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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이동원 목사

이동원 목사 I 누가복음 13장 22-30 I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I 지구촌교회 주일예배

by №1★↑♥ 2024.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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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 -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날마다 말세를 외치고, 말세를 강조하는 신앙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종말의 순간은, 성경적으로 보면 완성의 순간입니다. 그 완성의 순간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하루 매 순간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준비하며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의 행보가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는 지적함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22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3: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그런데 다음절에 보면, 한 구도자가 예수님 앞에 나와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 자기 마음속에 담아둔 가장 중요한 질문을 예수님의 마지막 행보에 앞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23절이 그 질문입니다. 누가복음 13:23a,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아마도 질문에 밑바닥에 전제된 생각은 구원받은 사람이 많다면 나도 희망이 있을 것 같은데 반대로 구원받은 사람이 적다면 나에게 희망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이 질문으로 드렸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이 많겠다. 적겠다가 아니라 직설적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그 문은 곧 닫힐 수 있다는 경고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에 내가 주님의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고 경고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25절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런데 바울 사도도 같은 맥락의 말씀을 주시 있어요. 고린도후서 6:2b,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우리가 은혜받고, 구원받을 기회가 열려 있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은혜받지 못할 시간이..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시간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의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더 이상 그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종종 예수님은 인류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마지막 찬스를 가리켜 큰~ 잔치와 같다고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이후에 사람들을 그분이 초청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초청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 잔치에 초청의 조건은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의 문이 닫히기 전에 응답하고 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방주의 문도 닫힐 시각이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소돔 고모라 때와 함께 심판의 마지막 때에 그 도시에서 탈출할 구원의 시간도 이제 좁혀오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증언처럼 아직은 은혜의 문이 열려 있고, 아직은 구원의 문이 열려 있는 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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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문은 첫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여기서 '힘쓰라'는 말은 '아고니조마이(agonizomai)'라 하면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agony'라는 영어 단어 '고민 혹은 갈등' 바로 이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들어가기를 결단하는 것'이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민이 될 것이라는 말이에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 사고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구원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사고는 뭔가요? 그것은 '착한 일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다른 주장을 합니다. 착한 일 한다고 구원받는다는 것 아니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것은 지극히 적은 소수의 사람만 찾는 구도의 길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자,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하는 마태복음 7:13-14과 비교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것은 좁은 길을 사람보다는 넓은 길을 걷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갈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을 혹은, 이 좁은 문을 노크하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아웃 사이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문을 두드리시겠습니까? 구원을 열망한다면 그래야 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시면, 좁은 문을 들어서기 직전에 주인공인 크리스천이 '세속현자(세속적으로 현명한 사람)'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주인공 크리스천에게 묻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예, 저는 등에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고, 구원을 얻고자 좁은 문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세속 현자'는 웃으면서 "그럴 필요 없다."라고 합니다. "구원을 얻을 쉽고 빠른 길을 가르쳐 드리지요. 저기 높은 언덕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언덕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 마을 이름이 '도덕촌'입니다. 거기 가시면 율법이라는 선생이 있고, 그 선생의 아들은 '예의, 예절'인데 그들이 하라는 것 하시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시면 당신은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가르치는 구원의 길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닙니까? 도덕과 상식을 따라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길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딜레마는, 다른 길이 무엇인가를 몰라서 못 가는 것이 아니에요. 바른 길, 바른 행위를 알고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에 우리의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도덕이 명하는 것을 이미 하지 못했고, 하지 말라는 것을 이미 해버리며 깨트린 사람. 하나님의 도덕적인 요청을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연히 도덕적으로 좋은 길. 그 말을 듣고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도덕촌'으로 가다가 멸망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다시 전도자가 나타나 '좁은 문'으로 가도록 인도하지요. 만일 우리가 도덕과 예절 혹은 상식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예수라는 구원자가 필요할까요? 우리가 유교의 도덕이나, 유대교의 율법 혹은 소크라테스의 상식으로 충분히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가 있었다면, 예수는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도덕은 단순히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못한 존재임을 깨우쳐 주었을 뿐 우리를 구원하거나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도덕의 한계요, 세상이 가르치는 모든 지식의 한계라 할 수 있는 거예요. '아! 기독교는 단순히 율법이나 도덕으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20대 초에 제가 이 구원의 문을 두드리다 깨달은 놀라운 진리가 그것이었어요. 성경에 특별히 한 말씀이 마치 뇌성처럼 저를 흔들어 깨웠어요. '아! 기독교는 단순히 도덕의 길이 아니구나!' 그것이 갈라디아서 2:21b,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은 '하라! 하지 마라!' 에요. 그런데 그대로 해서..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필요도 없고,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도 없었다는 거예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딜레마는 율법을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살지 못하는 게 문제인 거예요. 하나님이 하라는 거 이미 하지 못했어요. '너희가 마음에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했다. 형제를 미워해도 살인했다. 나는 율법을 지켜야 할 자가 아니라, 이미 율법을 깨트린 자'란 말이에요. 내가 나를 구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가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심판을 대시 짊어지고 보혈의 피를 흘리신 것이 복음이구나! 그게 제 인생에 들어왔어요. 제 인생이 새롭게 되는 전환의 새 날을 맞이한 순간이었어요. 

그렇습니다.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이 좁은 문, 구원의 문을 여러분도 두드리시겠습니까? 세상의 비웃음을, 친구들의 야유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척이 다수일 때 우리는 왕따가 될 것이 두려워 신앙의 고백을 한 마디도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좁은 문을 두드리는 고뇌의 자리, 결단의 자리에 서시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없고, 구원의 길을 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좁은 문을 통과하는.. 고민스러운 결단을 속히 내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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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좁은 길을 주의 뜻을 따라 의롭게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좁은 문이 닫히기 전에 해야 할 두 번째는? 좁은 길을 주의 뜻을 따라 의롭게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로역정 순례길을 걷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좁은 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거기서 '선의'라는 친구가 환영합니다. 그리고 "조금 가면 해석자의 집이 있는데, 거기에 가시면 당신이 이 길을 걷는 동안의 모든 주의 사항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십자가의 언덕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드디어 십자가의 언덕에 도달하게 됩니다. 세 명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 천사가 크리스천을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당신의 모든 죄는 저 십자가 때문에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크리스천이 지고 왔던 모든 짐이 굴러 떨어져요. "당신은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천사가 다가오면서 낡은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 주면서 "당신은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천사가 다가오면서 머리에 인을 치면서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두루마리를 주면서 이 말씀을 붙들고 가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체험이에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구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 세명의 천사는 구원 사역의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죄 사함을 선포해 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다시 사신 그리스도 때문에 당신의 죄는 사함 받았다. 그리고 당신은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선포하는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 당신을 인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지요. 이것이 구원의 체험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체험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 길을 다 걷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의 언덕이 구원의 여정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구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여전히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라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한 순간의 결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선언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를 성도로 삼아 주세요.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했죠? 그 순간에서부터 우리는 영광에 이르는 자리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닮고 그분 앞에 서기까지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여전히 좁은 길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신학에서는 우리가 걸어야 할 그 길을 성화의 길이라고 하는 거예요. '거룩해진다.' 이 말이에요. 한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중에 '김세윤' 박사라는 분이 있어요. 이 분이 책을 하나 썼어요. 그 책의 제목이 '칭의와 성화'입니다. 

 

칭의와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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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펴내시면서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세속화된 원인이 있다. 그것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켰기 때문이다."라는 지적 합니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분리시켰다는 거예요.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 그것이 성화의 시작이에요. 그리고 성화의 길이에요.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의롭게 되어 가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성화라고 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개념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지적하기를 '칭의'를 두 가지 단계에서 관찰해야 하는데, "오늘 한국교회는 칭의에 대해서 법적 칭의만을 강조하고, 관계적인 칭의를 소홀히 했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법적으로 "네 죄는 사함 받았다. 너는 이제부터 네 앞에서 의롭다."는 법적인 선언이에요.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관계적 칭의가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 그게 바로 성화의 길이지요. 이것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한국 크리스천들이 구원받았다고 간증하는 사람은 많아도, 거룩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에 바로 이어서 이런 경고를 하십니다. 마태복음 7:22,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주일날 교회 오게 되면, 예배드리게 되면, 교회 오게 되면 "주여 주여" 하잖아요. 기도하면서 예배하면서 주님을 부릅니다. 그런데 그때만은 아닌가요? 예배가 끝나면? 그리고 월요일이 되면 우리는 학교에서 가서 직장에 가서 주님과 상관없이 살지 않습니까? 이분은 교회의 주님이기는 하지만, 직장에서 학교에서의 주님은 아닌 거예요. 종교의 형식은 갖고 주일날 기독교인 비슷하게 살지만, 주께서 우리를 통치하고 지배해 주는 삶의 내용이 없다는 말이에요.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구원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경고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 따라와야 이 사람의 구원이 온전해진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세윤 박사도 한국교회가 앞으로 건강해지려면 "구원받을 만한 삶을 살지 못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탈락이 경고될 필요가 있다."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을 삶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배도자에 불과하다는 경고가 한국교회 속에서 필요하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긴장하며 붙들 때 성화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좁은 문을 통과한 후에 해석자의 집에 들어갑니다. 이 집에서 "앞으로 이 길을 걷는 동안에 경험해야 할 것들을 미리 해석하는 말씀으로 교훈을 받습니다. 그런데 해석자의 집을 빠져나가기 전에 철창에 갇힌 한 남자를 보입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나는 말씀을 거스렀고, 나는 그분의 공로를 격멸했으며, 나는 그분의 보혈을 욕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철창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배도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좁은 길을 날마다 신실하게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하고 십자가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이제 의롭게 되는 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인 것입니다. 자,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 좁은 문을 통과하시고,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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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좁은 길은 고독한 행보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 좁은 길은 고독한 행보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선택한 좁은 길. 그 길은 확실히 세상의 다수가 선택하는 길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하면서 우리는 성경의 진리, 성경의 가치관을 붙들고 때로는 고독하게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냥 우리가 예배의 현장에 참여하는 것 만으로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6-27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3:26-27,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우리의 모습이 어떤가요? 가르침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삶이 그리스도인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이 선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행악을 하는 자 들아 떠나가라." 이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참으로 좁은 문을 통과하고,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아가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는 '열매로 너희를 알리라.'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 열매가 증명한다고 말합니다. 이 증명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향한 경고를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누가복음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셔 영원을 즐기는 사람이 되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 그리고 이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감으로 마침내 영광스러운 잔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유대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붙들고 살았다면 그에게 이 잔치가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29절의 약속을 보세요. 누가복음 13: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안 믿는 사람처럼 다수는 아닐지 몰라도 좁은 문을 통과하고, 좁은 문을 걸어간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에 실현될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는 전 세계 열방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므로 결코 이 길은 고독한 길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잔치가 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의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에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앞에 서 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수많은 나라 가운데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거기에 도달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제 그들의 마지막 잔치의 장엄한 장면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계시록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9:5; 7-8,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의의 행실. 우리의 의롭다 함의 완성의 순간이에요. 우리의 의가 완성되면 장엄한 하늘나라의 잔치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국의 영광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두드리고도 좁은 길을 걷지 못한 이들은 이 영광의 자리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30절의 마지막 경고가 그것입니다. 누가복음 13: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나 옛날에 은혜 많이 받았다/"는 것이 영광의 자리를 보증하지 못해요. 지금도 은혜받고 계십니까? "나 옛날에 정말 신앙생활 열심히 했다."라고.. 지금은 어떠세요? 우리가 과거를 얘기하면서 오늘의 내 삶을 주 앞에 증명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주님 앞에서 먼저 부름을 받고 나중 되는 자가 될 것을 피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자, 그러나 이 좁은 길을 성령의 인도 따라 신실하게 걸어간다면 우리는 이 길에서 또한 동서남북에서 온 수많은 동행자들과 함께 걸어가는.. 결코 고독한 길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하고, 이 좁은 길을 기뻐함으로 감사함으로 오늘도 걸어가시겠습니까? 과거에는 신앙생활을 했다가, 멀어져 간 사람이 있다면 이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을 향해 나누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좋은 계절입니다. 하지만 이 좋은 계절.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마음의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소유하지 못하고 인생의 길을 방황하고 있는 이는 없습니까? 어쩌다 교회는 나오고 있지만.. 나 이 길을 기쁨과 감사로 걷고 있는 사람입니까? 날마다 내가 그분을 닮아가는 기쁨이 있습니까? 그분을 향한 찬양이 내 인생에 넘치고 있습니까?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이 구원의 좁은 문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문을 노크하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좁은 길을 진지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길의 기쁨, 이 길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영생이라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우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조용히 우리의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아직 주님 앞에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 가족 친척 이웃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속히 주님 앞에 나오게 도와주시옵소서.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혹은 방황하는 이들이 있다면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구원의 확증을 베풀어 주시고, 이제 주님 앞에 새로워지는 은혜를 입혀 주시옵소서. 이 계절이 그러한 은혜를 나누는 계절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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