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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 프로젝트/가스펠프로젝트-신약1

[신약1-3]가스펠프로젝트 I 구유에 누우신 하늘의 왕 I 누가복음 2:1-14 I 이재훈 목사

by №1★↑♥ 2021. 5. 27.

 

누가복음 2:1-14

구유에 누우신 하늘의 왕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 어려워하는 까닭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익숙한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뒤집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치와 기준에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익숙하게 여기는 모든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와 기준들이 실상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왜곡되어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했을 때 누가복음 1장 후반부의 나오는 그 노래의 내용은? 한마디로 제목을 붙이자면, 세상을 뒤집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자신처럼 비천한 여종에게 임하셔서 자신을 메시야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낮은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마리아가 찬양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연약한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께서는 능력과 존귀와 영광과 위대함을 가지신 하나님은 실상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지만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히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그분이 종으로 섬기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 부분은 다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어느 날 제 아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공부하는 거 재미있니?" 아들이 대답하기를 "아빠 질문자체가 틀렸어요. 공부라는 단어와 재미라는 단어가 한 문장속에 들어갈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물론 공부와 재미가 하나가 되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요. 한 문장에 들어올 수 없는 단어가 우리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위대함'이라는 것과 '낮아짐'이라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 그러면 겸손, 낮아짐, 희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익숙한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홀로 높임받으시는 존귀하신 하나님, 그분은 한 없이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했을 때, 이기적인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 한 없이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그분의 삶,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들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나타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출생부터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한 없이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하신 분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출생하신 때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를 통치할 때라고 누가복음 1-2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2:1-2,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은 '존엄자'입니다. 로마의 원로원에 의해서 부여된 호칭입니다. 원래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인데,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이 붙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우구스투스가 워낙에 통치를 잘 했기에 이후의 황제들은 로마황제의 직위자체를 '시저', '아우구스투스'라 부를 정도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세계사에서는 그가 통치했던 기간을 '팍스 로마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경제, 사회, 법,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있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던 그 통치자였습니다. 바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허구나 신화가 아니라 실제 사실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아우구스투스와 하늘의 왕이신 가장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사건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때에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은? 네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놀라운 타이밍입니다.  

 

첫째로, 복음이 빠르게 전해질 수 있는 길이 닦아졌습니다. 당시에는 곳곳에 도적들이 많았기에 여행자체가 매우 위험했던 때였지만, 로마에 의해 길이 닦여지면서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그런 시기가 도래하였지요. 약 85000키로에 달하는 길이 곳곳으로 깔리게 됩니다. 마차 두대가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그 길이 유적지로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을 오늘날에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길로 여행을 했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이 길을 이용했습니다. 물론 무역과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다녔지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이 때부터 생기게 되었습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지만 동시에 복음이 로마로부터 전할 수 있는 길이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헬라문화로 통일되면서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이 되면서 히브리어를 모르는 많은 이들이 구약성경을 읽게 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메시야를 더욱 갈망하는 시기가 되었지요. 로마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팍스 로마나'로, 절대 통치의 시대이지만, 지배를 받는 유대민족으로 보았을 때는 희망이 없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로마가 강력해질 수록 나라의 주권을 찾기가 점점 힘겨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으로 유대인들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에 대한 갈망을 더욱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네번째 중요한 의미는, 아우구스투스의 강력한 통치력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수 있도록 섭리된 것입니다. 미가서 5장 2절에서 이미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메시야가 태어난다는 예언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임신 중에 잇는 베들레헴으로 가서 출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만삭된 마리아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살던 지역을 옮겨서 베들레헴으로 가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동정녀 탄생에 대한 계시를 받아들였지만,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나신다는 사실을 공부해서 알았을리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고, 설령 알았다 할지라도 만삭된 몸으로 굳이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는 사실 없었습니다. 이 아우구스투스와 같이 강력한 통치력이 아니었더라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세금을 더 걷기 위해서 호적을 시킨 것입니다. 목적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로마의 통치 강화를 위해 호적을 시킨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볼 때는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옮기도록.. 바로 그 타이밍.. 거기서 출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만을 보면, 로마의 최고 지도자였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상을 통치하는 것 같지만, 역사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더 놀라운 섭리가 그를 사용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고레스 왕을 통해서 바벨론 포로 이후에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복귀하시도록 역사하신 것처럼.. 이방 왕일지라도, 어떤 세상의 강력한 통치자라 할 지라도, 그 사람이 선한 왕이든, 악한 왕이든 상관없이, 그 누구도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보며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힘이 있다는 사람들이 아무리 음모를 꾸미고 발악을 해도 결국 하나님의 역사대로 움직여 지는 것입니다. 그 법칙이 무엇입니까? 교만한 자는 무너지게 되어 있고, 겸손한 자는 이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품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팍스 로마나'를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아주 작은 마을,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절기와 제사들에 필요한 동물들, 제물들을 제공하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많은 동물의 가축 사육장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 말인즉슨 그 마음을 냄새나는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베들레헴을 택하셔서 그곳에서 예수님이 나시게 하셨을까? 그 첫번째 이유로, 베들레헴은 작고, 더럽고, 지저분한 성읍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흡모하는 도시가 아닙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흡모하는 동네는 '나사렛'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 베들레헴인데, 나사렛에서 산 이유는 나사렛이 비전이 있는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목수가 할일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건축이 일어나는, 요즘 말로 신도시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사람들이 떠나는 곳, 그래서 동물들만 남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등돌리는 작고, 지저분한 성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성읍을 택하셨습니다. 

 

또한 그 베들레헴은 슬픔의 성입니다. 창세기 35장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베델에서 돌아는 길에 베냐민을 낳고 베들레헴에 묻힙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경배하러 왔다고 했을 때 헤롯이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의 모든 아이들을 다 학살하지 않습니까? 이 집 저 집에서 통곡소리가 들려오는 슬픔의 도시입니다. 살고 있는 이 땅 곳곳에서도 베들레헴과 같이 슬픔의 소식들이 들려오지요? 자녀들을 학대하고, 유기하는 충격적인 소식들이 곳곳에서 들려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아름다운 시골 마을같지만 슬픔이 묻어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을 택하신 것은 이 땅의 가장 슬픔과 고통과 아픔과 학대와 살인과 끔찍한 범죄가 있는 한 복판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수없이 예언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베들레헴을 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중심도시가 아니라,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한 도시에서..

로마도 주모하지 않는 곳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빈방이 없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여관'으로 표현되지만, 사실 당시 베들레헴은 그러한 숙박업소가 없었습니다. 가정 집에 잠시 머물러 갈 수 있는 민박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마저도 방이 없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하셨지만, 방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준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동네에서, 그것도 가축들이 머무는 곳에서 나시도록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한 아버지가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나시게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왕이신 그분이 동물의 먹이통에서 태어나실 만큼의 낮아지심이 이해가 되십니까? 얼마나 우리에게 낯선 일이요, 우리의 가치를 뒤집는 일입니까? 세상의 왕과 얼마나 다른 일입니까? 우리는 고위 공직자만 움직여도 대하는 것이 달라지는 세상 아닙니까? 세상의 왕이 움직인다고 하면, 얼마나 요란합니까? 그런데 하늘의 왕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시되 어떤 마을에, 어떤 곳에 어떠한 모습으로 오셨는가?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가치를 뒤집는.. Upside down 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늘의 왕이 구유에 누우시고, 사람이 눕지 않는 곳에 누우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이 세상 가운데 자신이 누울 곳이 없는 버림 받은 영혼들, 길에서 노숙하는 분들, 방황하는 분들, 난민 등 이 땅에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음과 고통까지도 이해하시는 분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람이든지 그 분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분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예수님 앞에 설 때 가난으로 인하여, 버림받음으로 인하여, 실패로 인하여 "살맛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게 하신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시고, 그 예수님 앞에 설 때 우리 모두 부유한 자가 됩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 지도자들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버리고 훌륭하게 성장하지만..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남의 집, 방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남의 배 위에서 설교 하셨고, 남의 다락방을 빌려 만찬하셨고, 남의 무덤에 누우셨고, 남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거예요. 100퍼센트 순수한 섬김과 헌신에 낮아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 앞에 서면 가장 부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가장 가난한 자도 그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 이 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왕이신 하나님이 가장 가난한 자리에 계심으로 인하여 모든 자를 부유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들레헴의 구유의 누우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건은? 

베들레헴 가장 가까운 들판에 양을 치던 목자들의 경배에 있습니다. 천사들을 통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목자들에게 소식을 전하였고, 그 목자들이 가장 먼저 경배를 했습니다. 목자들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적인 자들이 아닙니다. 당시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베들레헴이라는 마을 자체도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없는 천대시 받는 마을이었지만, 마을조차 들어갈 수 없어 성읍 밖 들판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들레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소외된 사람들.. 그들이 바로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24시간 양들과 함게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린양하면, 희고 귀여운 애완동물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어려운 냄새나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 양들과 함께 살아가기에 24시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동물들입니다. 이 말은 당시 사회에 전혀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실 분이 오셨는데 그 중요하고 긴급하고,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했는가?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없는 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와 방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소식은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먼저 전해져야 합니다. 이 사회의 보편적 질서 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고가 나면 국가의 지도자가 이 사실을 얼마나 빨리 인지했고, 어떻게 조치를 했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추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사람은 당시에 가장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Upside down 세상을 뒤집어 엎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경배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한 부류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의 박사들이고, 또 한 부류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입니다. 성탄절에는 그래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항상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적으로 동방의 박사들은 성탄절 연극에 나와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구유에 누여 있을 때 즉 난지 얼마 안되었을 때 바로 경배하러 왔기 때문에 성탄절 연극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방의 박사들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집에 있을 때 이미 베들레헴의 마굿간을 떠나 어딘가의 집에 있을 때에 방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박사들의 경배를 받았을 때의 시점을 학자들은 1-2세 사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라고 했을 때 왜 죽이라고 하냐? 동방의 박사들이 유대에 왕이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경배하러 왔다는 것을 알고 놀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라겨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하지요. 그러니까, 최대 두살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절에 나오면 안되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교회나 다른 곳에서 박사들이 나왔다고 비나하지는 마세요. 그 때 아니면 언제 나오겠어요? 다 나오는 거지요. 너무 사실적으로 살려고 하지 마시고, 넓은 의미의 성탄절로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알아야지요. 예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 예물은 세가지이지만 박사들은 세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세 사람이라는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큰 무리였을 것입니다. 헤롯이 예루살렘이 소동할 정도의 무리가 왔기 때문에 그 난리가 난 것입니다. 세 사람이 세 박스 들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지체높은 관리들이었으니까 말을 끄는 자도 있었을 거고, 신분 사회의 시대였으니 적어도 몇십명의 일행이 움직였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소동한 것입니다.  성탄절 연극에는 몇 십명이 나올 수 없으니 세 사람만 나온다..^^  어쨌든 동방의 박사들은 한 참 후였다. 그러나 목자들의 경배는 즉시적이었다는 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은 저~ 멀리 동방의 박사들의 경배를 받아야 할 정도로 온~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경배를 받은 이들은 제일 중요하지 않아보이는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았기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해보이지 않는 사람, 가장 중요한 소식을 전함으로 세상의 기준을 뒤 엎으시면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목자들이 서둘러 가서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것처럼 과연 우리가 들은 이 말씀이 사실인지 확인해보자 그리고 경배하였듯이 목자들처럼 빨리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전한 소식은 

  눅 2:10,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의 평화로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마땅한 영광이 왜 가리워졌습니까? 인간의 죄가 가리운 거예요. 왜 이 땅에 평화가 깨졌습니까?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모든 죄를 씻으시고 자유케 하심으로 마땅히 올려져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 올려지고, 마땅히 이 땅에 임해야 할 평화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세상에 평화가 깨졌습니까? 누군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그 영광을 독차지하고 가리웠기 때문입니다. 한 공동체의 평화가 깨지는 것은 스스로 영광을 구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에 의해서 관계가 깨지고 공동체는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려는 자가 있으면 평화가 깨어집니다. 한반도의 평화가 깨어진 것은 영광을 탐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존엄자라는 타이틀은 사실 하나님 한분 외에는 붙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후에 로마의 황제들은 교만하여 시저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을 판결합니다. 신실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아서, 아우구스투스를 인정하지 않아서 순교한 것입니다. 그 처럼 위험한 호칭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되려는 사람은 세상의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깨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통치하는 것은 법과 무력을 '팍스 로마나'를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고, 낮아짐으로 섬기며 종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늘의 왕, 구유에 오신 그분으로 인해서만 진정한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지고, 이 땅에 참된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십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마음에는 구유에 누우신 하늘의 왕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의 마음 속에 구유를 주목하지 않고, 면류관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자가 될 것입니다.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길입니다. 어느 인간도 어떤 지식과 기술과 권력을 가지고 절대 통치자가 되려는, 스스로 아우구스투스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유에 누우신 하늘의 왕되신 자를 보면서 스스로 겸손하고 낮아진 자리로 희생하는 자리로 주님과 더불어 나아가는 자는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하늘의 왕. 그분을 목자들과 같이 찬양하고 경배하는..

그 구유를 바라보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구우에 누우신 하늘의 왕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찬양하며,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심으로 위대함을 드러내신 것처럼 낮고 천하고 구유보다 더 더러운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위대한 하나님을 나타내신 주님 우리의 마음 속에 주인을 모시고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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