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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 프로젝트/가스펠프로젝트-신약1

[신약1-4]가스펠프로젝트 I 어디에서 예수를 찾는가? I 누가복음 2:41~52 I 이재훈 목사

by №1★↑♥ 2021. 6. 3.

 

누가복음 2:41~52

어디에서 예수를 찾는가?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셨을 때의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13살 부터 성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12세부터 금식을 배우고, 부모님과 함께 절기를 지키며 성인으로써의 삶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살에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의 일은 틀림없이 누가가 마리아로부터 직접 듣고 기록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유월절 절기를 다 마치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일행중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집으로 가던 중에 하루 길을 가고나서야 예수가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시 예수님을 찾아 삼일길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를 찾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 입니다. 

  눅 2:44-45,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요셉과 마이라는 당연히 예수님이 일행중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실 거예요. 어떻게 12살 난 아들이 하루길을 가는 동안 모를 수가 있는가? 밥도 따로 먹고 어디서 뭘하는지 관심도 없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는 풍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전국민적인 절기이기 때문에 집에서 출발할 때는 가족단위로 떠나지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오늘과 같이 여러 길이 아니었기에 틀림없이 큰 무리를 이루고 친척들도 만나고 동료들도 만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도착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가게 되는 것이지요. 

 

당연히 절기를 지키고 돌아올 때는, 많은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내려오게 되고 점점 집으로 가까워질 수록 가족단위로 흩어지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출발할 때는 많은 무리가 떠났기 때문에 예수가 당연히 그 무리중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12살이지만 요셉과 마리에게 신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어야 할 자리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신뢰를 받았던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청소년 시절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록으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전에 첫번째로 공식적으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이 내용이 우리에게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행중에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계시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문자적으로 예수님께서 당시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적용할 때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권면을 오래 전에 주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추측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교회라는 간판만 붙여놨다고 해서, 예수님이 저절로 임하실 것이라 여겨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단순히 참석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실 것으로 추측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뒤에 어떤 직책이나 직분이 붙는다고 해서 또 내가 어떤 봉사를 한다고 해서 성대한 예배당과 풍부한 성경 지식이 나눠지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당연히 임재하실 것이라 추측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거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께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그 모든 것을 지키고 전하고 지키게 하는 너희들 곧 지상 명령에 순종하는 이들입니다. 내 마음 속에 우상과 탐심으로 가득하고,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그저 정해진 규칙, 또 어떤 율법적으로 몸 만 왔다갔다해도 예수님이 무조건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그 예수님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점검과 그 임재에 대한 사모함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 지상명령에 대한 순종 바로 그러한 심령 속에서 주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하다 추측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삶을 살든지 예수께서 당연히 나를 따라 임하실 것이다 추측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요셉과 마리아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예수님도 같이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내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으로 당연히 추측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일중에서 삼일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룻길을 갔는데 돌아가기까지 왜 삼일이 걸렸느나? 그것은 중간에 여러 곳을 찾아 헤매다 보니 세배의 시간을 허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46-47절에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눅 2:46-47,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은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토론과도 같이 묻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의 아들로써 신비로운 기적의 이 세상에 임재하심으로 성육신하셨지만, 예수님께서 그 모든 지식은 기적적으로 한 순간의 내용으로 오실 때부터 모든 경험을 탑재하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지식은 회당에 가지도 않고, 대화의 과정도 없이 태어나실 때부터 율법의 지식으로 가득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인간이 아니겠지요. 인간이 겪는 한 가지만 빼고 죄만 빼고 예수님은 모든 어린 시절의 걷는 법도 배워야 했고, 때로는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시면서 유아들이 겪는 과정을 겪으셨고, 회당에 출석하며 율법을 배우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셨기에 예수님의 배움의 능력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충만한 능력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열두살 때 율법학자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수학문제를 풀어내는 탁월한 아이들도 있지 않습니까? 죄가 있는 인간에게도 아주 어린 나이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이도 있는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의 심령과 지성에는 얼마나 큰 능력이 임했겠습니까? 12살 때 예수님께서 그렇게 율법학자들과 배움의 시간, 나눔의 시간 또 율법학자들이 감탄할 정도의 율법을 꿰뚫어보시는 통찰력으로 그들을 가르치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학자들과 대화를 나누시는 예수님을 발견했다면, 예수님이 왜 요셉과 마리아에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행동하고 있을까? 그러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 더 알고, 율법학자들을 가르치실 의도라면 미리 요셉과 마리아, 엄마 아빠를 찾아서 "제가 성전에서 율법학자들을 만나고 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그러한 계획을 얘기하고 실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일행들이 다 떠난 것을 알면 쫓아가서라도 말하고 왔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행동처럼 보이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대화하는 예수를 발견하고 마리아는 이렇게 묻습니다. 

눅 2: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사실 점잖게 읽었지만,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삼일을 아이를 찾지 못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어미의 놀란 가슴, 아마 간담이 다 녹았을 것입니다.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화도나는 어투 아니었을까요? 제 아들이 네살 때 서빙고에서 성도들이 많이 나올 때 갑자기 없어진 거예요. 이제 걷고 뛰어다닐 때에 없어진 거예요. 한 30분인가 안보이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 못찾으니까 눈이 캄캄해지더라고요. 알고보니까,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화가나던지.. 전도사니까 소리를 못 질렀지 집어 던지고 싶더라고요. 요셉과 마리아가 아마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당연한 부모의 놀람과 당연한 분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분노하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의 이면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12년 동안 육신의 자녀로 예수님을 양육하고 있는 동안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신 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한 인간이 겪는 발달단계를 그대로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이시기 때문에 1년만에 성인처럼 자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뛰어나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이 자라나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죄만 빼고 다 겪으셨기에 육신의 자녀로써 예수님을 점점 대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잊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하고 불안해 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동일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요셉과 마리아의 생애와 예수님의 사역을 읽으면서 우리 식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내가 경험한 세계, 경험 속에서 예수님을 끼워맞추는 거예요. 때로 예수님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도 예수님도 이해하시겠지 그렇게 예수님을 나의 삶에 끼워맞추는.. 아니면 때로 교회 안에 회의를 하면서 예수 이름으로 모였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임재하신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인간적인 분노와 욕심과 탐욕으로 서로를 정죄하는 관계로 만나면서도 마칠 때는 예수 이름 부르면서 끝나는 거예요. 회의를 할 때, 예수님은 분명히 계신 곳이라 말하면서도 실제로 이런 것과 같은 거예요. "예수님 잠깐만 나가주세요.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바로 예수님의 임재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의 수준으로 끓어내리는 거예요.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인간예수로 끌어내리는 거예요. 

 

때로는 신학작들이 역사적 예수라는 이름으로 그런 일들을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모든 신비와 기적과 초자연적인 능력은 다 빼버리고, 우리의 과학과 이성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예수님으로만 각색하는 것을 수 많은 신학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바로 요셉과 마리아의 모습이죠. 자신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예수님을 축소해서 받아들이는 거예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께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에게 맞추려 했던 그런 모습.. 우리가 육신의 자녀도 우리의 뜻대로 맞추지 못하지요. 여러분 가운데에 육신의 자녀가 부모들이 기대하는 대로 자라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때로는 부모가 기대했던 모습과 다른 모습이지만 그 이상으로 만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거의 희박합니다. 육신의 자녀조차도 내가 양육함에도 그렇게 자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더 앞서기 때문에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육신의 자녀도 그러할 진데 예수님은 육신의 자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어떻게 요셉과 마리아의 틀에 맞춰질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할 수 있는 어쩌면.. 최고의 불신앙은 자녀를 부모의 틀에 맞추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쓰시려고 하는데, 부모가 그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육신의 틀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저는 어린 시절에 부모니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도 그래 보이죠? 그런데 제가 부모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불순종했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부르심을 받고 목회자가 된다고 하셨을 때 반대하셨어요. 저희 형님도 목회자인데 "너까지 그럴 필요가 있겠냐?" 신앙이 있다고 하시면서도 그러한 부르심에 대해서는 반대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순종해야 합니까? 부모님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부모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도움을 하나도 받지 않겠다. 그때부터 완전히 독립해서 신학교를 입학한 후에 한번도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불순종이었습니다. 때로 어떤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나름대로의 사랑과 기대가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어긋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부모님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지 아니하면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지만.. 매우 우리에게 중요한 인사이트를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발견하셨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잘 보셔야 합니다. 

  눅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요셉과 마리아가 화가 더 났을 거예요. 왜냐하면, 삼일길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찾았단 말입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얘기를 못했습니다." 이런 이야기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합당하지 않은 반응같습니다. 이 때 요셉과 마리아는 인간적인 정이 뚝! 떨어졌을 것 입니다. 여러분 가끔 자녀를 키우다보면 인간적인 정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 있지요? 자녀에게 물어보면, "우리는 오래전에 이미 떨어졌습니다."라고 할지 몰라용. 하여튼 자녀와 부모 사이에 정이 떨어지는 순간이 있는데, 예수님이 말씀을 보면 완전히 정 떨어제는 말씁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정을 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12년 동안 얼마나 애지중지 잘 키웠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얼마후에 고난 받고 십자가를 지셔야 해요. 여러분의 자녀가 십자가를 지는 것을 고통을 잘 감당할 부모가 몇이나 될까요? 사고나 병으로 자녀를 먼저 떠나보내도 평생 그 고통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고하게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죽는 고통을 담당하는 것을 부모가 봐야만 한다면.. 특별히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 12살을 기점으로 정을 떼는 거예요. 인간적인 정을 계속 갖고 있으면 엄청난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울테니.. 예수님이 단지 청소년기를 겪으면서 불순종하고, 반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는 증거가 2장 51-52절에 나오지요. 

 

그 사건 이후에는 예수님이 순종하셨어요. 그리고 자라가면서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거예요. 순종하는 예수님의 모습, 사랑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서는 청소년기의 반항심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요셉과 마리아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부모이지만.. 때로 인생의 경험은 더 많으시지만 영적인 깊이 자녀가 더 깊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가끔 저희 딸에게 가르침을 받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설교 준비를 마치고 TV를 좀 오래 보는 것 같으면 "아빠 내일 설교 준비 다 했어요? 뉴스 그렇게 오래 보시면 영성에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자녀에게 신앙의 도전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순종적인 분이셨지만 요셉과 마리아가 인간적인 정이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보다 더 앞설 때 그것을 바로 잡아 주시는 거에요.

 

 

신앙 공동체 가운데서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뭔지 아십니까? 다툼과 분열은 말할 것도 없고요, 오히려 인간적인 좋은 관계가 예수님의 임재를 가릴 수 있습니다. 좋은 관계여야죠. 그러나 인간적인 정으로만 끈끈하게 엮여 있다면 예수님의 임재가 안보일 수 있습니다. 교민교회를 목회하면서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찬성입니다. 왜, 인간적인 정으로 똘똘뭉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어요. 인간적인 정과 의리 관계가 더 중요한거예요. 지금 예수님의 임재가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시작기도와 마침기도만 하면 되는 거예요. 거기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임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가 빠질 수 있었던 부분을 12살된 예수님이 미리 교정해주시고 계신거예요. 그래서 제가 성도들을 향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보이실 정도로 가까우십시다." 너무 멀어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너무 멀어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가까운 관계속에서도 예수님이 보일만큼 가깝지 않으면 그 관계가 예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요셉과 마리아에게서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예수님의 임재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들이 찾고 있는 예수는, 혹시 육신적인 자녀 예수를 찾고 있는 것 아니십니까?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서 예수를 찾고 있으십니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인간관계에서 입니까? 어떤 교회 활동에서 입니까? 나의 성취에서 입니까? 내가 인정받는 것에서 입니까? 예수님의 임재가 있을 수 없는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찾는 것만큼 모순이 없습니다. 어디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그렇게 마리아와 요셉을 향하여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땅히 아버지의 집에 계셔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이 말씀을 원문으로 직역하면, "내 아버지의 안에(in my father's)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소유격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집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집'이라 번역했는가? 소유격으로 하면 그 다음에 여러가지 룸이 생기는 거지요. 괄호 안에 여러가지가 대입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집이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찾았기 때문에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는지 모르셨습니까?"라는 번역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킹제임스번역본 성경같은 경우는 "일"로 번역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집도 되고, 일도 되고, 사람도 되고 다 되는 거예요. 그러한 풍성한 의미,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의 뜻 가운데 계셨고 아버지의 일을 하고 계셨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삶을 12살이지만 지금 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까?

 

 

우리가 어디서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초점이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집 어디에 있습니까? 예배당입니까?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성령이 임하시는 우리의 심령, 우리가 거룩한 성령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아버지의 집이 되는 거예요. 교회가 성령 안에 있을 때 성전이 되는 거예요. 성도들이 곧 성전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 계시기에, 우리도 그 아버지의 집을 향해야 합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우리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 사이에서 또 어떤 예배당 건물에서 나의 어떠한 활동에서 찾고자 한다면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행 중에 당연히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추측했던 요셉과 마리아가 빠졌던 이 신앙의 모순이 우리에게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당연히 임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맞추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게 맞추어야 합니다. 아버지 안에, 그 뜻 안에 그분이 원하시는 일, 그것이 지상명령이지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에,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놀랍게도 우리는 예수님을 그곳에서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을 육신으로만 알고 나의 육신적인 생활 가운데 예수님을 맞추려 했던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거하기를 원하며, 그 뜻에 그 일에 그 나라에 머무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시고 주님께서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연합의 삶을 날마다 체험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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