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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 프로젝트/가스펠프로젝트-신약1

[ 신약1-1 ] 족보에 드러난 약속 I 마태복음 1:1-17 I 이재훈 목사

by №1★↑♥ 2021. 5. 14.

 

마태복음 1:1-17

족보에 드러난 약속

 

가스펠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예배당 예배에 나오지 못하는 차세대 자녀들에게 부모가 직접 교사가 되어서 말씀을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실행합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신앙을 가르친다는 것 만큼 큰 축복이 없습니다. 이 3개월 동안 어린아이에서부터 대학청녕에 이르기까지 같은 말씀으로 나눌 때에 가정이 교회가 되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3개월 동안 매주 차세대 목회자들이 주일 예배에 나와서 잠시 그 주의 내용과 활동을 계속해서 안내해 주실 것입니다. 수고하고 있는 차세대 목회자들을 박수로 격려와 축복 해주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성경을 처음 읽어보려고 신약의 첫 장을 읽게 되면, 당황할 수 있습니다. 낯선 이름들이 계속 등장하며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이 말씀이 마음에 전혀 와 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조상의 혈통을 기록한 족보가 성경을 처음 읽는 유대인이 아닌 다름 사람의 입장에서는 매우 낯설고 불필요 해보이기 까지하는 기록이지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기위해서는 반드시 정리해야 할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복음서는 네 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360도 전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어떤 물체나 지역을 바라볼 때, 동서남북의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면 온전한 모습으로 볼 수 있으며, 빠짐 없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사복음서를 통해서 전 방향으로 다각도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복음서는 각기 독특한 시각으로, 또 전혀 다른 대상을 향하여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에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각 복음서의 서문에 해당하는 1장 혹은 2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앞으로 전개될 복음서의 내용이 어떠한 특징을 갖는가?하는 것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기대감을 가지고 앞서 나오는 복음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족보로 시작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예수님이 곧 복음이기에,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곧 복음을 깨닫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조상의 족보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두 부류의 사람일 것입니다. 

  첫번째의 사람은, 과거에 조상을 통해서 자신을 자랑해보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조상의 족보를 읽을 때는 자랑스러운 조상만을 찾을 것입니다. 만일 그 족보에 자랑스럽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족보를 덮어버리거나 혹은 알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가문이던지 그 족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자랑스러운 조상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족보를 가지고 자신을 자랑하려는 사람은 결코 수치스러운 과거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번째 부류의 사람은, 조상의 족보를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족보를 대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자랑스러운 조상이나, 혹은 자랑스럽지 못한 조상 상관 없이 관찰하려고 할 것입니다. 

 

알렉스 헤일이라는 사람이 쓴 유명한 드라마가 있지요.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 오대양육대주를 다니면서 노예의 삶을 추적한 사람입니다. 그 '뿌리'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이 조상들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뼈아픈 실패이건, 아니면 수치스러운 과거이든 모든 것을 지켜야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입양된 분들은 성인이 되어서 친부모를 찾아나서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미움 혹은 복수심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부모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성공적인 부모이든, 실패한 부모이건, 자랑스러운 부모이건 수치스러운 부모이건, 부모의 현 상태와 상관없이 부모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부모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은 목적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 나오는 1장의 족보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소개하는 아주 중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마태복음이기에 유대인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족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도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 이것이 헬라어를 직역한 순서입니다. 대부분의 한글 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계보라, 세계라' 이렇게 번역되곤 합니다. 연대 순으로 아브라함이 먼저이기에 다윗이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번역하지만 헬라어 성경은 다윗을 먼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것이 먼저 등장합니다. 족보라는 헬라어는 '게네시우스', '게네시스'라는 단어에서 영어의 'Genesis'가 파생됩니다. '시작'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게네시스'는 시작으로 번역되는 Genesis로 사용되고, 'Origin'으로 어떤 삶의 기원으로 'genealogy'로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성경은 두번째 의미로써 족보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 그분은 바로 다윗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족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먼저 설명드리면, 구약에서 족보가 많이 나옵니다.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족보가 언급되면 빨리 넘어가려는 습관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족보는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요약하는 내용이요, 또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려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약역사를 보면서 족보가 나왔다하면, '아!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구나!'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이 지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족보가 나오고,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실 때도 그 직전 창세기 11장에서도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고 하면서 족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것이고 족보가 나오는 시점마다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족보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람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여는 문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소개할 때도 데라의 족보를 열거하면서 아브라함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약이 기록되어 왔기 때문에 구약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 있어 족보란 어느 지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되새기며, 또 미래의 역사를 내다보는 습관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장에서 족보를 서술한 것은, 유대인들의 정신을 깨우는 '뭔가 중요한 일이 시작되었구나!'는 것을 알리는 중요한 시그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족보는 역사의 정당성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어떤 가문이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족보의 기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족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라는 사람도 자신의 자서전을 기록할 때도 마태복음과 같이 족보를 언급하면서 기록을 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헤롯대왕이 자기의 이름이 유대인의 족보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매우 분노하며 안타까워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돔인과의 혼혈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족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족보를 다 없애버리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그 조상이 누구인지 반드시 추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알고자 하면 조상의 혈통을 빠짐 없이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의 조상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자료는 예루살렘의 성전 기록부에 다 기록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몇해전에 CGNTV가 서서평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 때, 서서평 선교사님이 출생한 지역에서 세례를 받았던 교회를 추적해보니, 서서평 선교사님에 대한 기록이 교회에 있었고,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사생아'로 태어난 분 이었음을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일도 과거에 대해서 정확히 기록하듯이 유대민족은 그보다 훨씬 더 모든 조상의 혈통을 기록해 놓는 습관이 있어다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메시야가 세상에 오셨을 때, 어떤 사람이 스스로 메시야로 인정받기 위해서 스스로 깨닫고, 노력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역사적 정통성과 정당성 속에서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예수님은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누가 질문을 해도 누구 누구의 후손이며, 어떤 역사의 물줄기를 가지고 세상에 오셨는지 말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명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유대문화의 중요성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약속의 핵심은 아브라함과 다윗이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주어 그 아들을 통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 근원 삼으시겠다는 약속이고, 다윗에게는 그 아들의 위를 견고하게 하고, 그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그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졌는가? 아니라는 것이 구약의 역사입니다. 결국 이삭과 솔로몬이 아닌 그 후손 중인 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약속을 이룬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천년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고, 이천년 후에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 천녕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죽었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은 히브리어로 '아들'이라는 단어가 '벤'입니다. 우리 나라 말은 '아들, 손자' 등 표현을 달리 할 수 있지만, 히브리어는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이삭과 솔로몬을 가르키는 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 못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부터 태어난 누군가, 또 다윗으로부터 태어난 누군가를 통해서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내용을 족보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족보는 세 부부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첫째 파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의 족보입니다. 두번째는, 다윗부터 바벨론까지의 다윗 왕가의 족보입니다. 세번째는, 바벨론부터 예수님까지의 족보입니다. 이 세부분이 각기 14대까지입니다. 엄밀히 조사해보면 그 기간 동안에 속한 이들은 14대 이상 더 많습니다. 그럼 뭔가 틀린 것 아닙니까? 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 첫번째와 세번째 파트는 한 사람이 부족합니다. 14대가 아니라 13대가 맞습니다. 그런데 왜 14대라고 우기는가? 우기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앞서 설명드린 '벤'이라는 단어는 1대일 수도 있고, 2대 3대를 생략하고 4대로 넘어갈 수도 있는 벤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족보를 가지고 연대 계산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10대 아들도, 100대 아들도 모두 아들로 불렀기 때문에 얼마든지 족보가 축약될 수 있고 생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가 이 족보를 기록함에는 빠짐없이 한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한 것입니다. 또 14대인데 왜 몇 사람을 뺐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14대로 맞춘데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14라는 숫자가 주는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세부분이 모두 14대라는 것은, 이 모든 세대가 전체가 주는 메시지가 14라는 숫자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14자는 단어로 바꿀 수 있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히브리어 알파벳을 가지고 숫자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우리나라의 ㄱㄴㄷㄹ이라고 하면 ㄱ이 첫번째이니까 1이라 할 수 있고, ㄴ은 2가 되고, ㄷ은 3, ㄹ은 4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4라는 숫자를 단어로 전환하면 '다윗'이 됩니다. 다윗(4+6+4).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 세 세대로 구분될 수 있지만, 전 역사에서 구분되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다윗의 아들로 오시는 분이 예수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어디갔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말에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먼저 언급되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다윗이 먼저 언급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시조였고, 약속의 출발자였지만, 한 나라로써 하나님이 택한 공동체로써의 형태를 갖춘 것은 다윗 시대입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요, 그들의 심벌리컬 한 리더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유대인을 상징하는 별을 다윗의 별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왕 다윗, 그리고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장차올 메시야는 이새의 줄기로, 이새의 뿌리를 강조합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즉, 다윗의 후손중에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 가장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구약을 요약하는 메시지로 세 세대로 구약 역사를 나누고, 이 모든 것이 다윗을 가리키는 것이 그 다윗의 아들이 곧 예수 그리스도요, 그것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해설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유대인들은 족보를 접하면서 해석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족보를 읽으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족보와 대조를 해보았을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으로부터 '아담이 몇세를 살다가 자녀를 낳고 죽었더라 누가 몇 세를 살다가 자녀를 낳고 죽었더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끝은 언제나 죽음입니다.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음으로 끝나는 역사는 바로 아담이 죄를 범하여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서의 족보는 어떻습니까?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엄밀히 말하면 헬라어에서는 '아브라함 이삭의 아버지'는 식으로 되어 있지만, '낳고'로 의역을 했습니다. '낳고 낳고 낳고' 그들이 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과정일 뿐이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족보의 핵심적인 인물은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시는 이를 통하여 오시는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창세기 12장 1-3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핵심은 제일 마지막 구절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 너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키워드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 자신이 속한 가문만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 증거가 이 족보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족보에 여인들이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유대인들은 이 족보를 읽으며 불쾌해 했을 수 있습니다. 당시 여인들은 법적인 지위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은 증거로써의 효력이 없었고, 인구조사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여성으로 태어나신 것이 감사하시죠? 있는 그대로 설명하자면, 그 당시의 여인들은 물건보다는 조금 가치 있지만, 사람보다는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러기에 족보에 여인들이 기록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방여인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더욱 있을 수 없는 것은 그 여인들의 삶이 자랑스럽지 못한 매우 부정한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수치스러운 사건에 연류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여인, 다말. 다말의 남편이 죽었을 때 유대인의 고엘법에 의하면 형제 중 한 사람이 그 여인을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문은 그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말이 창녀로 둔갑하여 시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서 낳은 자녀가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조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역사의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면 대서특필되며,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습니다. 살몬이라는 사람이 이 라합과 결혼하여 태어난 이가 바로 보아스입니다. 그 보아스가 모압여인 룻과 결혼하여 낳은 자녀가 오벳입니다. 그 오벳의 자녀가 이새요, 이새의 자녀가 다윗입니다. 또한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나은 자녀가 솔로몬입니다. 이러한 이방여인들은 룻과 같이 기구한 여인도 있었지만, 다말같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행위를 한 여인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야의 족보입니다. 마태는 충분히 과거의 조상들의 이름에서 더 자랑스러운 이름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더 자랑스러운 조상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수치스러운 기록을 특별히 이 여인들의 이름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자랑하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묻어버리고 자랑스러운 모습만을 나타내는 분이 아니요, 땅의 모든 족속의 복의 통로가 되는 그분은 어느 가정에나 있을 수 있는 수치스러운 죄, 상처, 실패와 결함들 부족함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끌어안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메시야라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족보고 흠 하나 없는, 모든 사람들이 주눅들만한 가문이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이 족보를 접하고 떠났을 수 있습니다. 이 족보를 읽으면서 '예수님이 이런 분이었어? 믿을 만한 분이 못되네?'라고 비하하는 사람이 있다면 평생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시킨다 해도 실제로 세상에는 우리가 흡모할 만한 가문, 존경할 만한 가문은 없습니다. 모두 죄가 있고,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고, 결함이 있고, 수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다 아시기에 "나도 너희와 같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나의 조상도 흠이 많고, 감추고 싶은 수치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가 도리어 하나님께서 너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어 축복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도구가 되신다. 그런 이들을 멀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의인들만을 찾아 구원하시는 이가 아니라 죄인을 불러 의인 삼아 주시는 분입니다." 마태는 그 조상들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그래서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분이 진정 우리의 구세주가 될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아픔, 가문과 조상들의 수치로 인하여 우리에게 내려오는 모든 아픔까지도 다 이해하시는 예수님이심을 이 족보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핵심인물인 다윗,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는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하 7:11-13,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다윗의 몸에서 날 자손이 뒤를 이어 나라를 든든히 세울 것이다.'라는 말씀만 보면 솔로몬 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구절을 보면 솔로몬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보좌를 영원히 세워줄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왕국은 영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의 모든 왕조는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물론 일부 경건했던 왕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바벨론 포로에 이르기까지의 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다윗왕까지 땅의 모든 족속으로 복의 근원되게 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고 또 '다윗~바벨론포로'까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번째' '바벨론~예수'까지는 어땠습니까? 예수님 오셨을 때는 이미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계속주어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주어진 때가 언제냐? 바벨론 포로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소멸된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인가? 생각할 수 있었지만 바벨론 포로의 역사의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하나님은 메시야에 대한 가장 많은 메시지를 계속해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가 지나고 로마의 시대,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14대, 14대, 14대 끝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기다리던 다윗의 아들 예수가 오셨다가 마태가 유대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시점은 이스라엘 역사의 절망의 시대였스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여길 때 였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인간의 실패속에서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 이유가 더 증거되는 것입니다. 별은깊은 어둠 속에서 더 빛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철저한 실패속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 다윗에게 주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족보를 통해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1-11절까지 쭉 나열된 기술방법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 당시의 여인들이 보았을 때 굉장히 섭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가 남자를 낳은 것은 여성을 무시하는 문화였기 때문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을 이어받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와도 아담의 뼈로부터 나왔잖아요? 사실 아담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첫째 아담안에서 죄의 유전을 받은 타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기술 방법은 여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낳았냐? 유다가 다말에서 낳았고, 살몬이 라함에게서 낳았다는 것은 남자가 여인으로부터 낳은 것으로 기술되는 것은 부정적이거나 특수한 방법으로 낳았을 경우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런 방식으로 기술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예수님의 탄생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16절의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야곱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첫번째, 두번째 방법도 아닌 세번째 방법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번째의 방법대로라면 '예수님이 첫째 아담에 속한 죄의 유전을 받은 또 한 사람의 죄인으로 탄생한 것이 됩니다.' 두번째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면, 부정한 관계 혹은 특수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부정한 관계속에서 특수한 관계속에서 나신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가지가 아닌 마리아에게 태어났다는 것은 동정녀의 성령의 잉태로 태어나신 죄가 없으신 분으로 나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 안에서 죄인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죄가 없는 새로운 인류의 시작으로 나신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 유일하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고, 또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아브라함이라는 조상이 있어 유대인의 혈통을 입고 오셨습니다. 또한 다윗의 후예로써 왕의 혈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다말과 라합과 룻과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같은 이방인의 후예이기도 합니다. 경건한 조상을 둔 경건의 피도 있지만, 그는 부정한 자들의 조상을 두어서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족보는 모든 사람의 구세주가 되기에 합당하신 예수님, 그분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족보를 받아든 유대인들은 더 기대감을 가지고 나머지의 복음서를 읽어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오래전 약속과 계속된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다시오실 분이십니다.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가고, 그분을 더 사랑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우리 모든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계신 주님 역사 속에 모든 약속을 이루며 오신 예수님, 아직 이루지지 않은 약속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땅의 모든 족속을 복의 근원삼으시고 또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영원한 나라의 백성삼으시는 은혜를 허락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살아계신 예수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소망을 바라며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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