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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 프로젝트/가스펠프로젝트-신약1

[신약1-8]가스펠프로젝트 I 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 예수 I 요한복음 3:25~30 I 이상준 목사 I 온누리교회

by №1★↑♥ 2021. 6. 22.

요한복음 3:25~30

요한이 증거 한 그리스도 예수

 

  오늘은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고백하고 전한 본문의 내용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제자들의 문제제기

  예수님과 요한 사이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오늘 본문의 바로 앞부분인 24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이다.' 즉, 요한이 여전히 세례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예수님이 세례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추종자들 사이에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요 3: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 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정결의식 논쟁이라는 말은, 문맥상 세례에 대한 논쟁 같습니다. 이전에 요한이 베풀었던 회개의 세례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베풀고 계시는 죄 사함의 세례. 이 사이에 비교 논쟁이 붙은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까,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해서 요한의 제자들이 이 상황을 묵과할 수 없어서 스승인 요한에게 자신들의 어려운 심경을 요한에게 토로하게 됩니다.

  요 3: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선생님이 도와주시고, 함께하시며 격려함으로 세워주신 분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일종의 배신감. 자신들의 사역에 대한 위기의식 같은 것이었죠? 제가 밴쿠버에서 한 성도님께 안타까운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민 와서 열심히 준비해서 코인 빨래방을 시작을 한 거예요. 사업 하나가 성공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던 와중에 한국에서 지인이 와서 일할 때가 없으니까, 자기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주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아무런 상의도 없이 길 건너편에 그 지인이 코인 빨래방을 시작한 거예요. 그것도 더 좋은 설비에, 더 좋은 서비스로.. 그러니까 고객들이 전부다 그리로 몰리는 거겠지요? 여러분 요한의 제자들이 느끼는 상황 판단이 같은 것입니다. 이 상황을 그들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말라기라는 선지자 이후에 400년 만에 나타난 선지자가 요한입니다. 제2의 엘리야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최고라고 생각했던 자신들의 스승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어느 날 나타난 갈릴리 시골 청년 예수가 주가를 올리고 있어요. 그것도 요한의 특허라고 할 수 있는 세례까지 베풀고 있어요. 여러분 세례 예수라고는 안 하잖아요? 세례 요한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세례 빼면 요한이 뭐가 됩니까? 자!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경쟁구도인 세상에서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의 애정과 관심을 집중받는 것,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지요. 자기보다 더 어리고, 더 귀엽고, 더 경쟁력을 가진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 이 모든 것은 다 날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아빠, 엄마의 관심을 동생에게 빼앗긴 첫째들의 마음을 심리학자들이 뭐라고 표현한다고 하냐? '후처를 본 본처의 심정이다.' 그렇게 평생 우리는 경쟁구도에 내몰려서 인생을 사는 거예요. 어렸을 때는 먹을 거 하나에.. 나이가 들어서는 성적 외모, 실력, 사회적 지위, 재력 모든 것을 가지고 사람들의 끊임없는 평가를 합니다. 

 

  저희 집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맛있는 반찬이 올라오거나, 아빠가 퇴근하시면서 간식이라도 사 오시면 서로 더 먼저, 더 많이 먹으려고 난리가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장난감, 옷, 학생이 되어서는 성적, 내가 어느 대학에 들어갔느냐? 직장에서는 누가 먼저 승진하느냐? 누가 더 많은 연봉을 얻느냐? 사회적인 재력, 위치.. 등으로 사람들이 계속해서 경쟁하는 거예요. 이러한 경쟁은 사실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사회에서는 경쟁심이 없다면, 생존력이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되지요. 또 경쟁적인 사람들이 잘 생존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투쟁적인 사람이 되어서 내가 누구랑 맞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그러다보니까, 그 맞붙는 상대가 부모이면 부모라도 이겨야 해요. 아내고, 남편이면 품어주지 않고 이기려 드는 거예요. 물론 세상은 당신에게 누구든지 간에 무조건 이겨야 한다. 끊임없이 세뇌시키고 있지요. 하지만 오늘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심각하게 자신을 돌이켜 봐야 하는 것은, "당신이 지금 예수님과 경쟁하려는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지금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경쟁하려고 했었잖아요? 우리는 그러지 않는가? 신앙이라고 하면서도 우리도 이거 사실 많이 합니다. 기도하면서 '왜 주님이 모든 주도권을 다 가지셔야 합니까? 맨날 모든 게 주님 뜻대로만 되어야 하나요? 제 뜻대로는 안 되나요?' 내가 중심이 되겠다고 싸우잖아요?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때, '겸손히 배우겠습니다.' 그러면 좋은데.. '도대체 뭐 하는 거냐?' 의문을 제기하고 다투려고 하잖아요? 도대체 오늘날 교회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크리스천들은 도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세상의 악과 우리 내면의 죄악의 쓴 뿌리와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인가? 그래서 세례 요한이 명쾌하게 답변을 해준 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고마운 것입니다. 

  요 3:27,..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아주 훌륭한 대답을 해주었어요. 요한이 아무리 대단한 선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감독 아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감독이 선수를 투입하고, 빼는 것은 결정이니까.. 나는 순종하겠다. 그런 고백 아닙니까? 야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투수를 교체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아무리 투수가 잘 던져도 상관이 없어요. 감독의 교체 지시가 있으면 그 손을 공에서 놓아야 하지 않습니까? 투수는 투구에 대한 책임을 지지만, 경기에 대한 책임은 감독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인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큰 그림을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개인의 영광보다 팀의 승리가 더 중요한 것이 팀 스포츠이듯이, 당연히 하나님 나라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맡겨 주실 때, 공을 우리 손에 쥐어주시면서 "몇 회까지는 던질 수 있게 해 줄게~"라는 약속이 없어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요. 그래서 아직 공이 손에 있을 때 열심히 던지셔야 해요. 그러나 갑자기 하나님이 마운드에서 내려가라고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날 당황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신뢰하신다면 순종하십시오. 이런 일들이 사역자나 직장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들에게도 그런 날이 옵니다. '품 안에 있을 때 자식이다'라는 표현. 섭리적인 개념으로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부터 가르쳤던 제자가 자기 자식이 얼마나 이쁜지 자랑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유치원 선생님이 매일 이상한 사진을 하나씩 찍어서 보내는데.. 자기 아들의 최애 우산. 엄마도 안 씌워주는 우산을 유치원 여자 친구에게는 씌워주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엄마들이 자녀 양육에 전심전력을 하잖아요? 그러나 자녀 양육을 멈추고 자식들을 떠나보내야 할 날이 갑자기 올 것입니다. 내려놓으셔야 해요. 그날 당황하시면 안돼요. 순종하셔야 해요. 사춘기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이 저희에게 맡겨주셔서 낮밤 없이 헌신해왔지만 내려놓아야 할 때가 왔다는 뜻 아닐까요?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셔야 해요. 요즘은 사춘기 자녀들 뿐만 아니라 늦은 나이까지 결혼 안 하고 집에 있는 자녀들 많잖아요? 30-40대가 되었음에도 결혼 안하고 같이 지내는 자녀들.. 여러분 갈등하지 마십시오. 싸우지 마십시오. 집안에 있다고 해서 잔소리할 대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셨고 이제 내가 주님께 맡겨드릴 때가 된 것입니다. 

  요 3: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 얼마나 속 시원한 대단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지만, 내가 누가 아닌지를 아닌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제 하 목사님 9주기가 다가오는데 생전에 하 목사님이 교역자들 한 사람씩 만나서 대화하시면 "당신은 담임목사 은사, 부목사 은사, 행정 목사 은사, 당신은 티칭만 해~ 담임목사 안돼~" 이런 얘기하셨어요. 그러면 부목사 입장에서 어느 때가 되면 담임하고 싶잖아요? "왜 저는 안됩니까?" 따지는 분들도 있었어요.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같다면 행복한 경우겠죠. 저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아는가? 그것을 깨닫게 되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어요. 그리고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결혼으로 비유를 합니다.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신부를 얻는 자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곁에서 보며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들러리가 센터에 서서  신랑의 자리에 있으려고 하면 될까요? 결혼식을 망치는 꼴 아닙니까? 내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가 빛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분은 옆에 밀어 두고 내가 한가운데 서서 내가 빛나는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한이 아주 명쾌하게 30절에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를 합니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 고백이 여러분들에게 흔쾌히 받아들여진다면,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주님만 흥해야 합니까? 저는 흥하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흥해야 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여러분들에게서 올라오신다면 아직 이 고백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수록 이 시대를 보면서, 우리의 삶을 보면서 이러한 흐름이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어 보입니다. 오늘날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상상을 초월하지 않습니까? 과학 문명이 발달할수록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점점 커질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유희적 존재(호모 루덴스)로 정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SNS, YOUTUBE, 게임 등 많은 엔터테인먼트가 도대체 누구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인가?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 귀를, 내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콘텐츠, 내 미각, 육체의 오감을 즐겁게 하기 위한 콘텐츠, 모두가 자기만족을 위한 유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를 정의하자면.. 극단적인 나르시시즘, 철저한 자기애(self-love). 타자보다는 자기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한 시대를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삶으로 살기를 원하는가? 기쁘게 살기를 원하세요. 첫사랑 아담을 창조하시고, 두셨던 동산이 에덴이잖아요? 에덴이라는 이름의 어원적인  뜻, '기쁨(Delight)입니다. 기쁨의 동산. 하나님은 우리가 슬픈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정말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원하세요.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 안에 충만케  하시기를 원하시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기쁨은 무엇인가? 삼위일체 안에서 충만히 누리는 자족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은 관계적인 기쁨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관계적인 기쁨을 추구하지 않으셨다면, 왜 굳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겠어요? 하나님이 관계적 기쁨을 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면 왜 수많은 양과 소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관계 회복을 원하셨겠어요? 왜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셨겠어요? 

 

  제가 성경 통독할 때마다 드리는 이야기가, 창세기~계시록까지의 하나님의 로망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이게 천국입니다. 이 천국의 기쁨은 내가 화려한 것에 들어가서 내 인생이 기뻐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기쁨에 최고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계명의 가장 큰 두 가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을 제 문맥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을 기뻐하고 다른 사람들을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쁨이 되는 삶.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인생입니다. 세례 요한이 보여준 인생. 

 

  여러분 구약의 많은 인물들 가운데 완성에 가까웠던 인물 중 하나가 다윗입니다. 다윗을 우리가 예배자로 기억합니다. 예배란 도대체 무엇인가? 예배란 가장 가치 있는 존재이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자기 애에 빠져 있는 사람은 예배자가 될 수 없어요. 어떻게 목동 다윗이 예배자가 되었고, 최고로 찬란했던 한 나라의 왕이었던 사울은 예배자가 될 수 없었는가? 자기애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측면 만이 아니라, 예배자만이 인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다른 사람도 사랑해서 그들을 선한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에 인도자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자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 인도자가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가장 가치 있는 하나님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누굴 사랑할 수 있겠어요? 최고의 존재인 하나님께도 헌신하지 못하는데 누구를 위해 헌실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사울은 예배자도 될 수 없었고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도 될 수 없었어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두려운 것은, 이 사회가 수많은 사울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가 되었어요. 개인적인 기호가 너무 세분화되다 보니까, 다른 사람과의 일치점을 찾기가 너무 어려워요. 혐오와 증오 범죄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우리의 생명과 존재를 왜 허락하셨나요? 목숨 걸고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인생과 생명입니다. 자아실현하라고 주신 것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책이나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중한 인생을 엔터테인먼트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밤새 유튜브하고, 게임하고, 스마트폰 하고.. 세상의 오락과 향락, 물질, 명예에 빠져서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또 정반대로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사랑받고 관심받는 데 있어서는 목숨을 거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래서 관심병이라는 말이 사회적인 이슈입니다. 관종이라는 표현. 내가 관심을 받을 수만 있다면 거짓말도 불사하고, 자기를 부풀리는 과시와 허세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통하면 억울한 거예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많아요. 왜 우리는 21세기에 좋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가면서도 내면의 허기를 다 채우며 살아가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일까? 여러분, 어떻게 살면 될까요? 주님을 위해 사셔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은 내가 중심인가? 타인이 중심인가? 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대일 양육받을 때, 처음으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중심 되신 그리스도' 그걸 인정해야만 다음 진도가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렇다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문화와는 정반대로 가는 거예요. 엔터테인먼트의 시대는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센터에 세우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나를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우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자기를 비우는 겸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어요. 겸손한 사람만이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어요. 여러분 예배는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를 즐겁게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늘날 예배는 "그래~ 넌 괜찮아~ 넌 훌륭해~ 넌 예뻐" 이러한 심리학적 기독교로 전락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애를 충족시키기 위한 자리가 되어 버렸어요. 아니에요. 예배자의 선결 조건은 자기애가 아니라 겸손입니다. 나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하시기 때문에 내  향유 옥합도 깨트려 부어드릴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겸손의 미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데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전부가 사랑한다고 말은 멋있게 하며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지만.. 다 모두가 자기애적인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커플과 가정이 갈등하고 있는지 몰라요. 우리가 자녀들을 정성껏 잘 키웁니까? 그렇게 정성껏 키운 자녀들에게 왜 실망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자녀들을 누구보다 잘난 자녀로만 키우려고 했지, 누구라도 섬길 수 있는 겸손한 존재로 키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애적인 존재로 키웠지,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존재로 키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잘한다~"고만했지, 주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라고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인간을 자기 성취와 자기도취에 빠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에 자기 기만은 자기 절망으로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연초에 한 수험생이 찾아왔어요. 자기 인생이 걸린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불안해하고, 불안하니까 집중이 안되죠. 집중이 안되까 시간이 부족하죠. 그러니까, 몇달 째 예배도 안나오고 더 불안한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열심히 사는데.. 뭐가 그렇게 불안할까요? 여러가지 심리적인 이유, 시대적인 이유 다 들수 있지만.. 정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내 인생이 주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에요. 여전히 내것으로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인 거예요. 내 손에서 내려놓지를 못하니까 벌벌벌벌 떠는 거예요. 사업이 안되고, 진로가 막막하고, 결혼의 문제는 요원하고... 사람들이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거두면 왜 자만해지고, 안일해질까요?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기 때문이에요. 남의 결혼식 가서 내가 센터에 서서 사진찍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참된 겸손이 있다면.. 겸손은 절대 성공한다고 해서 자기 도취에 빠지지 않고, 실패한다고 자기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분이 항상 무게 중심을 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0절의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을 표현한다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흥했다가 쇠하는 존재잖아요. 젊은 날 한 때 건강 자랑하는 거지요. 사회적인 경력 지위도 자랑해도 세월이 지나고 은퇴하는.. 그러한 하강곡선을 그리잖아요. 여러분이 인생의 상승곡선 구간에 있다면, 주님을 위해 숨차게 달리십시오. 그러나 하강곡선의 구간에 있다면 주님을 위해서 내려놓는 것을 또한 기뻐하십시오. 내가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시겠어요? "나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방향(방황) 표지판입니다." 제가 괄호 열고 왜 '방황'이라고 썼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인생은 표지판과 같이 여기 머물리 마시고, 내가 가리키는 예수를 향해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방향표지판이 잘못 오기되어 있거나, 꺾여 있으면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방황하게 만드는..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인생의 주인공이십니다. 방향표지판은 잘 보여야 합니다. 내가 빛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빛나 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기도 멘트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합니다.'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나는 쇠해도 좋습니다. 주님이 흥할 수만 있다면..'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만족시키고, 나의 꿈을 실현하고, 나의 계획을 성취하는 시대 한가운데서 역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시대를 일깨울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참된 영적 리더들로 키울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오 사랑하는 주님, 오늘날 교회가 성공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품으며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시 한번 주 앞에 엎드립니다. 주님은 흥하소서. 나는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빛을 내다가 빛을 발해도 기뻐하고 감사하겠습니다. 고백할 수 있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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