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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 프로젝트/가스펠프로젝트-신약1

[신약1-5]가스펠프로젝트 I 하늘이 열리고 복음이 들리다 I 마태복음 3:13~17 I 이재훈 목사

by №1★↑♥ 2021. 6. 16.

[가스펠프로젝트_신약 1-7] 마태복음 3:1~17

하늘이 열리고 복음이 들리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먼저 하신 일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요단강에서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 온 전역에서 요한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어떤 시대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구약의 부흥의 시대였다고도 하는 에스라, 느헤미야 때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입니다. 때로 재난이 일어나고 나라가 멸망할 상황에 놓였을 때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었던 때는 있습니다. 하나님게서 회복시켜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부흥을 경험하였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왔느니라."는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자발적으로 나와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건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서 주의 길을 예비하시겠다던 약속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영적 영향력에 감동이 되어서, 어떤 사람은 요한이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만일 요한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내가 곧 그리스도다"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요한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여러분 사람들에게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장차오실 예수님을 올바로 소개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을 정돌도 그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시고 위대하신 분이시다. "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요한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하십니다. 요한은 놀라서 말렸습니다. 거절했습니다. "아니,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텐데 어찌하여 나에게서 세례를 받고자 하십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셔야 했을까요? 사실 세례는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함으로 받는 것이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죄인이시기 때문에 받으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아니 받으시면 안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셔야했을까? 그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의'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의입니다. 모든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전에 먼저 있어야 할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어야 우리에게 갚없이 의롭다 함을 선물해 주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죄인과 같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미 이사야 5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죄인과 같이 되심을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53:12,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죄 지은 사람 가운데 하나로 여김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들이 용서받도록 중재하셔야 했기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 댓가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부어지게 하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장차 예수님이 죽임당하시는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여러번 제자들에게 자신이 받을 세례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2:49-50.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이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세례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의 세례인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너희들이 받을 수 없는 세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세례는 바로 죽음의 세례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영어로는 Baptism이죠? 이것은 헬라어 '밥티조'에서 나왔습니다. '밥티조'라는 것은 '물에 잠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고, 거기서 나오는 것은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단순한 의식이지만 그것은 죽음과 다시 삶을 사시는 중요한 예식이었습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로 베풀었던 세례가 어디서 기원했고, 어떤 습관으로 했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그 의식 속에 장차 예수님이 받으실 십자가의 죽음과 동일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례 이후에 받으실 십자가의 죽음까지 세례를 말씀하셨다면.. 이제 우리가 받아야 하는 세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처럼 물로 세례를 받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함께 참여하는 세례가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가 곧 우리가 함께 경험하는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 세례를 먼저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의 세례를 받으셨지만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의 죽음의 세례를 물 세례로 받음으로써 십자가의 죽음에 함께 참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살릴 수 있는 길을 십자가를 통해서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 모두를 죽은 자로 간주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로 간주하시는 의로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예수님은 죄인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음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마치 모리아산에서 이삭이 번제물로 바쳐져야 하지만, 어린양이 이삭을 대신했을 때 어린 양이 죽임을 당했지만 이삭이 죽임당한 것으로 간주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양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죽임당한 것으로 마땅히 지불해야 할 죄의 값을 지불하신 것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정의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정의는 행한대로 값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마땅히 받아야 할 댓가를 누군가 그 댓가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인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댓가를 지불하지 않도록 용서해주시고 다시 살려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의 정의는 율법에 근거합니다. 심은대로 받게 하신 것입니다. 행한대로 갚아주는 것이 세상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가 행한대로 받아야 할 댓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세례 가운데서 다 지불해주시고, 우리에게는 용서와 자유와 생명으로 대해주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과 같이 되셔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세례예식이 재정된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의 머리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 모두다 세례 예식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죽음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며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임을 고백하며 에수님 부활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났음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단순히 세례를 베푸는 물에 신비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예식을 중요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 세례를 받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세례 겸손한 마음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분과 연합되는 체험을 세례예식을 통해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례를 받고나신 후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임재가 동시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증거가 드러난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의 소리가 하늘로부터 났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매우 기뻐하는 아들이라. " 성자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으로 죄인과 같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령하나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소리를 발하셨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함께 임재하신다는 것을 보옂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시는 것이 흔치 않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논의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이 죄인과 같이 되심으로 죄인을 대신하여 처벌받고 징벌을 담당하심으로 용서하실 수 있는 중재자가 되셨고, 성령하나님께서는 그 역사를 모든 이들에게 믿게 하시는 역할을 감당하셨고, 그 아버지께서 그 아들의 순종을 기뻐하셨고 아들의 발걸음을 보증해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출발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서부터 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왜 능력이 있습니까? 그분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훌륭하신 분이 불의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성육신하여 사람이 되셨고,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그분이 죄인과 같이 되셨고 십자가의 죽음의 세례를 감당하셨고 그분이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되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은 그분이 복음입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부하나님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말리고 계시지 않습니다. 심지어 갈등하시지도 않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이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시고,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이 끊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아들의 신분과 그 능력과 그 존귀함을 내려놓으시고 가장 비천한 종으로 세상의 모든 종을 짊어진 종으로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이 종으로 죽임당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고 계십니다. ? 아버지의 계획이기 때문에.. 이 놀라우신 아버지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러한 계획과 이러한 실행 속에서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성령의 비둘기 같이 임재하심을 체험하십니다. 예수님은 사실 물 세례가 그분에게 있어서 필요없는 것처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는 것도 사실 그분은 필요없습니다. 이미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필요했습니까? 그분이 지금 걷는 걸음.. 죄인과 같이 되셨고 그리고 성령의 강림하심을 체험하는 것은 사람으로써 체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되시고, 죄인과 같이되시고,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감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과 같이 비둘기 같은 성령의 강림하심 가운데서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장차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예수님께 임한 것입니다 .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분의 능력은 예수님의 신성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에 임하신 성령의 기름부으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우신 지혜로운 말씀 그분히 행하신 능력을 보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행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물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사람과 같이 되시어 죄인과 같아지셨는데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함으로 그러한 능력을 행하셨다는 것이빈다. 이사야 11:1-2,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여호와의 영, 곧 성령이 그에게 머묾으로 지혜와 통할과 모략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인성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함으로 그분이 이러한 능력을 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나사럿 예수'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으심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패턴입니다. 예수님아 물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세례를 받고, 또한 성령의 세례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패턴대로 물 세례를 받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세례를 받고 담대하게, 지혜롭게,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휘튼 대학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제럴드 호튼' 박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적용되었던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는것은 사실 전혀 옳지 않다. 이 시대의 위기는 초대교회의 시대의 위기만큼이나 큰 위기이고, 세상의 고통은 그 시대보다 감소되지 않았고, 교회에 대한 대적과 위협은 그 시대와 마찬가지로 동일하다. 이러한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사도행전의 성도들이 경험한 성령의 능력이 필욯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경험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중요한 모델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으셨듯이, 그 위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는 그 성령의 기름부으심, 임재하심, 충만하심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것을 경험했고, 역사상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세례를 경험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회개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십시오. "

  "저 이미 물 세레 받았는데요?" 그런 지나가는 의식이 아니라, 여기서의 회개와 세례는 자신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죽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진 상태,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옛사람 못 박혀 있는 상태 그것이 회개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전 생애에 걸쳐서 회개에 머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회개란 단순힌 한번의 경험이 아니라, 지속되는 상태여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회개란 자아의 죽음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아를 죽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으셨겠지요? 우리 스스로 옛 자아를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의 능력에 의지하여 우리의 옛 자아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우리를 괴롭히는 우리의 적은 누구입니까? 환경이 아닙니다. 그 누구가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의 옛사람입니다. 사람들이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외로워합니다. 왜 혼자 있을 때 외로워할까요? 자신의 옛 사람과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혼자있기를 싫어하는 것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 자신을 괴롭혔기 때문에 죄에 빠지게 하고 유혹에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하는 옛자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회개이고 그 부인의 상태에 머무르게 될 때에 성령의선물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세상을 다 버리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도 자기 자아를 버릴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모든 배와 그물을 다 버렸습니다. 생계를 다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베드로의 모습은 자아가 살아있습니다. 늘 다투지 않았습니까? 제가 서열 몇번째 입니까? 누가 더 큰 자입니까? 자아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세상을 다 버려도 자아를 버리는 것은 스스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받으신 그 세례의 은총을 덧입는 자리로 나갈 때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성령의 충만하심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기도문입니다"나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나는 성령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능한 일로 만드셨습니다. 나는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싶습니다.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나는 성령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요,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정말 그러고 싶냐의 문제입니다. 왜 우리가 더 간절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 앞에 나아가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의 옛자아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순간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다시는 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성령에 사로잡혀 새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냐?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려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주어지기 전에는 우리의 선택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허락된 이후에 우리의 선택은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참된 회개를 통해 나아가는 모든 영혼에게 성령이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할 것입니다. 그 때 놀랍게도 하늘이 열리고 이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는 내 사랑하는 딸이요, 아들이니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절망하고 좌절하고 때로 생명을 내어버리는 것은 이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단 한사람만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하는 그 음성을 들은 사람은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가족마저도 나를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성령 안에서 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는 사람은 삶을 용기있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늘이 열리고 이 복음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이 복음을 거부합니다.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너는 기쁨을 주지 못하는 자녀야!" 이런 사단에 넘어간 옛 자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 복음이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우리에게 귀한 복음을 들려주심에 감사합니다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둘기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과 위에 이 복음이 들려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하늘이 열리고 복음이 들려졌으니 이 복음을 듣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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