던 하나님의 주권을 이 어린 소년이 가졌어요. 여기에 무슨 뜻이 있겠지.. 그래서 중학교 때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몇 년 뒤에 점자로 시험을 봤는데 우리나라 최초랍니다. 연세대학 교육학과 입학하고, 더군다나 단과대학 전체 수석을 차지하는.. 그리고는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고, 미국 연방 최고 공직.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정책 차관부까지 가게 됩니다. 어느 분 글에 보니까, 군대로 보면 별 4개 급이레요. 그분이 쓴 책에 보니까,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며 이런 회고를 하고 있더라고요. 

 

내가 위기에 섰을 때, 하나님이 만일 Yes로 내 눈을 회복시켜 주셨다면, 
나는 아마 고작 노동자로 인생을 끝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게 시력 대신 꿈을 주셨다.

 

여러분 지금 이 분이 노동자를 폄하하려고 이런 말하는 건가요? 아니에요. 포인트는 그거예요. 완전한 절망. 그 완전한 절망 가운데서도 일하시는 하나님. 꿈으로, 비전으로 다가오시는 그 은혜가 너무 벅차니까 이런 고백을 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그 글을 보면서 앞에서 인용했던 책,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거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는데 명언이 있어요. "다니엘은 국가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통치라는 렌즈로 바라보았다." 하나님의 통치라는 렌즈로 바라보니까, 강영우 박사와 같이 시각을 잃어버리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또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그런 놀라운 자리에 서게 된 것 아닙니까?

결론을 이렇게 맺기 원합니다. 그 책에 보니까, 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자, 이제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의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가? 솔직히 말해보자.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바벨론보다 작을까 봐 두려워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대놓고 말하지 못했지만, 우리의 감정과 행동으로 말할 때가 얼마나 많지 않았는가?" 여러분 반성하면서 되돌아보아야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의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비록 우리가 요시야처럼 말씀 앞에 옷을 찢으며 회개하는 반응은 보이지 못했지만.. 어쩌면 우리가 여호야 김처럼 말씀에 면도칼로 찢어 화로에 던져 넣는 태도와 같이 말씀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살았다 할지라도 희망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희망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여호야 김이 비록 강대국 애굽을 더 의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면도칼로 베고, 화롯불로 던지는 악한 일을 저질렀지만 그러나 여러분 예레미야 36장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예레미야 36:27, 27 왕이 두루마리와 바룩이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기록한 말씀을 불사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8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여전히 말씀하시는 하나님. 돌이키기만 하면, 자기가 불태워 버린 말씀을 다시 기록케 하시고, 들려주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희망이 되는 줄 믿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고요. 이 악한 바벨론에서 위축되고, 숨기고,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비굴하고, 하나님의 주권은 보이지 않고 먹구름만을 보며 맨날 비관하는 인생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담아 이 찬양 부르기 원합니다. '피난처 되시는 주 예수 영원한 승리의 왕' 이거 중국 크리스천들이 부르는 찬양이라고 합니다. 아직까지도 종교의 탄압이 여전한 그 나라에서 '전쟁은 주님께 속했네, 승리는 우리의 것' 오늘 이 찬양을 부르는 동안에 여러분 내면에 비굴하고, 우울하고, 패배감 짖고, 늘 안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단번에 몰아내시는 성령님의 역사와 능력을 경험하는 찬양과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