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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 프로젝트/가스펠프로젝트-신약1

[신약1-6]가스펠프로젝트 I 어둠의 세력에 대해 승리하시다 I 마태복음 4:1~11 I 이재훈 목사

by №1★↑♥ 2021. 6. 17.

마태복음 4:1~11

어둠의 세력에 대해 승리하시다

 

세상에는 분명 어둠의 세력이 존재하며 그 세력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듣는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 갖 죄악들, 사람으로써 저럴 수 있을까?하는 끔찍한 범죄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안타까운 여러가지 소식들 이 모든 것들의 이면에는 분명 어둠의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깨어서 이 어둠의 실체를 분명히 깨닫고 이것을 믿음으로 싸워이기지 아니하면 우리 모두는 한 순간, 어둠의 세력의 먹이가 되며 자신의 삶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삶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재물이나 어떤 사회적 위치로나 스스로는 이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 어둠의 세력을 이기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으십니다.

 

 

 

 

 

 

첫째 아담인 사람은 이 어둠에 패배하여 모두가 다 그 앞에 패배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둘 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둠의 세력에 승리하심으로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기도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 이 어둠의 세력의 실체를 분명히 깨닫고 성령의 능력을 깨닫고 우리가 어둠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 승리를 선물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시험당하신 것입니다. 죄인 된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죄인과 같이 되셨고, 또 우리가 겪는 모든 시험에서 이기도록 인도해주시기 위해서 돕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사건은 1 절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이 맞지 않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어둠의 세력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장차 다가올 엄청난 공격에 대비하게 하기 위해서 금식하며 더 큰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능력을 체험하시도록 예수님을 이끄셨고, 또한 그러한 시험이 왔을 때 예수님이 이기신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단어는 유혹이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공격이라는 말까지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은 공격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공격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둠의 세력에 무너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어둠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마귀의 목표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세가지 공격을 여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단 한번만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금식하시는 40일 내내 공격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 세가지의 공격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첫번째 공격입니다.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것은 단순한 가정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렇게 해석하시면 됩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은 단순한 기적을 일으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굶주림으로 고통받아야하겠느냐? 사람들은 고통을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고통 가운데 놓여 있지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굶주림의 고통 가운데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는가? 구지 이러한 고통을 받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제안입니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예수님을 동정하고 예수님 편에 서 있는 것 같지만, 무서운 공격이요 시험입니다. 결국 이것은 십자가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기적으로 능력으로 사람들 앞에 보여주면 사람들이 인정할 텐데 굳이 이렇게 굶주리고 고통받고, 고난당하여 십자가에서 죽는 그 길을 갈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유혹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이런 유혹을 주지요. 고통 없이 승리를 얻고, 고통 없이 영광을 얻는 그 길을 우리에게 추구하게끔 합니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지 않고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을 사단은 추구하도록 만듭니다. 고통없이 없는 영광, 예수님 앞에서도 고통 없이 메시야가 되시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예수님이 극심히 굶주렸을 때, 40일동안 주리셨을 때 예수님에게 주어졌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본능, 우리 안에 있는 기본적인 갈망을 이용하여 우리를 어둠의 세력에 휩쓸리게 만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적 본능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 안에는 본능을 이용하여 우리를 어둠의 세력에 휩쓸리게 합니다. 배고픔이라는 본능자체는 죄가 아니지요. 그러나 그 배고픔이라는 본능을 어떻게 충족시키느냐?에 따라서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배고픔이라는 고통을 어떻게 해결하라고 제안하는 겁니까? 돌을 빵으로 만들어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라.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도 상관없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격은 끊임없이 우리에게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본능, 자신의 본능을 절대시해서 그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C.S루이스가 오래전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한 문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짓은 자신의 본성에 있는 본능 중 하나를 골라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따라야 할 사항으로 절대시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지침이 된 후에도 우리를 마귀로 만들지 않을 본능은 없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본능을 절대시하면 마귀처럼 변한다"는 것입니다. 에서가 그랬습니다. 에서는 배고픔이라는 본능을 참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배고픔의 본능을 이용해서 동생 야곱이 장자의 권리를 가로챈 것 아닙니까? 배고픔의 본능, 성적인 본능, 권력에 대한 본능 소유에 대한 본능, 이 본능 안에 있는 것들을 절대하는 순간 우리도 마귀처럼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실 때에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두가지 중요한 법칙을 만드셨습니다. 첫째는 자연법칙입니다. 이 동물과 생물이라는 자연환경은 중요한 법칙을 따라 움직여 지고 있습니다. 만일 그 법칙을 인간이 어기게 되면 엄청난 재앙이 오는 것입니다. 이 자연의 법칙은 과학으로도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력의 법칙, 열역학 법칙 등의 많은 법칙들이 안긴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법칙에 기초해야 비행기도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이고, 배가 바다위를 떠다닐 수 있는 것이고 심지어 잠수함도 물 속을 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문명은 이 자연법칙을 지킴으로써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에 한해 인간이 이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순간 엄청난 재앙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몇가지는 과학으로 증명해냈지만 그 모든 것들을 다 설명해낼 수 없을 만큼 수 많은 숨겨진 법칙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나가는 것이고, 그것을 지켜냄으로써 자연과 더불어 자연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자연법칙은 중요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이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존중합니다. 자연이 신이라고 말하는 자연신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두번째 법칙은 자연이 아닌 인간 안에 있는 법칙, 인간 안에 있는 본성의 법칙 혹은 도덕률. 인간 안에 있는 자연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은 첫번째 챕터에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세계대전이 있은 후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겪는 동성애의 문제라든지 이미 그 당시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우주를 이해하는 실마리라고 첫번째 챕터를 BBC방송에서 방영을 했습니다. 인간안에는 옳고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육을 하나도 받지 않아도, 글을 몰라도, 문명의 혜택이 없는 원주민들이 부족에 가보아도 그들이 사는 법칙, 도덕률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만들었죠? 시대와 문화가 다르고, 종족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도덕적 기준이 비슷합니다. 심지어 타 종교에도 비슷한 도덕의 기준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옳은 것이라 여기는 보편적 윤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교육을 뛰어 넘어 이것은 본능도 아닙니다. 본능을 제어하는, 본능 위에 있는.. 그래서 루이스는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인간이 피아노의 키라고 한다면 본능 위에 있는 도덕률은 그 키를 조율하여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피아노를 치면 소음이 되지만, 음조에 맞추어서 치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듯이, 도덕률이란 우리 인간의 본능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제가 드릴까요? 지금 마귀가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트리고서라도 너의 본능을 만족시키라는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하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지 않았지만, 인간위에서 압박하는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도덕률이라고 부르든, 인간본성의 법칙이라고 하든, 인간안에 있는 자연법이라고 하든 명칭이야 어떻든 자연법칙을 어기면 엄청난 재앙이 오듯이, 인간 안에 있는 자연의 법칙을 어기면 엄청난 부작용 혹은 혼란과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능을 제어하는 , 본능 위에 있는 질서와 조화를 가져오는 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법으로도 표현이 되고, 도덕으로 표현이되고 윤리로도 표현이 됩니다. 시대마다 상황마다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비슷합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규정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십게명입니다. 구약의 십계명은 인간 안에 있는 자연적 본성의 법을 구체적으로 말슴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잘들여다보면, 인간의 본능을 제어하며 인간이 지켜야 할 본성의 법칙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더 확대하면 성경 전체가 인간을 규정하는.. 어느 시대 어떤 문화속에 살아가든 인간이라면 지키고, 지킬 때에는 본능을 뛰어 넘어 참으로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법칙을 인간에게 준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법척은 인간이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기지 않는 거예요. 또 자기가 그것을 어기면 댓가를 치르니까, 그것에 순응합니다. 그런데 인간안에 있는 이 본성의 법칙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 자꾸 어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죄고 그것이 인간의 타락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남자와 여자라는 이 성은 자연의 과학으로도 증명된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아닌 제 3의 성이 유전적으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자연법칙에까지 적용되는 법인 것입니다. 자연법칙을 어겼을 때 돌아오는 댓가를 치러야 하지만 남자와 여자로만 발견되는 그 밖의 다른 제 3의 성이 없는 것을 인간 스스로 규정하려고 할 때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회의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최근 재정하려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성과 남성으로 분류되지 않는 성"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성을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라고 해도 내 스스로 여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여성으로 인식해도 나는 남성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소위 사회적 성을 법제화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2016년 이런 주장에 설득되어 뉴욕주에서 31개의 성이 법제화 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외에 인간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31개의 성이 있습니다. 뉴욕 인권조례에 보면 나옵니다. 인간의 성이 무슨 31 아이스크림입니까? 그 성의 이름은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이름들입니다. 태어나면 제 3의 성으로 X로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서 커서 31개의 성 중에서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근사해보입니까? 우리는 서로 다를 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자연법칙에서 틀린 것을 다른 것으로 규정할 때 얼마나 큰 문제가 생깁니까? C.S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러한 도덕율을 수학의 세계와 비유했습니다. 수학의 세계라는 자연의 법칙을 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만일 비행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숫자 하나를 잘못입력하면 그 비행기는 떨어집니다. 자동차는 멈추어서고 폭발합니다. 이렇게 자연의 법칙 이면에 있는 수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수의 가장 기본적인 등식이 무엇입니까? 1+1=2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느 학생이 학교에서 1+1=2라는 것을 배우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1+1=2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을까? 나는 3이라고 느껴진다. 3도 될 수 있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나는 3이라는 숫자가 더 좋다. 1+1=2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그 반의 모든 학생들이 '2'라는 것을 수긍하는데, '3'이라는 대답을 하는 학생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소외감을 느끼고 "왜 나를 차별합니까?" 그렇게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호응하는 학생들이 늘어납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학생이 "그래! 3일 수도 있지 않나? 왜 2만 답이어야 하냐?" 한 사람 두 사람이 호응하면서 그 반안에 있던 대다수의 학생들은 "선생님 우리는 2는 대답만을 받아들 수 없습니다. 3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답이 3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지구상 어떤 학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3이라는 답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1+1의 답이 2만 있다는 것이 자연법칙과 수학의 답이라면 남자와 여자외에 과학적으로 다른 성이 없는 것이 분명히 증명된 것이라면 이것은 다른 답이 아니라, 틀린 답입니다. 틀린 답을 인간사회에 들여왔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오답을 붙잡고 왜 나를 소외시키십니까? 왜 나를 차별하십니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차별을 중지하자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과 틀린것 사이에서 상당히 동정적인 사람들이 다른 답이라고 그렇게 인정해주는 거지요. 그럼으로써 뉴욕주는 31개의 성이 생겨납니다. 미국의 곳곳에서 성중립 화장실로 대란을 겪고 있습니다.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어서 남자와 여자가 같이 써야 하는 게 아니라, 여러사람이 쓰는 화장실인데 남자와 여자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심지어 대학 기숙사의 샤워실도 목욕탕도.. 그런 시대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평등과 차별금지라는 이름으로..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그러한 사회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기도만 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행동해야 합니다. 아니 그런 사회가 된다면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아닌 분류될 수 없는 성. 그것은 마치 돌을 빵으로 만들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 돌이 많았기 때문에 그 돌을 빵으로 만들면 얼마나 많은 빵이 생기겠습니까?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은 한번도 자신의 본능을 만족시키는 기적을 베푼적이 없으십니다. 모두가 타인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기적의 내용도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돌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오병이어 기적을 보십시오. 빵을 빵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레를 포도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같은 H2O계열이지요.  구약의 모든 기적 홍해가 갈라서고, 해가 멈춰섰지만 질서를 깨트린 기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을 치유한 사건도 원래의 상태로 회복이 된거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눈 시력이 회복되고, 손과 발이 회복된 거지 기적을 통해서 눈이 하나 더 생긴 기적은 없었습니다. 손과 발이 하나 더 생긴 일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동정녀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시는 기적 속에서 나셨어도. 예수님이 잉태되자마자 성인으로 출산하지 않으셨어요. 한 아기가 잉태된 이후에 겪는 모든 출산의 과정, 그 세포의 성장과 그 아기가 점점 모태 속에서 자라난 모든 성장과정을 그대로 순응하셨어요. 하나님의 기적은 창조질서를 무너트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입하실 뿐입니다. (성경책을 높이 들고)"이 성경책을 제가 붙잡고 있는데 놓으면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것은 중력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성경책을 다른 손으로 받으면서)"그런데 제가 다른 손으로 받은 것은 중력의 법칙을 무너트린 것이 아니라 개입했을 뿐입니다." 이 손을 놓으면 결국 다시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자연질서와 창조질서 속에 개입하면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서를 무너트린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자연의 창조질서에 없는 기적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부활'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인간이 끝이났지만, 죽음은 이긴 부활은 새창조의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률, 인간의 법칙에 가장 기본이 되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과학으로도 증명되는 자연법칙입니다. 그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고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부모와 자녀가 어떻게 가정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시작했습니다. 우리 인간관계, 사회, 국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 살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이 잠시 육신의 본능을 채워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트리며 진정한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시는 기적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겠지요.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거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생명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을 충족시키는 피지컬 디멘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디멘션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으로는 우리에게 육체적인 차원의 삶을 충족시키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적인 디멘션이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이 어둠의 세력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육체적 본능을 절대시 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그 본능이 충족되지 않아.. 우리에게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규정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법칙 안에 있는 것이 우리가 진짜 사는 것이다. 영혼이 살지 않으면 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첫번째 공격에 실패하자 마귀는 두번째 공격을 해옵니다. 두번째 공격에서 장소가 광야에서 예루살렘 성전꼭대기로 바뀝니다. 

  마 4: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광야라는 장소와 성전 꼭대기라는 장소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줍니다. 광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 그리고 성전 꼭대기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왜 마귀가 장소를 바꾸었을까요? 첫번째 시험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명임을 믿음으로 고백하자, 그러한 믿음이라면 시험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성전에서 얼마나 보호하시는 지를 시험해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심지어 시편 91편을 인용하기 까지 합니다. 마귀도 성경을 압니다. "천사를 통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지 않는가? 그렇게 시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필요한 모험을 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뜻과 계획으로 하나님보다 앞서가면서 하나님께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어떤 것을 선택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지 않은 것, 혹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지 않으신 것을 하면서 하나님께 책임지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믿음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신학교까지 왔는데 너무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느날 이 친구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았다는 거예요. 무슨 응답을 받았냐? "내가 언제 너한테 신학교 가라고 했니?" 가라고 하지 않은 신학교를 스스로 가놓고, 왜 하나님 책임지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 불평한 것이지요.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불필요하게 위험한 상황에 자신을 노출시켜서 어리석고 헛된 확신을 갖도록 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의 의미를 왜곡하도록 권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위험스러운 태도로 자신의 신성을 시험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위험한 태도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만큼 한 순간 한 순간 걸어가는 것입니다. 말씀하셨으면, 행동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기다리는 것입니다. C.S루이스의 영적스승이라고 하는 조지 맥도날드도 동일한 맥락의 말을 남겼습니다. "미래는 감춰진 미래 속으로 성급하게 달려드는 게 아니라, 행할 길을 열어 주시는 지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우리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시험의 대상이다. 믿음이란 끊임없이 하나님의 시험에 나를 올려드리는 거예요. 믿음은 하나님을 날마다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가? 날마다 시험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에 휩쓸리는 까닭은 나는 분명 믿음으로 행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둠의 세력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믿음이 과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가? 날마다 시험하는 사람은? 결코 어둠의 세력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세번째 시험장소는 높은 산이었습니다. 마귀는 또 다시 장소를 바꿉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왜 예수님이 이렇게 힘없이 마귀에게 끌려다니는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에게는 장소가 중요했지만, 예수님께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약하기 때문에 끌려다니신 것이 아니라, 강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장소에 상관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다야한 시험들을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기꺼이 다른 장소로 옮기신 것입니다. 

  마 4:8-9,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의 소원은 단 한번이라도 하나님처럼 경배받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단 한번이라도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 새빨간 거짓말이지요? 그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그가 줄 수 있을까요? 그는 만물의 지배자가 아닙니다. 마귀가 지배하고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이들은 마귀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배를 드리며 그분만을 사랑하며 경배하며 섬기는 영혼은 절대로 마귀가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 어둠의 세력에 승리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올해 온누리교회의 표어가 '온 맘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온 맘다해 사랑하는 하나님의 영혼은 어둠의 세력이 틈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온 맘을 다하지 않을 때는 비워둔 그 마음에 다른 사랑이 들어오고 하나님만을 에배하지 않을 때 또 다른 예배의 대상이 들어옵니다. 아무것도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예배하고 있습니다. 예배, 경배라는 worship, worth라는 단어 가치 있게 여기다는 것에서 나온 단어 아닙니까? 무엇을 가치있게 여깁니까? 그것이 가치를 넘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건강, 재물, 사회적 지위, 자신의 이름, 명예, 그 무엇이든지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할 때는 그 모든 것이 축복이 되고 선물이 됩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지 않을 때 우리의 본능 중에 하나를 예배하게 되고 본능 중에 하나를 절대시하고 살아갈 때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변의 모든 것은 평화롭게 됩니다. 주변이 모든 것이 평등하게 됩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우리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엄청난 사회 붕괴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WHO에 의하면 매우 부정적인 뉴스가 나왔지요. '코로나 바이러스를 종식시키지 못할 것 같다.' 함께 살아가야 할 이 시대, 계속해서 경제사회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 시험 앞에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일까?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되돌아가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고, 그분만을 신뢰하고, 그분만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생명으로 여길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회복의 길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십시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만을 경배하십시오. 하나님게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욕망과 탐욕과 우상이 우리를 더럽히는 이 시대에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살아게신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그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저희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세상의 어두운 세력에 먹이가 되지 아니하고, 그 어두운 세력을 내쫗고 승리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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